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3화 (93/214)

93

라희는 왼손 약지 위에 반짝이는 아쿠아마린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심플하고 미끈한 은빛 고리 정중앙에 둥글게 솟은 제법 예쁜 하늘색이다. 투명한 푸른 물빛 색의 반지를 바라다보는 라희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 저기, 이제 보여요! 여기서부터 윌버리 하우스의 장원이에요. 무려 만 사천 에이커나 된다구요."

뒷좌석 가운데 앉은 소피가 창밖을 보려 고개를 길게 빼며 소리쳤다. 빽빽한 사철나무 숲을 가로지르는 제법 넓은 강 위에 질서정연한 대칭 미가 특징인 팔라디오 풍의 다리가 높은 지붕을 뽐내며 길게 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 드넓은 잔디 초원 뒤편으로 4층짜리 오래된 석조건물이 고고한 모습을 드러냈다.

"라일라. 저기 좀 봐요. 윌버리 하우스에요! 정말 오길 잘했죠? 네?"

"........"

라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소피의 어깨너머로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재빨리 자동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왼손가락을 향한 바흐의 시선에 손이 녹아버릴 정도로 따갑다. 라희는 짐짓 태연한 척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이제 좁고 고풍스러운 도보용 다리가 아닌 그 바로 옆에 현대적으로 건설된 견고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을 건너자 영국 시대물 드라마에서나 보았을 법한 크고 웅장한 저택의 정면이 한눈에 보였다.

"와.. 정말 티비에서 보던 것과 같네요. 오래된 저택인데도 관리가 잘 되어있어요. 윌버리 하우스가 자그마치 400년이나 된 거 아세요? 저렇게 멋진 외관이라니. 안쪽은 고풍스러운 예술품으로 빼곡히 들이 차 거의 사설 박물관이나 다름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등장했던 거겠죠."

소피가 옆에서 신나하며 재잘거렸다. 혼잣말처럼 상대방의 반응이나 답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말이었다. 라희는 소피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눈을 내려 자동차 문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있는 제 손 위에 얹어진 반지를 힐끔거렸다. 약혼반지가 없느냐는 찰스의 말에 보석점에 들러 사두기는 했지만, 결코 낄 생각은 없었다. 이곳, 윌버리 하우스에서 보낸 롤스로이스 차에 올라타려고 방에서 나와 소피를 마주쳐서 그녀의 핀잔 어린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일라. 전부터 줄곧 말해주고 싶었지만, 약혼자가 있음에도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다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특히 그쪽 사람들은 우리네 생각보다 고지식하다고요. 아마 남자들에게 접근할만한 여지를 흘리고 다니는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럼 속으로 차갑게 경멸하겠지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첫인상이 그렇게 박히는 건 아니라고 봐요."

왼쪽 빈 손가락을 넌지시 내려다보며 지적하듯 말하는 소피 때문에, 라희는 계단 앞 복도에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어학원 오갈 때 쓰는 가방에서 반지를 꺼내 부랴부랴 손가락에 끼웠다.

아주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은, 바흐와 함께 뒷좌석에 올라탔을 때부터 생생히 자각할 수 있었다. 처음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가만 라희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노골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서 라희를 응시했다.

라희는 그의 눈길을 피해 바닥으로 내린 시선을 곁눈질해 그의 손가락을 살폈다.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는 매끈하고 긴 손가락. 만약 결혼을 했다면, 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텐데. 반지가 없다는 것은, 설마 유진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까?

라희는 어젯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한국에 전화 걸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국과 영국은 시차가 9시간이기에 일부러 한밤중인 12시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 영국의 자정은 한국의 아침 9시니까.

마음속으로 작정한 시간이 되자,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휴대폰을 손에 들고 길고 긴 국제전화 번호를 눌렀다. 그동안 엄마에게 안부 인사 차 몇 번 전화를 걸어봤었기 때문에 국제 전화를 거는 일은 제법 익숙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견딜 수 없는 긴장으로 손가락이 잘게 떨려와서 생각만큼 쉽게 버튼이 눌려지지 않았다. 마치 창가를 두드리는 세찬 빗방울 같은 떨림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망설이는 손끝이 만들어낸 몇 번의 실수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번호를 눌렀다.

