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7화 (9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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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비슷한 저녁 식사 후, 방으로 올라가려는 라희에게 엘리자베스가 컨디션이 괜찮으면 함께 어울리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이틀이나 식사 후 곧장 방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은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무례인 거 같아서 라희가 잠시 망설이고 있자, 엘리자베스는 라희를 재촉하며 1층 코너의 응접실로 이끌었다.

식후 응접실(drawing room)은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벽과 기둥에 온갖 예술품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가운데 화려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반짝였다.

한쪽 벽의 거대한 벽난로에서는 큼직하게 쪼개진 통나무가 은은한 향을 피워올리며 시뻘건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고, 방 가운데는 붉은색 공단 소파와 안락의자가 그리고 벽에는 책장이 그 옆으로 이어진 창가에는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당구대와 어딘지 익숙한 모양의 악기가 놓여있었다.

라희는 악기를 발견하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랜드 피아노 모양을 닮았지만, 페달이 없는 하프시코드였다.

오랜 친구라더니, 취향도 비슷한 걸까. 아니면, 유서 깊은 귀족가라서 응당 이런 악기 한둘쯤은 있는 걸까. 라희가 붉은빛이 도는 하프시코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일행은 각자 편한 자리에 착석했다.

라희 역시 머뭇거리다가 엘리자베스 옆의 안락의자에 앉자, 총관리인 햄버튼의 지시로 제복을 입은 고용인들이 쟁반을 들고 나타나 분주하게 소파 사이사이 놓여있는 테이블 위로 와인과 음료, 그리고 곁들일 핑거푸드를 날랐다.

"데이빗."

엘리자베스가 바흐를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 가운데, 엘리자베스가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어제는 부탁해도 들려주지 않았잖아요? 깨끗이 무시당했죠. 그래도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은 거 같아서 한번더 부탁해 볼래요."

"흐음."

제임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라희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바흐를 보았다.

"요청 곡은 어제와 동일해요. 미뉴엣 G장조요. 특히 114번이 좋더라구요?"

엘리자베스가 눈짓으로 창가의 하프시코드를 가리켰다. 바흐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자, 옆에 있던 소피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제 팔머 양께서 말한 그 곡이죠? 안나 막그달레나를 위한 소곡집이라던. 저도 어젯밤 방에 돌아가 검색해서 들어보긴 했는데, 피아노 연주된 곡뿐이더군요. 정말 하프시코드로는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한 걸요?"

"어서요. 데이빗 오빠. 난 바흐가 두 번째 아내를 위해 작곡한 곡들을 무한히 애정 한다구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스는 두 번째라는 단어에 힘주어 발음했다. 바흐는 짧은 한숨을 쉬고서 하프시코드로 다가갔다. 현을 튕기며 오 분여간 조율을 마친 그는 엘리자베스가 신청한 안나 마그달레나를 위한 소곡집 중 BWV Ahn 114.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벽난로 소리가 방안의 정적을 채우는 가운데 선명하고 맑은 하프시코드 음색이 흘러나왔다.

굉장히 익숙한 멜로디였다. 집중해서 음악 소리를 듣던 라희는 이내, 한동안 국내에서 유행했던 팝송과 같은 멜로디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응. 고마워요. 오빠. 오늘은 꼭 들어줄 줄 알았거든요. 나도 어머니가 쳄발리스트였다면 이렇게 부탁할 필요없이 직접 연주를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엘리자베스."

제임스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빠가 주는 용돈으로 쇼핑하고 자선행사에 참석하기만으로도 충분히 바빠요."

그 뒤 이어지는 말은 오늘 날씨가 화창했다는 말과 함께, 저녁 식사에 대한 짤막한 감평, 그리고 낮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감상이었다.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여 대화했다. 연말이니만큼,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나마 올해는 데이빗 오빠가 와서, 이 조용한 윌버리에서 연말을 보내니 마음 편하네요. 런던 사교계는 연말이면 지독하거든요."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와인을 기울였다. 그러자 소피가 의문을 표했다.

"의외네요. 인기가 많으셔서 모임과 파티를 즐기는 줄로만 알았거든요. 유명인이시잖아요. "

엘리자베스는 와인잔 안의 잔잔한 핏빛 수면을 골똘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게 문제인 거 같아요. 수많은 파티와 모임에서 제게 친근한 척 다가오는 사람이 많거든요. 처음엔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결국 친해져 보았자 어디 어디 투자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에요. 남녀 모두 결론은 같아요. 신탁자금을 빼서 자신에게 투자해달라는 거죠. 아니면, 저를 인맥을 넓히는 데 이용하던가요. 저로 인해 다른 사람을 소개받길 원하는 거죠.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굉장히 피곤해져요. 차라리 조용한 본가가 나아요."

