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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이어지는 대화는 남자들의 지루한 경제 이야기였다. 국제 저유가 사태가 어쩌고, 국제 금시세의 추이가 어쩌고 환율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그쪽 전문 용어들이 난무해서 잠자코 듣던 엘리자베스는 이윽고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맞은편 소피를 바라보았다. 소피는 자신에게 던지는 관심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를 끌어올렸다.
"람퍼트 양은 바스대학을 졸업하셨다구요?"
엘리자베스가 점잖을 빼며 이름이 아닌 성으로 소피를 불렀다. 벌써 두 번째 보는 데다가 손님으로 초대된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쉽사리 친해지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졸업 후 바스 시청 인턴으로 일하다가 새해부터 근무하기로 했어요."
"공무원이 되시겠군요. 바스라, 좋은 도시지요. 예전에는 그쪽에서 시즌(사교계) 행사가 열렸다고 하던데, 요즘은 그런 행사가 별로 없다고 들었어요. 공무원이 되면, 그쪽 행사를 추진해 보시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네요. 나중에 참고하도록 할게요. 지금은 아직 그런 의견을 낼만한 직위는 아니라서요."
"아, 그러시겠군요."
엘리자베스가 건조하게 입가를 올리자, 소피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팔머 양께서는 이번 해에 갭 이어(gap year:고교 졸업 후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한해 쉼)를 갖기로 하셨다면서요? 잡지에서 봤어요."
"네. 새 학기가 시작되는 이번 9월까지 편안히 쉬면서 느긋하게 지내려구요. 입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오빠는 그동안 놀지 말고 친구들을 사귀라며 퀸 샤를로트 데뷔탄트 볼에 내보내 주기도 했죠."
"어머! 하이클래어 성에서 열린 거죠? 케이블에서 봤는데 정말 화려하던걸요. 단순히 식사권 값만 2500 £ (500만원)라고 들었어요."
소피가 흥분해서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예의상 웃음을 띠고서 말했다.
"올해에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이 참석했더군요. 그래서인지 리허설 시간만 꼬박 반나절 걸렸어요. 중동에서 온 친구들은 무도회의 예법에 맞는 절(curtsy)부터 새로 배워야했으니까요. 물론 두바이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낯설지는 않았어요. 애프터 디너 댄싱에서 만난 그들의 오빠들도 나름 괜찮았고요. 하지만 외국인이니 어찌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생각해보니 꽤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부럽네요. 그런 데는 티비에서나 봤어요."
소피가 동경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엘리자베스는 턱을 당기고서 미소 지었다.
"소피도 나중에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엘리자베스가 측은한 듯 말하자, 소피는 자신의 옆에 앉은 데이빗를 조용한 눈으로 곁눈질했다.
"혹시, 새해에 버킹엄 궁에 초대받으셨나요?"
소피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네. 신년서훈(Queen's New Year Honours) 행사가 있으니까요."
"와우. 올해 이슈였던 각계 유명인들이 잔뜩 몰리겠군요. 저는 고작 트라팔가에서 하는 신년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것이 전부인데요."
라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마지막 디저트를 깨작거렸다. 원래가 낯설고 불편한 자리인 데다가, 바흐까지 맞은편에 마주하니 음식이 도통 먹히지 않았다. 차라리 소피처럼 눈을 빛내며 엘리자베스에게 이것저것 질물을 붙여보기라도 했으면 식사시간이 덜 지루했을 텐데 고급 영어를 쓰는 엘리자베스에게 쉽게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 수면부족으로 누적된 피로에다가 든든한 음식까지 먹고 나자 몸이 노곤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피곤했다. 라희는 무겁게 내려오는 눈가를 손끝으로 연신 매만졌다.
라희가 잠자코 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이 어느덧 저녁 식사 코스가 모두 끝났다. 일행은 제임스의 제안으로 식당에서 벗어나 복도를 지나 식후응접실(drawing room)로 이동하려 일어섰다.
윌버리 하우스는 유 서깊은 귀족가의 저택답게, 그 크기와 용도에 맞춘 다양한 방이 있었다. 1층만 해도 처음 방문한 손님을 맞는 응접실 (visiting room), 그리고 행사 때 쓰는 7개의 접견실 (state room), 접견실 앞 대기실(anteroom), 일반적인 거실 (sitting room), 조식 식사용 방(morning room), 다이닝 홀, 식당, 등 일반적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방이 수도 없이 많았다.
"윌버리 하우스의 헌팅룸(hunting room)이 그렇게 멋지다던데요."
소피가 말하자, 제임스는 관심에 놀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에 자주 소개되긴 했었죠. 건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서재와 더불어 남자들의 공간인지라 대대로 백작들이 정성껏 꾸몄으니까요. 지금도 가끔 사용하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 자체가 총기나 사냥한 동물의 박제로 꾸며진 만큼. 여성분들과 함께하기에는 껄끄러운 곳이기도 하죠. 분위기가 사뭇 날카롭거든요."
"날카롭기보다는 공포스럽다구요. 죽은 사슴의 뿔 하며, 곰의 머리 하며.."
제임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헌팅룸은 질색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냄새부터가 역겹다고 투덜거리며 이상한 곳에 갈 생각하지 말고 모두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식후 응접실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빠져나갈 기회를 조심스레 살피던 라희는 겨우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건넸다. 엘리자베스는 혹시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며 걱정했다. 라희가 고개를 저으며 피곤할 뿐이라고 말하자 제임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피는 바흐 곁에 바짝 붙어서서 먼저 올라가서 쉬는 편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라희는 일행에게 고개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서 곧장 복도를 벗어나 2층 침실로 향했다.
