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4화 (9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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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처진 눈, 뒤로 단정하게 빗어 정리한 깔끔한 머리스타일. 명문 백작가의 자제답게, 압도적일 정도로 고풍스럽고 넓은 응접실의 정중앙 붉은 소파에 앉아서 라희 일행을 맞는 제임스의 행동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커다란 검은색 로트와일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 일어나 일행을 맞이했다. 총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온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하고서, 다시 자리에 앉아 거짓말 조금 보태면 송아지 몸집만 한 사냥개의 거대한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의 나른하게 들린 눈은 맞은편 소파에 앉은 바흐와, 라희, 그리고 소피에게 잠시 간 머물렀는데. 원래도 차가운 눈초리였지만, 라희 옆에 동행한 소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 차가운듯했다.

"정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팔머 씨. 그리고 팔머 양."

소피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과장된 햄동과 말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제임스는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윌버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길 바라겠습니다. 유쾌하고 좋은 시간이 되시길."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멋진 저택을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진짜로 꿈만 같은걸요!"

그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라희는 그가 소피의 말을 듣는 순간 스치듯 지나간 그의 찌푸린 눈빛 속에서 뭔지 모를 불편한 감정의 편린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나영과 유진이 라희에게 내비쳤던 감정. 경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불편하거나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제임스 옆에 예쁜 그림처럼 앉아있던 엘리자베스가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전혀요! 불편하다니요. 롤스로이스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정말 제 평생 롤스로이스를 이렇게 오랜 시간 타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이동수단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로군요."

엘리자베스가 건조하게 말했다. 뼛속까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팔머 남매에 대한 라희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정도는 달랐지만, 제임스와 그의 옆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엘리자베스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구름 위에 떠서 군림하는 느낌.

라희는 제임스가 소피를 마주한 처음부터 왜 저렇게 경멸로 눈살을 찌푸릴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잠시 후 총 관리인이 내온 차를 마시며 바흐와 제임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나서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피와 완전히 다른 문장구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영어 문어체 문장을 고대로 읊는 듯한 문장을 구사했다.

그동안 영국에서 지내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사실 중 하나는, 정말 영국이라는 나라는 한 국가임에도 복잡미묘하다는 것이다. 특히, 계층. 뿌리 깊은 계층 문제는 영국인들 스스로의 혈통에 대해 자랑스럽게 만들기도 했으나, 모든 편견과 속박에서의 자유를 외치는 프랑스와 여타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방국가와는 대조적으로 삶에 있어서는 지나친 혈통과 계층의 강조가 지루하고 고루한 속박이자 억압수단 같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국인들은 은연중에 자신의 계층을 똑똑히 자각하고 또 드러내 보이길 원했는데 그중 가장 표면적인 것이 말씨였다. 한국에 표준어가 있듯이, 한국보다 2.4배 넓은 영국에도 다양한 사투리가 존재하고 표준어가 존재했다. 그중에서 RP(Received Pronunciation)라는 BBC 발음을 표준어로 치는데, 이는 런던에서 흔히 듣고 접하는 일상어와 비교해서 문법이나 단어, 그리고 억양이 미묘하게 달랐다.

라희는 외국인임으로 논외로 치더라도, 소피는 확실히 Cockney(코그니)라는 런던의 워킹 클래스(노동계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문법적으로 생략이 많았고 억양도 조금 달랐다.

거만한 포즈의 제임스와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바흐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는 소위 Posh(포시: 우아한 상류층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구어체의 편한 말이 아니라, 조금 꾸밈어가 많은 문어체의 말투랄까. 턱을 앞으로 쭉 빼고는 윗입술만 움직여 발음하는 이상한 모양새였는데, 티비에서 보던 영국 여왕의 말투와 비슷했다.

"자네, 이걸 보게나. 그동안 전시실에 걸어 두었던 작품을 응접실로 옮겨 놓았다네."

제임스가 손가락을 펼쳐서 벽에 걸린 무수한 고풍스러운 그림들 중, 유일하게 초상화나 정물화가 아닌 조금 현대적인 느낌의 추상화를 가리켰다. 바흐는 찻잔을 내려놓고 알았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군."

