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5화 (9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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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가 말했던 4시가 되자, 소피와 라희는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침실이 위치한 2층에서 넓고 웅장한 아치형 계단을 내려와 불을 환히 밝힌 1층 로비에 서니 어느 쪽이 식당인지 어리둥절했다. 화려한 조명을 밝힌 로비는 굉장히 넓었고 로비로부터 뻗어나온 양 갈래의 복도로 나뉘어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소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글쎄요."

라희도 딱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없었기에, 둘은 가만 서서 양쪽 복도를 하나하나 살폈다. 하필 이 시간에는 그 많던 제복 입은 고용인들이 바쁜지 옷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로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오른쪽 복도 쪽에서 뭔가 생활 소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쪽으로 가볼까요?"

소피가 자신 없는 목소리의 소극적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라희는 외국인이라서 이 모든 광경이 낯설었지만, 소피는 백작가의 실지 모습에 기가 완전히 죽어버린 듯 했다. 하긴, 팔머 가는 서양 고전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화려하고 장엄한 저택에서 실제로 생활하고 있었으니까.

라희는 바흐의 평창동 본가를 떠올렸다. 여기 윌버리 하우스에 비한다면, 창고나 다름없는 작은 집이었지만 처음 평창동에 방문했을 때 얼마나 가슴 졸이며 떨렸던가. 소피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기에 라희는 오른쪽 복도로 먼저 발걸음을 뗐다.

복도 바닥은 대리석이었지만 가운데 통로를 따라 화려한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복도 곳곳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예술품으로 장식되어있고, 벽마다 고풍스러운 그림들이 걸려있는 모양새가 흡사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지 싶을 정도였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니, 육중하고 커다란 문이 조금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희가 문에 멈춰 서서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길고 좁은 테이블이 늘어서 있는 모양새가 식당인 듯 보였다.

"여긴가 봐요. 아직 아무도 없는데요."

라희가 말하자, 조심스레 뒤따르던 소피가 문 안쪽을 힐끗 엿봤다. 거대한 식당 내부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사방의 벽에는 멋들어진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각 기둥 모서리마다 도자기, 잘 닦인 투구 같은 예술품이 놓여있었다.

금칠 조각이 어지럽게 장식된 천장에 매달린 붉은 줄의 끝에는 거대한 3단 샹들리에가 걸려있었는데, 넓고 좁은 20인용 식탁의 바로 위에 세 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크기가 제법 커서 육중하면서도 세세한 크리스탈 장식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있는 샹들리에는 따로 불이 켜져 있지 않았어도 실내조명만으로도 번쩍거리며 빛났다.

언젠가 세계사 책에서 로코코 시대의 높은 가발에 샹들리에 불이 옮겨 붙는 일이 종종 있었다던데, 과연 식탁 위로 길게 드리워진 샹들리에를 보니 그럴 만도 해 보였다.

"식당이 아니라 다이닝 홀 같은데요. 저기 놓인 식탁은 딱 봐도 연회용 긴 테이블이라서, 집안 행사 때나 사용하는 곳일 거에요. 그리고 여긴 식사 준비가 되어있지 않잖아요. 테이블 보도 깔려 있지 않고."

소피가 중얼거렸다. 과연 소피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세팅되어있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미스 송, 미스 람퍼트."

그때 복도 안쪽에서 밝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 총관리인 햄버튼이 라희와 소피를 바라보며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쪽,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의 손짓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과연 식당이라고 부를만한 화려한 방이 보였다. 다이닝 홀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샹들리에 하나가 천정에서 내려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각 테이블 위로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위에는 황금빛 테이블보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고, 정 중앙의 센터피스는 싱싱한 아이보리와, 더스키(dusky: 탁한) 핑크 로즈 그리고 튤립으로 꽃장식 되어있었다. 그 밑으로는 황금빛 바구니 안 가득 영국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과일이 담겨 있었다. 식탁의 상석에는 제임스가, 양옆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는 바흐와 엘리자베스가 앉아있었다.

제임스와 바흐는 평소처럼 단정한 아르마니 캐주얼룩 옷차림이었고, 엘리자베스는 한쪽 어깨를 드러낸 가벼운 푸른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앉아있었다. 스무살 다운 완벽한 몸매로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밝은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의 그녀는, 아주 붉은 빛깔의 립스틱을 발랐는데 흰 피부 때문인지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급스러워 보였다.

식당의 한쪽 벽에는 하얀색 고풍스러운 벽난로가 씨뻘건 불씨를 품고 활활 타고 있어서 춥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먼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엘리자베스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그러자, 앉아있던 바흐와 제임스가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의자를 빼 주었고 라희와 소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이 내준 자리에 앉았다. 라희는 엘리자베스 옆에, 소피는 바흐 옆에 앉았다.

"부모님이 집에 계신다면, 옆의 다이닝 홀에서 식사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올 새해까지 두바이에 머무르시거든요. 그래서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아 식당(Dinner room)을 쓰기로 했어요."

엘리자베스가 입가에 건조한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9월에 두바이에 갔었다고 들었는데. 나도 마침 그때 두바이에 있었네. 도착했을 때 연락 하지 않고? 호텔보다는 우리 집이 편할 텐데."

제임스가 바흐를 향해 말하자, 바흐는 맞은편에 앉은 라희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사로이 방문한 거라."

그가 짧게 말하자, 제임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미묘한 웃음을 띠고서 바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흐응?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호기심이 동하는데요. 사적인 일로 두바이에 왔으면 당연히 우리에게 연락을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두바이의 낮은 너무 덥고 쥬메이라 하우스의 집은 너무 지루하다구요. 밤이 되면 그나마 낫지만, 얼마나 지겨웠는데요. 그때 오빠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야말로 사사로운 친구들이잖아요?"