1층의 방은 대부분 고풍스러운 벽난로였지만, 2층의 침실들은 거의 현대적인 시설로 갖춰져 있어서 창가 옆 라디에이터와 천정의 히터로 방안은 훈훈했다.
"후..."
방안에 들어오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라희는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노곤하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낯선 장소였지만, 포근한 침대 속에 들어와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그러다 어쩐지 방이 조금 더운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희는 이내 잠잘 준비를 마친 후 천정의 히터와 방안 조명을 모두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대체 왜 느닷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이곳에 와있는지 스스로도 의문투성이였지만, 다행인 점은 엘리자베스가 새해 첫날 버킹엄 궁전에 초대받았다고 했으니, 그 전에 런던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기에 이곳에 얼마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슬며시 미간을 찡그리던 라희는 쏟아지는 잠에 눈을 감았다.
***
다음날은 정말 귀족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창한 아침 식사 후, 엘리자베스가 타운을 소개해 주겠다고 나섰다. 모두를 불러 세우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젯밤 소피가 윌트셔에서는 고작 스톤헨지밖에 가보지 않았다며 부탁한 모양이었다. 날씨가 흐림 없이 화창하니 좋다며, 마을까지 거리가 가까우니 이왕이면 건강을 위해서 걷자는 엘리자베스 말에 모두 동의했다.
"정말 기대돼요! 전 런던 토박이라 솔직히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지 못했거든요. 바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낯설어요."
소피가 바흐 곁에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제임스는 바흐와 걸으며 금융 관련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기쁜 듯 보였다. 둘의 이야기는 주로 채권, 국채, 파생상품, 국제 선물등 전문적인 주제에 국한되어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에는 무리가 있는 내용이었으나, 소피는 곁에서 눈을 반짝이며 듣다가 모르는 말이 있으면 질문을 던졌다.
"우린, 함께 걸을까요?"
옆에 서 있던 엘리자베스가 입가에 사교적인 미소를 올리며 라희를 향해 말을 건네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으레 관광객들에게 예의상 묻는 질문인 영국에 온 소감이라던가, 인상 깊었던 장소에 대해 물었다. 라희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어쩐지 완벽한 그녀에 비해 어설픈 문법이나 단어 선택 혹은 악센트의 트집이 잡힐까 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윌버리 하우스 정문에서 이어진 마을은 킹스버리 스퀘어를 기준으로 길게 뻗어있는 전형적인 영국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보다는 전체적으로 낮고 아기자기한 토속적인 건물들이 주를 이뤘다. 영국의 제법 큰 타운마다 있는 성당과,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노르만 성채의 흔적을 구경했다. 그리고 지금은 저택의 관리 비용 때문에 지역 사회의 소유가 되어 관광지로 개발해 외부에 개방 중이라는 몽페로 하우스로 향했다.
윌버리 하우스보다 훨씬 규모도 작고 정원도 볼품없어 그저 큰 집에 지나지 않아 보였지만, 몽페로 하우스를 구경한 덕분에 윌버리 하우스의 웅장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이제, 데이빗 오빠라면 이 정도의 집은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을 걸요. 그렇죠?"
엘리자베스가 넌지시 바흐를 향해 말하자,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자베스 넌 데이빗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야 불가능했을 테지. 하지만, 리먼 사태 이후 데이빗은 네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했나 보구나."
"흐음. 그래요? 내 기억 속의 데이빗 오빠는, 여름 방학 때 브랜다의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용돈을 충당하던 예일대 프레시맨(freshman: 1학년 신입생)이었는데요."
"넌 막 키가 크기 시작한 삐삐 롱스타킹(Pippi Longstocking: 말괄량이 삐삐) 같았지."
잠자코 있던 바흐가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전 그때도 지금과 변함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구요. 그나저나 데이빗 오빠가 제 생각보다 부자인 것은 확실한가 보네요. 하긴, 그러니 언론 재벌의 후처 자리를 포기하고 돌아왔겠죠? 결과야 좋진 않았지만. 다른 것이라도 얻어냈으니 충분히 시도해볼 만했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비꼬는 듯 말하자 제임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글쎄? 모르긴 몰라도 2008년 기준으로도 몽페로 하우스가 아닌, 우리 집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을 만한 자산을 이미 갖췄을걸? 나도 비록 처음은 에오르그 씨의 권유로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고 투자를 시작했지만, 리먼 사태 바로 직전 꽤 불어난 금액에 놀라 본격적으로 데이빗에게 투자해서 상당한 재미를 봤지. 기억 안 나? 그때 네게 넉넉히 용돈도 주었잖니. 물론 슬프게도, 지금은 그 많은 액수가 에르메스 가방 몇 개로 남은 게 고작인 것 같다만."
"흐응."
엘리자베스는 시치미를 떼며 입을 다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이 말한 내용을 복잡한 심경으로 듣고 있었고, 소피는 기민한 호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바흐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걸었더니 피곤해요. 우리 차 마시고 가요."
엘리자베스가 저 멀리 카페라 적힌 간판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지역 관리하의 관광지로 변모한 몽페로 하우스의 내부 1층에는 카페가 있었다. 카페에 잠시 들러 차를 마신 일행은 마을 관광을 마치고서 다시 윌버리 하우스로 돌아왔다. 겨울이면 해가 빨리 저물기에, 시간은 고작 3시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