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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라희는 순간, 응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피를 따라 나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피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저만치 보이는 로비를 향해 뛰듯이 걸었다.
"소피!"
재차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희는 급히 소피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텅 빈 대리석 복도에 깔린 카펫이 발에 밟혀 탁탁탁, 둔탁한 소리를 냈다. 눈앞에 보이는 소피는 어느새 로비 뒤쪽 계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대리석 계단의 거친 발소리가 텅텅 울렸다.
"소피, 거기 멈춰 봐요!"
라희가 불렀지만,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뒷모습은 이내 계단 위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똑똑. 똑똑. 똑똑.
라희가 숨을 몰아쉬며 닫힌 소피 방문을 재차 두드려도 방문 안쪽에서 반응은 없었다.
"소피! 내 말 좀 들어봐요."
라희는 문을 두드리며 크게 소리쳤다. 똑똑, 똑똑, 소피의 방문을 두드리는 손이 제법 얼얼해질 때까지 마구 문을 노크하자, 잠시 후 굳게 닫힌 방문이 조금 열렸다.
"소피...."
비스듬히 열린 좁은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소피가 차가운 얼굴로 라희를 싸늘히 노려보았다. 라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피는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창백한 입매가 파르르 떨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잔뜩 담은 눈이 냉랭한 기운을 쏘아내며 라희를 향했다. 맹렬한 증오의 빛이, 굳게 닫힌 입술이, 말 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마음속 깊은 상처 입은 소피의 모습을 본 라희는 당황해서 눈을 재차 깜빡였다. 오해라고, 변명하려던 말은 목구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음이 묵직한 돌덩이를 쿵 얹은 것처럼 무겁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라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스웠어요?"
천천히 열린 입술에서 나온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라희 귓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속이 따끔거렸다. 뭔가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신이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아득하다.
"......."
라희가 입을 다물고서 서 있자. 문 앞에 가만 서 있는 라희를 곧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점차 흐려지더니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눈빛이 날카롭게 섰다.
"내가 우스웠냐고요. 얼마나 비웃었어요? 속으로?"
울먹이는 그녀의 말에 돋친 가시가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왔다. 귓속을 예리하게 할퀴는 음성에 라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피는 우두커니 굳어 서 있는 라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하, 재미있었어요? 사람 가지고 노는 거?"
떨리는 음성에 잘게 박힌 가시가 라희를 향했다. 분노한 눈동자가 핏발을 세우고 똑바로 라희를 찔러 왔다.
"왜 데이빗이랑 그런 사이인 거, 나한테 먼저 말 안 했어요?"
똑바로 마주 서서 노려보는 소피를 향해 라희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바흐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하겠는가. 돈 받고 몸을 팔았었다고? 그의 그녀인 이유진이 준 돈을 가지고 바흐에게 진 빚을 갚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숨어들어와 유진이 사주한 대로 숨죽이고 살았다고? 그러다 그가 찾아왔는데 목구멍을 막아버린 위약금 때문에 저리 가라는, 멀리 사라지라는 말조차 걸지 못하고 있었다고.
고작 만나지 일주일도 안 된 소피에게 그런 말을..?
라희는 참담한 심경으로 눈꺼풀을 닫았다가 천천히 떴다. 처음부터, 여기 윌버리 하우스에 온 것 자체가 에러였다.
"크리스마스날, 내가 데이빗에게 관심 있다고 했을때. 그때 밝혔었어도 됐잖아요. 데이빗과 진지한 사이라고. 과거가 있는 사이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그런데 이렇게 혼자 설레고 착각하게 만들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잔뜩 고였다가 방울져 두 뺨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후, 하고 숨을 억누르고서 야멸차게 말을 뱉었다.
"하다 못해, 넌지시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렇게 멍청이가 된 기분은 아닐 거야. 최소한 알고 당한 거니까. 그런데, 오늘같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 바보 만드니까 기분 좋아요? 그것도 팔머 양 앞에서? 라일라,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람 마음 가지고 놀고, 바보 만들고, 비웃으면서 쾌감을 느껴요?!"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가 내질러졌다. 사나운 표정이 분노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갑자기, 소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크게 악을 썼다.