"그런 고충이 있군요. 그래도 새해엔 버킹엄 궁에 가실 거죠?"

소피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가서 깜찍한 케임브리지 공자님을 봐야죠. 조지 왕자 너무 귀엽지 않아요? 작은 몸으로 성장을 입고 있는 모습에 마구 설레는 거 있죠."

아직 갓 스무 살의 어린 아가씨다운 풋풋한 감성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드러났다. 라희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적당히 호응하며 조용히 와인잔을 기울였다.

"람퍼트 양은, 이번 연말에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엘리자베스가 묻자, 소피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데이빗."

소피가 건너편에 앉아 제임스와 금리 인상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던 바흐를 불렀다.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소피를 응시했다.

"좀 있으면 뉴 이어스 이브인데, 무얼 하실 건가요? 팔머 양께서는 다음날 버킹엄 궁에서 열리는 신년서훈 행사에 참석하셔야 한다시길래, 그 전날 런던으로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바흐는 갑작스러운 소피의 질문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라희는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다보며 지루한 시간아 흘러가라고 되뇌고 있었다.

"혹시, 아무런 일정이 없다면, 저와 함께 런던 불꽃놀이 보러 갈래요? 그날 올해 마지막 날이라서 밤 행사가 성대히 열리거든요. 런던 아이 근처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면 상당히 멋질 거에요. 하늘을 수 놓는 화려한 불꽃과 함께 시시각각 조명 색이 바뀌거든요."

소피가 밝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모두 앞에서 공개적으로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글쎄요......."

그는 힐끔 고개 숙인 채 손안에 와인잔을 빙글 돌리는 데 집중한 라희에게 시선을 던지다가 거두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일로 바쁠 것 같습니다만."

바흐의 대답에 소피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자, 그들을 관심있게 바라 보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남자로서 레이디의 데이트 신청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법을 모르나 보군."

엘리자베스는 제임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제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잊혀진 법이라지만, 예전에만도 여자 쪽에서 프로포즈했을 때 거절하면 답례로 키스를 해주거나 1파운드 금화를 물어야 했거든. 스코틀랜드에서는 1288년 마가렛 여왕에 의해 법으로도 만들어졌던 일이기도 하네."

"오빠, 그건 립이어 (leap year: 윤년 2월 29일)에 해당하는 말이잖아요."

엘리자베스가 뾰족하게 지적하자, 제임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식적으로야 립이어에 허용되어있다 하지만, 다른 때에도 적용 하지 말란 법은 없지. 내 말의 포인트는, 이 나라는 레이디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걸세. 우린 여자를 존중하고 또 그녀들의 완만한 분위기를 중요시하거든."

제임스가 은근한 눈짓으로 바흐를 바라보자, 그는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데이빗 오빠는 그날 바쁘다구요. 아니, 아마 바쁠 예정이에요."

엘리자베스가 은근한 강요의 분위기를 자르듯 말했다.

"전 세계 주식시장도 12월 30일에 폐장했다가 1월 2일에 개장하는데 데이빗이 바쁠 이유가 뭐가 있을까. 혹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나야말로 궁금하구나."

제임스는 엘리자베스 옆 라희가 왼손에 쥐고 있는 와인잔을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기대했던 하늘색은 아무래도 데이빗 취향이 아닌듯해서 말이다. 가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조금 답답하거든."

느닷없는 제임스의 말에 라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러자 소피가 눈을 크게 뜨고 제임스를 향해 물었다.

"하늘색이라니요?"

"글쎄요. 두 달 전 저 친구가 내게 UK Home Office(영국 내무국)에 뭔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최근에 바뀐 비자 규정 때문인데. 영국에 관광비자로 입국해서 어학원에 등록하면 당국에 신고하게 변경되었죠. 관광 비자 보유자는 6주 이하로 어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새로 생겼거든요"

뜬금없는 제임스의 말에 소피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한 지점에 멈췄다. 소피의 찡그려진 눈 가득 라희의 왼손에 걸려있는 은빛 링이 포착되었다. 반짝반짝. 그녀를 약올리 듯, 그 위에 박힌 푸른 물빛 보석이 영롱한 빛을 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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