"그렇지. 처음 봤을 때는 부모님께서 왜 저 작품을 구매하라고 명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 1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세월과 함께 미의식도 바뀌었는지 마음에 쏙 드네. 고모님께 고맙다고 전해드리게. 아마, 브랜다의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저 작품을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거야."

"음. 그러도록 하지. 요즘 들어 부쩍 침울해 계셨는데 자신이 평가해 보유하고 있던 작품이 비로소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힘이 나실 걸세."

제임스와 바흐는 한동안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라희는 잠자코 고풍스럽고 멋들어지게 금칠 된 황금빛 홍찻잔을 기울였다. 소피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연신 귀를 쫑긋이며 그들의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이어지는 대화로 미루어 보아 대충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바흐의 고모님의 이름은 브랜다 한으로 부유한 유대인 남편의 후원을 받아 뉴욕에서 굉장히 유명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은 어떠신가, 얼마 전 신문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읽었는데."

제임스가 찻잔을 기울이며 안부를 물었다. 바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최악의 고비는 벗어났지. 하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으시네. 지금도 여전히 요양 중이시니까."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말로는 수십 년간 수집해온 어마어마한 소장품을 차근차근 처분하고 계신다 들었네만."

"맞네. 그러시는 중이지."

"그렇다면 내 눈여겨 봐둔 작품이 몇 점 있네만, 자네를 통해서 구입하면 되는가?"

"그것은 현재로써는 불가능하네. 지정 딜러를 통해서만 판매하기로 결정했거든."

"그럼..."

제임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바흐를 응시하다가, 눈매를 좁혔다. 바흐는 무언의 질문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로 연락하면 될 걸세."

그러자 제임스 옆에 앉아서 시종일관 바흐를 향해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누군 운이 좋은 거 같아요. 가만 누구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유한 수집가들이 탐내는 유수의 작품들을 만질 수 있다니 말이에요."

"너무 부러워하지 말아라. 엘리자베스. 모든 영화에는 끝이 있는 법이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이는데. 브랜다의 소장품을 모두 처분하고 나면, 더이상 갤러리 딜러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데이빗."

제임스의 질문에 바흐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입매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은 의외였다. 분명,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대화 중에 등장하는 딜러는 이유진임에 틀림없었는데 의외로 팔머 남매는 유진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았다.

바흐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해온 여자친구가 유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대학교 친구라는 팔머와 만나게 되면, 당연히 유진의 귀에 라희의 소식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어젯밤 유진에게 전화 걸어 이실직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진의 전화상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고. 팔머 남매의 유진에 대한 싸늘한 태도는 뜻밖이었다.

혹시 유진이 오피스텔에서 고백하듯 넌지시 언급했던 과거 때문일까? 라희는 대화를 나누며 잣잔을 기울이고 있는 바흐를 살폈다. 팔머 남매를 대하는 바흐의 태도로 판단해 볼 때 이들은 아주 절친한 사이 같아 보였다. 바흐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면 보이는 단답형의 형식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냈다.

-끄응. 끄응.

라희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귓가에 무시무시한 사냥개가 머리를 주인의 손아래로 들이밀면서 낮게 보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자, 제임스가 응접실 문 앞에 대기 중이던 햄버튼에게 눈짓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햄버튼은 제복을 입은 고용인에게 손짓했고 고용인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가 제법 큰 은쟁반에 핏물이 뚝뚝 흐르는 두꺼운 스테이크용 날고기를 들고 들어왔다. 어림잡아도 두 덩이가 1kg은 넘어 보였다.

"실례."

제임스는 쟁반 위에 놓여있던 집게로 고깃덩어리를 들어 올려 사냥개에게 건네기 전에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작은 병을 열어 생고기에 몇 방울 뿌리고 나서 건넸다. 은은하고 독특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향수라기보다는 아무래도 기름 같아 보였는데 그 무시무시해 보이는 로트와일러는 오일이 덧발라진 고기를 보며 짧게 다듬어진 꼬리의 흔적을 마구 흔들어 끙끙거렸다. 거대한 몸집의 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제임스의 손을 떠난 고기는 사냥개의 쩍 벌린 입안에 물려졌고, 사냥개는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고기를 받아 물어 우적우적 씹었다.

