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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99화 (9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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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각.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조금 전 응접실로 향하는 라일라의 뒷모습을 확인했으니 예상대로 방안은 비어있었다. 소피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네가 나쁜 거야. 네가 나쁜 거라구. 라일라.'

원래부터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다. 공부에도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직업학교 다닌다고 무시하는 친구들 때문에 오기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바스대학교에 진학했다. 마음 같아서는 옥스브리지의 명문대에 보란 듯 합격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능력 밖이었다. 명문대는 고작 일이 년 준비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릴때부터 조기교육과 교양을 쌓아야 해서 문턱이 너무 높았다.

겨우 합격한 바스대학도 영국 내에서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나름 만족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생이 되어 그녀가 속해있던 워킹클래스(노동자 계층)에서 벗어나 중산층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디디고 보니, 저만치 더 높은 층계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어린 학생들과 다르게 술 담배를 멀리하고 조신하게 생활하면서 매의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여자의 특권. 젊음의 특권이라는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현재 발 디디고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상대를 갈구해왔다. 찰스도 눈에 차지 않았다. 그와 사귀면 그저 그런 삶을 살게 될 게 뻔하니까.

그러다 마침 우연한 기회에 눈에 들어온 데이빗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귀족이고 사회계층 자체가 다른 상류층이 아닌 이국적인 외국인. 거기다 젊고 잘생긴 데다가 돈도 많아 보였다. 인맥도 훌륭했다. 예의는 발랐지만, 차갑고 쌀쌀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쉬운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앙큼한 것. 얌전한 얼굴로 사기를 쳐?"

고생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듯한 말간 얼굴로 약혼자가 있다고 수줍게 말한 주제에. 소피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졸지에 언감생심 넘보지 못할 남자를 탐내는 이상한 여자로 낙인찍혀버렸다. 그것도 콧대 높은 팔머 남매 앞에서 여봐란 듯이.

'나쁜 년.'

소피는 독기어린 눈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병과 비닐을 손에 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로 주위를 살폈다.

'저거다.'

소피는 침대 옆 협탁에 걸려있는 검은색 모직 코트로 다가갔다. 라일라의 겉옷. 라일라가 그동안 입고 다니던 겉옷은 다행히 하나밖에 없었다. 집에는 더 있는지 알게 뭐야. 일단 여기, 윌버리 하우스에 왔을 때는 이옷 한 벌만 들고 왔으니까.

아침에 조식당 문을 열려던 찰나, 안에서 데이빗과 제임스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데이빗."

"흐음. 자네 때문이야."

데이빗이 짧게 말하자 제임스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좋아. 인정하지. 하지만, 자네도 잘한 것은 하나 없네. 난 답답한 것은 질색이거든. 언제까지 이 벙어리 놀음에 장단을 맞춰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네. 그래서 차라리 세상에 널린 게 여자인데 자네 좋다는 여자를 사귀면 어떨까 싶은 거지. 데면데면해서 재미라고는 하나 없는 그런 목석 같은 여자 말고 말이야."

"나 좋다는 여자는 세상에 널리고 깔렸어. 제임스."

데이빗이 낮게 말했다. 순간 소피는 얼굴에 피가 확 몰리는 느낌이었다. 분명 자신을 포함한 말 같아서였다. 그간 데이빗이 싸늘한 눈초리를 하며 속으로 비웃었다고 생각하니 낯뜨거운 수치심이 눈 밑까지 차올랐다. 고작 동양인 주제에!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어떤가? 우리 꿩대신 닭이라고, 다른 사냥을 해보는게. 적어도 합법적으로 쫓아다니다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빵, 하고 시원하게 쏴 맞힐 수 있거든."

"글쎄."

제임스가 다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날 위해서 그리해 주게. 자네가 보인 행태에 아주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거든. 대체 이유가 뭔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말이지."

"흠. 그건 알 것 없고. 좋네. 사냥하러 가지. 시끄러운 자네 입을 잠시간 막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겠군."