"당신 사이코패스야?"
소피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부짖었다. 차갑게 쏘아보는 눈초리가 라희를 움츠러들게 했다. 길고 날카로운 비명 같은 쇳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사이코 패스냐고! 사람 마음 가지고 노니까 좋아? 좋냐고! 약혼자가 있다며!"
소피의 붉게 상기된 눈가에 눈물이 마구 번졌다. 울부짖은 그녀를 향해 라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분노한 그녀는 입을 다물고 파르르 떨면서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라희를 노려보았다.
라희는 머뭇거리며 떼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원망과 노여움이 가득 찬 헤이즐빛 눈이 노려보고 있다.
"나, 나는, 소피... 그게..."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어쨌거나, 소피는 지금 상처를 입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답답하게 짓눌려 아팠다.하지만, 라희 역시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당황스럽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몰라. 모르겠다. 솜털이 곤두 선다.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새하얗다. 라희는 시선을 바닥으로 힘없이 떨구었다.
"......미안해요."
더듬거리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여 겨우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 뿐이었다.
뿌연 시선이 라희를 향해 쏘아졌다. 소피는 차갑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 미안하다고요? 그 말 하면 다인 줄 알아? 당장 나가. 나가! 지금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쾅.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거세게 닫혔다.
싸늘히 닫힌 방문 앞에 덩그러니 선 라희는 현기증이 나서 입술을 짓씹었다. 몸의 감각이 둔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띵하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생각하기 싫었다.
***
뒤죽박죽된 엉킨 머릿속으로 밤새워 뒤척이다 보니, 늦잠을 자 버렸다. 침대 위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떠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10시였다.
소피는?
라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일이 정말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 소피의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와 어둠 속에서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손톱을 잘게 씹었다.
하다못해 바흐와 소피 단둘이서 있었을 때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했더라면, 그렇게 미친듯 분노하지는 않았을 테지. 제임스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소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의 원흉인 라희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후...."
당장 내려가서 소피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그녀를 마주하지? 아직도 귓가를 쟁쟁이 울리는 소피의 분노 찬 울부짖음이 머릿속을 할퀴는 것 같다. 평소 주위에 피해를 끼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
잠에서 깨고도 한참을 방에서 밍그적대다가 결국 터벅터벅 걸어 1층으로 내려왔다. 아침 식사 생각은 전혀 없었고, 물 한 모금 입에 대기도 싫었지만 조식당(morning room)으로 향했다. 모두에게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통보는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어젯밤 멍한 머릿속으로 쉼 없이 생각을 거듭해 내린 결론은, 이 지긋지긋한 악연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이었다. 바흐와 그의 지인들. 더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국내로 귀국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비행기 티켓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고 기간만 명시된 오픈 티켓이었고, 전화만 걸면 바로 귀국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언제나 도망만 친다. 라희는 쓸쓸히 자조했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치는 수밖에.
바흐가 쫓아올지도 몰라. 하지만. 모르겠다.
불가항력적인걸.
전신을 짓누르는 힘 없는 무력감이 혈관 한올 한올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
매일 아침, 새날이 밝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
라희는 조식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복도에서 활짝 열린 식당 안쪽이 보였다. 고용인들이 식기를 치우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식당은 비어있었다. 정작 있어야 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어느새 라희를 발견해 곁으로 다가온 햄버튼이 정중히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각이 없어서요.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가셨나요? 소피는요? 오늘 식당으로 내려왔나요?"
"람퍼트양은 조금 전 식당을 나가셨는데, 못 보셨습니까?"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네."
"아가씨와 응접실(visiting room)쪽으로 가셨는데요. 그리고.."
햄버튼은 조식당의 치렁치렁한 커튼 너머 창밖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잔디 언덕을 손으로 가리켰다.
"도련님과 미스터 한은 하우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쪽 강가에 계실 겁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사냥을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라희는 고개 숙여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 일인걸요. 혹시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찾아갈 수 있어요."