또르르. 또르르. 느린 신호음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마치 아득한 우주 밖으로 보내는 아련한 신호처럼 가닿을 데 없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던 전화 신호음은, 딸각 하는 차가운 소리와 함께 현실로 바뀌었다.

"여보세요."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약간의 호기심이 담겨있었다.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리자 숨이 참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쥔 라희는 입술을 잔뜩 깨물고 있다가 겨우 용기 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유진 씨 휴대폰이죠."

꽉 악물렸던 아랫입술을 누르던 이가 사라지고 멈췄던 피가 통하자 싸한 통증이 몰려올 정도였다.

"............."

유진은 말이 없었다. 라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저에요. 송라희."

"알고 있어요. 송라희씨."

이름을 밝히자마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저쪽에서 싸늘하게 반응했다. 어딘지 냉소적으로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이젠 적의까지 느껴질 정도로 날 선 목소리였다.

"음, 저기."

"네. 말씀하세요."

유진은 쌀쌀하게 몰아붙이듯 쏘아댔다.

"음."

라희는 머릿속으로 말을 골랐다. 이미 수십 번 떠올린 말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어색하고 어딘지 모르게 우스웠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지금, 제가 있는 곳에 한진욱 씨가 왔어요."

나중에 위약금 어쩌고 하는 오해를 피하고자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사실만을 전달하는 어조로 말했다.

"..............."

차가운 침묵이 심장을 찔러왔다. 라희는 변명하듯 작게 덧붙였다.

"제의도와 상관 없이요."

목구멍 속 억세고 뾰족한 생선 가시가 걸린 것 마냥 불편했던 사실을 막상 뱉어내자 가슴이 쿵쾅거리며 거세게 뛰었다.

".........."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역시나 한겨울 고드름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침묵이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전화가 끊겼나 확인해 볼 정도로 지독히도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화가 난 걸까? 그럴 만도 하겠지.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화가 나지 않는 편이 이상한 거니까. 결혼 상대자가 지금 출국해서 일주일째 영국에서 머무르고 있는 셈이니까. 거기다 시기도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걸친 연말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혹은, 연인과. 기분이 좋을 리가.

"........이유진씨?"

라희가 전화 상태가 한국과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듯 묻자, 저쪽에서는 피식, 짧은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별안간 뚝. 전화가 끊겼다. 라희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이고 있자, 이내 전화기는 뚜뚜뚜, 공허한 신호음만 들려줄 뿐이었다.

어떻게 끊겼던간에, 다시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라희는 왼 손안에 든 전화기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의 떨림을 오른손 바닥으로 지그시 힘주어 눌러 달랬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는군요. 본가에 팬던 백작가가 실제 거주하고 있기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만큼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도 까다로운 허락을 받아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기대되네요."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석조 벽들이 길게 늘어선 가운데, 두껍고 견고한 쇠창살이 날카롭게 솟아있는 정문에 다다르자, 육중한 철문이 센서를 인식한 듯 스르륵 열렸다.

라희가 타고 있는 차는 정문을 지나쳐 집안 내부로 진입했다. 정원사가 정성스레 다듬어 멋지게 꾸며놓은 미로 정원과 관목들이 눈에 보였다.

드넓은 사철 잔디밭 사이 잘 닦인 포장된 도로 위를 지나자 저만치 고풍스러운 둥근 분수대가 보이고 바로, 거대한 저택의 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고딕양식의 멋들어진 창틀 아래 팬던 백작가의 문장이 곳곳에 조각되어있었다.

소유주가 정성을 다해 관리한 듯 세월을 비켜간 고성답게, 두껍고 높은 기둥이 고고하게 늘어서 있는 현관은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치 특급 호텔의 고급스러운 입구 같은 분위기였다.

차가 스스륵 멈춰 섰다. 육중한 현관문이 열리더니 깔끔하고 단정하게, 하지만 어딘지 멋쟁이 영국 노신사처럼 차려입은 중년인과 그를 수행하는 듯한 제복을 입은 젊은 청 년 두명이 나타났다. 청년들이 차 문을 열자, 중년인이 정중하게 손을 앞으로 모으고서 입을 열었다.

"윌버리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총 관리인 햄버튼이라고 합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일행은 청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유서 깊은 귀족가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중하고 절도 있어 보였다. 현관 앞에 서자, 총 관리인이 예의 바른 태도로 상냥한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팔머 씨와 팔머 양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