두 사람이 일어서는 소리에 소피는 급히 복도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이윽고, 복도를 걸어나가는 데이빗과 제임스의 뒷모습이 저만치 사라지자 소피는 계단을 되올라가 방으로 향했다. 여행 가방을 뒤져 빈 화장품 샘플케이스와 마침 파우치 안에 들어있던 자욱한 장미향 스킨 샘플 그리고 비닐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조식당으로 내려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햄버튼에게 오늘 윌버리 하우스를 떠나야 하니 든든하게 먹고 싶다고 스테이크를 달라고 주문했다. 햄버튼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그럴듯한 핑계에 이내 수긍한 듯 알겠다고 말해다. 소피는 겉만 살짝 익힌 레어로 부탁했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는 레어 스테이크가 담겼다. 물론, 어젯밤 그 난리를 치며 자기연민에 빠져 울어 재꼈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팠다.

소피는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런던을 떠나 낯선 타지인 바스에서 3년 동안(영국의 대학은 3년) 홀로 대학을 다니면서 깨달은 진실 하나는, 복수도 분노도 몸에 힘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건강이 최고라는 거다. 소피는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물론 접시 가운데 핏물 흥건한 조각 하나를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치우고 나니, 조식당 문을 열고 우아한 엘리자베스가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이내 아침 식사를 시작했고, 오믈렛과 토스트 한 조각 그리고 홍차를 마셨다. 소피는 그녀의 옆에서 찻잔을 기울이며 식사가 끝날 때까지 가만 기다렸다. 배도 부른 소피는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오늘 바스로 돌아가고 싶다고 침착하게 말을 했고, 엘리자베스는 측은한 눈빛으로 동정해주었다.

식사를 마친 엘리자베스가 사교적인 미소를 띠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둘은 응접실로 갔다. 어젯밤에 같이 있었던 응접실로 향하려던 엘리자베스에게 그곳은 나쁜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다고 침울하게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려 몇 차례 깜빡이더니 자신의 무신경함에 대해 사과했다. 이내, 윌버리 하우스에서 처음 그들을 만난 응접실로 향했다.

물론, 소피 혼자 이곳에 올 수도 있었지만. 정말인지 의심받고 싶지 않았다. 윌버리 하우스는 대저택인 만큼 고용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혹여나 그들의 눈에 띄어 혹시 모를 불상사의 용의자로 지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한참이나 위로의 말을 건네던 엘리자베스가 전화기를 들어 운전기사와 통화하느라 등을 돌린 사이, 소피는 응접실 소파 옆 제임스가 앉았었던 자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 옆 탁자에 놓인 병을 손에 들고 트뤼플 오일을 재빨리 빈 스킨 통에 옮겨 담았다.

다행히 주의를 충분히 기울였기에, 염려했던 대로 흘리거나 새지 않아 향이 주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일을 마친 소피는 향을 가리기 위해 스킨통을 열어 손등에 탁탁 발랐다. 트뤼플 오일의 향은 애초에 강하지 않아 장미향 스킨에 흔적도 없이 묻혔다.

"어, 음. 자동차는 곧 준비가 될 거 같아요. 람퍼트 양."

통화를 마친 엘리자베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나서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자, 소피는 짐짓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올라가서 짐을 챙겨서 내려올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팔머 양."

둘은 예의상 가볍게 포옹했다. 그리고 나서 방문을 빠져나오려는데 저만치 조식당 앞에 서 있던 라일라가 보였다. 소피는 살금살금 재빨리 계단으로 향했다.

소피는 손에 든 검정색 모직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괘씸한 계집. 실제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하늘만이 알고, 결과도 아마 확인할 수 없을 테지만, 이렇게라도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풀리지 않을 거 같았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우롱해? 난, 당하고는 못 살아. 난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소피 람퍼트라구.'

소피는 검정 코트를 활짝 펼쳤다. 오늘 남자들이 사냥을 나간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그 무시무시한 커다란 개도 데리고 나갔겠지. 그 개는 로트와일러로 종자체가 수렵용으로 타고난 개니까. 그 시커먼 똥개 이름이 뭐랬더라? 소피는 미간을 찡그렸다. 루푸스? 루퍼스? 뭐 그런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틴어로 루퍼스(Lupus)는 늑대라는 뜻이다.