조식당을 벗어나, 햄버튼이 말한 응접실(visiting room)로 향했다. 이틀 전, 처음 윌버리 하우스에 도착했을 팔머 남매를 만난 곳이었기에 수많은 방 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라일라."
응접실 문을 여니, 엘리자베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로 라희를 불렀다. 라희는 눈으로 인사를 하고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응접실에 소피의 흔적은 없었다.
"....소피는요?"
라희가 물었다.
"아, 람퍼트 양이요? 조금 전 방으로 올라갔는데요. 오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안 그래도 차를 준비시키던 중이었어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보여서 바스까지 태워 보내려구요. 이대로 그냥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는 무리일 거 같아서요."
"아..."
소피도 라희와 같은 생각이었다. 막상, 껄끄러운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얄팍한 안도감도 잠시, 라희는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보지 않아도 사라네 집에서 마주칠 것인데. 어떻게 얼굴을 보지.
어제 미안하다고 말하긴 했으나, 방으로 돌아와 밤새 생각해보니 소피와 허심탄회하게 풀고 자시고 할 꺼리가 없었다. 바흐와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입을 닫는 수밖에.
소피를 생각하자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라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자, 옆에서 안색을 살피던 엘리자베스가 다정히 말을 건넸다.
"아침 식사는 했나요? 안색 좋지 않은데."
그녀의 말에 정신이 든 라희는 고개를 들고 엘리자베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팔머양."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일라, 팔머양이 아닌, 엘리자베스라고 불러주세요. 친구들은 리즈나 리지라고 부르기도 해요.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그러고 보니, 소피에게는 성으로 꼬박꼬박 호칭하던 엘리자베스가 라희는 성인 미스 송이 아닌, 라일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작 이름을 불린 상대가 소피였다면 뛸 뜻이 기뻐했겠다라는 씁쓸한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라희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바흐와 팔머 남매의 끈끈한 연대를 확인한 것 같아서 껄끄러웠다. 여긴, 그의 절친한 친구의 집이니까. 라희는 복잡한 심경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오늘 바스로 돌아간다는 말 하려고 왔어요."
"라일라도 돌아간다고요?"
엘리자베스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 푸른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내일모레면 우리도 여길 떠나 런던으로 가니, 그때까지 머무르다 같이 가는 게 어때요? 런던에서 신년 맞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구요. 오빠와 난, 템즈 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더 샤드(the shard: 런던 중앙에 위치.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NYE(New years Eve: 새해맞이)를 위해 샹그릴라 스위트를 예약해 두었어요. 우리 같이 가요."
그녀는 가만 서 있는 라희의 팔을 잡고서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네? 그렇게 해요."
라희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니에요. 원래 이곳에 온 이유는 소피 때문이었는데. 소피도 돌아간다니 이만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엘리자베스는 푸른 눈을 굴려 라희를 바라보다가, 굳어있는 라희의 표정을 보고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낮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정말 아쉽지만, 라일라 뜻대로 하세요. 아무래도 집이 아니니 낯설었겠죠."
"이해해 주어서 고마워요. 팔머 양."
엘리자베스는 라희의 손을 잡고 가볍게 손등을 쓰다듬었다.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이 손등을 스쳤다.
"그런데, 지금 람퍼트 양을 위해 차를 보내려고 대기시켰으니까. 라일라는 오후에 출발하도록 하세요.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저를 위해서 친절하게도,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으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람퍼트양과 함께 바스에 돌아가실 생각은 아니실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이대로 라일라를 보낸다면 제 마음이 정말 편치 못할 것 같거든요. 이별을 달랠 시간을 주세요."
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가거나, 버스를 타고 간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엘리자베스가 깊은 푸른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라희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녀의 평소 고고하고 오만한 이미지를 생각해 볼 때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부탁하는데. 차마 차갑게 쌩하니 외면할 수 없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단지, 차가 바스에서 돌아오는 오후에 출발해달라는 거다. 무분별한 행동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한명으로 족했다.
"네. 그럼 오후에 출발하도록 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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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익.. 라희를 괴롭히는게 취미가 아니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