"글쎄. 데이빗은 주위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니 너 때문이라도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제임스가 동생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10살 차이로 알고 있는데, 제임스와 엘리자베스는 사이가 꽤 좋은 것 같아 보였다. 라희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신 앞의 테이블을 살폈다.

황금빛 테이블 보 위에는 두꺼운 금테를 두른 하얀 접시가 놓여있었는데 테이블 위에서 내리쬐는 화려한 3단 샹들리에 불빛이 반사된 금테가 눈부시게 빛났다. 접시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는 질리도록 많은 식기가 보였다. 포크만 해도 총 4개 였는데, 모양이 미묘하게 각기 달랐다.

라희는 아래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식탁 아래 꺼낸 휴대폰으로 재빨리 포크 4개를 검색했다. 바깥쪽에서 부터 첫 번째 포크는 샐러드용, 두 번째 포크는 메인 요리에 사용하면 된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포크는 푸딩 포크, 네 번째 포크는 치즈 포크라 했다. 푸딩과 치즈 포크가 따로 있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해질 지경이었는데, 반대편에 나이프도 4개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접시의 바깥쪽부터, 빵칼, 첫 번째 코스 칼, 메인 칼, 그리고 치즈 나이프였다. 접시 위쪽으로 글라스도 4개가 놓여있었다. 둥근 화이트 와인잔, 조금 좁은 레드 와인잔, 그리고 물컵, 식전주용 작은 유리 컵.

비록 테이블 세팅을 대강 익히긴 했으나, 실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 식사가 시작되면 대충 주위를 보고 따라 하면 될 것 같았다. 라희는 아까보다는 약간 안도한 기분으로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접시의 정중앙에는 복잡한 문양이 박혀있었는데, 어딘지 익숙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윌버리 하우스의 창문마다 조각되어있던 팬던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접시도, 나이프도, 포크에도 모두 팬던 백작가의 문양이 꼼꼼히 새겨진 것으로 보아서, 주문 제작한 상품 같았다. 영국 귀족가는 유명한 명품 식기를 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였다.

"오늘은 특별히 데이빗과 라일라를 위해 김치와 불고기를 준비하라 일렀는데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엘리자베스의 말과 함께, 이내 라희 앞으로 불고기가 토핑된 샐러드와 김치가 놓였다. 이 사람들은 김치와 불고기가 밥과 함께 먹는 반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일단 채소절임으로 보이니 상큼한 샐러드와 함께 내놓은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라희는 어쩐지 안주인 포스를 풍기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작게 말하고서 주위를 살폈다. 다들 맨 바깥쪽에 놓여있던 샐러드용 포크를 들고 있었다. 라희도 같은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아삭아삭한 양상추와, 여린 잎들이 상큼하고 들쩍지근한 맛을 냈다. 이어지는 디너는 영국식으로 샐러드와 첫 번째 사이드 디쉬의 스타터, 메인코스, 다시 두번째 사이드 디쉬, 디저트 순서였다.

첫 번째 사이드 디쉬로는 푸아그라 파테와 스프가 나왔다. 베이지색 푸아그라 파테 위에는 검정색 캐비어가 토핑되어 있었는데 빵에 발라먹으니 부드러우면서도 짠맛이었다.

스프는 특이하게도 잘게 저민 밤과 사과를 넣은 달콤한 애플 스프였는데 약간 계피맛이 나서 맛이 독특했다. 새콤달콤하면서도 시나몬 향이 첨가되어 마치 갈아 놓은 걸쭉한 애플 파이같은 맛이 났다.

"저는 사과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렇게 달콤한 애플 스프로 먹으니 색다르기도 하고 맛있어서 기분이 좋네요. 데이빗은 어때요?"

바흐 옆에 앉은 소피가 그를 향해 말을 걸자, 바흐는 잠시 손을 멈추고서 대답했다.

"맛있습니다."

"데이빗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역시 한국인이니까 김치인가요?"

은근히 친근한 척 묻는 소피의 말에 라희는 눈을 조금 들어 맞은편 그의 샐러드 접시를 살폈다. 역시나 손도 대지 않았다. 소피는 뒤늦게 그것을 발견했는지 다시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물었다.

"불고기는 조금 드셨네요. 먹어보니 달콤한 소이 소스의 고기요리던데, 이쪽 입맛인가 봐요. 그러고 보니 아침에 사라의 집에서도 카라멜 시럽을 넣어 드시던데요."

소피는 바흐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은근 내비쳤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러자 상석에서 그 둘의 대화를 듣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커피에 시럽을 넣어 먹는다고? 내가 10년 넘게 알아 온 데이빗의 취향이 한순간에 바뀌기라도 한 건가?"

"다른 시럽도 아니고 굉장한 단맛의 카라멜 시럽이라니. 놀라운데요. 데이빗 오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에요? 사람이 어느 한순간 바뀌면 좋지 않은 징조라던데요."

엘리자베스가 놀리듯 말했다.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된 바흐는 역시, 맞은편에서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옅은 갈색 눈동자를 힐끗 보고서 입가를 옅게 올렸다.

"아까 말한 사사로운 이유 때문이야."

그의 낮은 목소리에, 라희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흐응.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기도 한데, 어쩐지 짐작이 가기도 하거든요."

엘리자베스는 바흐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바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내려 앞의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그녀 바로 옆에 앉은 라희의 왼손이 들어왔다. 그 위에 반짝이는 은색 링 위 물빛 아쿠아마린을 유심히 바라본 엘리자베스는 다시 시선을 올려 바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역시 사사로운 흥미가 생겨서 좀 더 지켜보고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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