'너만 믿을게. 덩치 큰 늑대야. 부디 광포하고 야만스러운 성질을 마음껏 발휘해 주렴.'

소피는 비닐에 챙겨온 핏물 가득한 고기조각을 모직 코트 안쪽 등의 정 가운데 문질렀다. 축축하게 스며들도록 꼼꼼하게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흥건했던 고기조각이 패스트푸드 햄버거 패티처럼 수분 없이 바짝 말라 쪼그라질 때까지 짜고 또 짜고 누르고 또 눌렀다. 다행히 검은색 모직 코트는 겉도 아니라 안쪽 부분이라 그런지 핏물이 배어들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소피는 만족스럽게 입매를 길게 끌어올리고서 스킨 통에 담아온 트뤼플 오일을 듬뿍 뿌렸다. 핏물이 묻은 부위 위에 남김없이 듬뿍 덧발랐다. 기름이라 그런지 얼룩이 조금 남아서 거슬렸으나,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어차피 내 옷도 아닌데, 알게 뭐람?!'

소피는 이내 챙겨온 장미향 스킨을 바를까 하다가,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분명 응접실에서 스킨향을 맡았을 테지. 그럼 의심받을 테고. 냄새는 기억의 촉매제니까. 그런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수없이 많은 범죄 드라마를 보며 범인의 멍청함에 혀를 끌끌찼던 소피로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흐음, 바스로 돌아가자마자 사라네 집에서 나올 거니까. 뭐, 딱히 의심받아도 상관은 없지만.'

소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손님방 한쪽 구석의 욕실로 걸어갔다. 향을 덮을 만한 것을 찾다 보니 비누가 보였다. 비누? 비누라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차피 기름과 피 얼룩은 가릴 수 없는 거고. 차라리 얼룩을 덧바르지 뭐. 소피는 무성의하게 비누를 들어 오일을 뿌린 곳을 교묘하게 피해 옆에다가 비누를 덧발랐다. 개들은 후각이 예민하니 멍청한 똥개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겠지.

설사, 오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겨울 코트 하나는 못 쓰게 망쳤으니까 분풀이는 조금 한 셈이다. 일을 마친 소피는 코트를 고이 접어 다시 협탁에 걸어두었다.

코트 안쪽에다 난리를 쳐놨기 때문에 겉은 그저 검은색 얼룩이 조금졌을뿐 크게 티나지 않았다. 흡족한 표정 가득한 얼굴로 소피는 손을 탁탁 털고 모든 흔적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감춘 후 발걸음을 돌렸다.

-달깍.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리다가, 문이 열린 순간 소피는 깜짝 놀랐다.

"엄마얏!"

문 앞에는 라일라 역시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구. 소피는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소피."

라일라가 소피를 불렀다. 어떡하지? 어떡해?! 침착하자, 침착.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그냥 분풀이로 코트만 조금 손봤을 뿐이야.

"라일라."

소피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여긴, 제방인데 어떻게.."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 소피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얌전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년 때문이었다. 어제오늘 기분이 최악인 건. 그냥 작은 분풀이를 했을 뿐인데 지레 겁낼 필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스스로에게 뇌까린 소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바스로 갈 거에요. 라일라."

소피는 시선을 낮췄다가 다시 들었다.

"...어제는 조금 심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가기 전에 얼굴 보려고 들렀어요. 마침 다행이네요."

"아, 네..."

라일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와, 맘에안들어. 얌전한 척하면서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앙큼한 년. 소피는 라일라를 향해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래도, 그쪽에서 먼저 잘못한 건 변함없어요.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은 라일라가 나쁜 거에요."

"............"

라일라는 예의 그 맹숭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소피는 가볍게 라일라를 흘겨보고는 탁, 어깨를 부딪쳐 그녀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흥. 재수 없어. 소피는 입매를 삐죽거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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