"저런, 불쌍해라. 배가 고팠나 봐요."

소피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어색하게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어느덧 대화에 열중하다보니 루퍼스의 간식시간이 되어버렸군요."

제임스가 개의 이름을 부르며 단단한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트와일러은 주인의 손길에 만족스러운지 짧은 꼬리를 흔들며 연신 주둥이를 우왁스럽게 움직여 고깃덩어리를 먹고 있었다. 소피는 테이블 위에 놓인 노란색 액체의 병을 유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향이 아주 독특하면서 근사하던데, 무엇인가요?"

"트뤼플(Truffle:송로버섯) 오일이에요. 오빠가 아끼는 루퍼스는 미식가거든요. 저 오일 한 방울이면 멀리서도 황홀해한답니다. 아주 물어뜯다 못해 찢어발겨 버리죠."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소피는 이내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나 데이빗은 눈에 익은 광경인 듯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표정이었만 라일라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불편한 얼굴로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라희는 붉고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사냥개의 날카로운 이빨에 짓눌려 핏물이 진득하게 배어 나와 이빨 사이에 흘러드는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어딘지 모르게 속이 거북했다. 넋이 나가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개에게 먹이를 넘겨주던 제임스가 눈을 들어 라희의 표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햄버튼을 향해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여기까지 오느라 지치셨을 텐데, 미처 손님 대접을 다 하지 못했군요. 피곤하실 테니 위에 준비된 손님 방으로 올라가 쉬시다가 4시에 식당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그러자 문 앞에 단정히 서 있던 햄버튼이 응접실 문을 열며 안내를 도왔다.

"가지고 오신 여행 가방은 미리 방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데이빗의 고모님이 뉴욕에서 갤러리를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나서, 조금 있다가 건너온 소피가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라희를 향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라희는 어깨를 조금 으쓱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데이빗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것투성이라서요."

"같은 한국인이라 그래도 조금 친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소피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라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네에."

"뭐, 괜찮아요. 배경지식이 있다면 친해지기 더 좋겠지만, 모른다 해도 이제부터 차차 알아가면 되겠죠. 고모 이름이 브랜다 한인 거 같은데. 구글로 검색해 봐야겠어요. 아까 팔머씨의 말 중에 신문이 언급되던데, 그럼 꽤 유명인사라는 소리니까요."

소피는 이내 라희 방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벌렁 엎드려 누워 손에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라희는 긴장했던 탓인지 머리가 무거워 소파로 고개를 기대고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조금 전 시커먼 사냥개가 피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짓씹는 것을 봤을 때도 속이 조금 뒤집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고, 지금 이렇게 방안에 들어와 편히 있어도 머리가 무거운 것이 아무래도 몸 상태가 그닥인 것 같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걸까? 유진과 통화 이후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깊은 한밤중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 바흐와 유진은 고모님과 얽힌 복잡한 과거가 있는 듯 보였는데.

"어, 찾았어요. 브랜다 한. 유대인 백만장자인 피터 에오르그의 부인이네요.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운영 중이던 에오르그 갤러리를 정리 중이로군요. 소장중인 2000여점의 60-90년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더비(Sotheby's:미술 경매)가 아닌 개인 컨택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즈에 기사가 났네요."

소피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기사를 읽었다.

"에오르그 갤러리 지정 딜러는 이유진이라고 쓰여있네요. 와우, 아름답네요. 마치 셀렙(Celeb:연예인)같아요. 으응?"

소피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라희에게 눈길을 던졌다.

"이유진을 찾아보니 브랜다 한의 조카와 결혼할 뻔 했다가 최근 파혼했다고 쓰여있네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아무래도 데이빗 이야기 같은데, 맞나요? 지난번 라일라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과 일치하는데요."

파혼? 이질적인 단어가 공기 중을 가르고 울려 펴지자, 라희는 멍하니 올려다보던 천장에서 눈을 내려 놀란 눈으로 소피를 바라보았다. 순간, 갑작스레 차가운 얼음물을 정수리에 뒤집어 쓴 것 처럼 정신이 확들었다.

"흐응. 공식적으로 싱글이네요. 데이빗은."

소피는 눈매를 기울여 라희을 바라보면서 흡족한 듯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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