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2화 (9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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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라희는 침대에 누워있던 제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젯밤, 방에 들어와서 잔 건가? 분명 거실에서 티비 보다가 잠이 든 기억이 마지막이었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잠결에 거실에서 방으로 올라왔을 수도.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대충 얼굴을 닦고, 양치질까지 마친 라희는 옷장에서 꺼낸 후드 점퍼를 대충 걸쳐 입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좋은 아침. 라일라."

식탁에 앉은 라희에게 사라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내 라희 앞으로 평범한 영국식 아침 식사가 놓였다.

"좋은 아침. 잘 먹을게요. 사라."

토스트, 소세지, 스크램블드 에그, 그리고 과일과 우유 한 컵. 라희는 포크를 들어 바삭하게 구워진 소세지를 쿡 찔러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토스트를 베어먹었다. 영국의 소세지는 대부분 짰다. 우리나라 스팸을 밥과 함께 먹듯이, 빵과 함께 먹어야 대충 간이 맞았다.

짭짤한 소세지와 함께 겉은 바삭하고 안은 포실포실한 두툼한 토스트를 입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다가 목이 메어 우유를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바흐가 식탁으로 다가오며 주방 입구에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라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늘 그랬듯, 라희 바로 옆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여느때 처럼 갓 샤워를 마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라희는 숨을 짧게 참고 있다가 우유를 벌컥 마셨다.

"커피?"

아침 식사가 담긴 접시를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사라가 묻자, 바흐가 대답했다.

"예. 그리고 카라멜 시럽도요."

"흐음, 아, 어젯밤 오픈해서 여기다 두었군요. 자."

사라는 바흐 앞 테이블에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커피 머그와 작은 유리병을 함께 놓았다. 안에 든 미색의 액체와 병의 겉면 노란색 라벨에 카라멜이라고 적힌 어딘지 낯익은 모양새의 유리병이었다. 위타드.

자신이 선물한 시럽임을 알아본 라희가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사이 그는 자그마한 병을 들어 뚜껑을 열고 커피 안으로 조르르 액체를 따랐다. 순간적으로 그의 손을 따라 올라간 눈과 마주치자, 그가 입매를 옅게 올리며 말했다.

"달달한 선물. 고마워.(Thank you for giving me all the sweetness you give *)."

라희는 뜨고 있던 눈을 놀라 깜빡였다. 그러다, 그가 눈을 맞춰 오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시럽. 정말로 먹는 건가. 그는 이제까지 커피에 우유조차 넣어 마시지 않았는데.

라희는 앞에 놓인 접시에 눈을 고정하고서 포크를 움직였다. 앞으로 곧게 고정된 시야의 가장자리에 그가 커피 머그를 기울여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휴강이지? 일주일?"

사라가 물었다. 라희가 다니고 있는 K 어학원은 영국 내 여타 오피스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당일부터 새해 첫날까지 쉬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해까지 에요."

"한동안 바쁘더니 오늘은 집에서 편히 쉬겠구나. 그럼 이따가 당근 케이크와 뮬드 와인(mulled wine: 향신료와 갖은 재료를 넣고 따끈하게 끓인 음료)을 만들까?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고 추워서 갓 만든 따끈한 뮬드 와인에 케이크 곁들여 먹으면 될 거야."

"맛있겠네요."

라희가 대답하자, 사라는 식탁에 앉아서 보던 신문을 집어 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라희를 향해 말했다.

"아, 참, 오늘 오후에 소피가 온단다. 원래는 새해 지나고부터 이곳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지금 머물고 있는 기숙사가 연말이라 아무도 없다지 뭐니. 구내식당도 문을 닫아서 할 수 없이 찰스가 데려와 주기로 했단다. 거기 있다가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피. 라희는 어제 당당히 바흐에게 관심있노라 선언하던 소피를 떠올렸다. 몽롱한 취기에도 헤이즐 빛 눈이 반짝거렸었지. 영국여자라서 솔직한 걸까? 런더너(Londoner:런던 사람)라서?

영국에 온 지 고작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소피처럼 그렇게 대놓고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남자와 잘되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행동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거 같았다. 그만큼 그가 매력 있어서?

라희의 눈길이 자연스레 돌아가 옆에 앉아있는 바흐에게 머물렀다. 확실히 잘 생기고, 키 크고, 몸도 적당하니까. 탄력 있고 탄탄한 가슴과 복근 그리고 단단한 팔과 길게 뻗은 다리.

몸?

라희는 그의 벗은 모습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바흐는 커피잔을 기울이다가 자신에게 던져지는 곁눈질을 알아채고서 약간 의아함이 담긴 눈빛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새빨개진 얼굴을 황급히 아래로 떨구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먹었어요. 사라."

"왜 다 먹지 않고?"

사라가 반쯤 남긴 접시를 턱짓하며 물었다.

"어제 마신 와인 때문인지 입맛이 없어요."

라희는 재빨리 대답하고서 빠른 발걸음으로 주방을 벗어났다.

***

"어서 오렴. 소피, 안나, 롭, 찰스."

사라가 현관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당초 찰스와 소피만 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열린 현관문에서 들어서는 찬 바람과 함께 사라의 집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총 네 명이었다.

거실에서 사라가 만든 당근 케이크와 뮬드 와인을 기울이던 라희와 바흐도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소피는 라희 뒤에 서 있던 바흐를 발견하자,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었다. 찰스는 그런 소피를 힐끔 보고는 라희를 향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집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해서요. 마침 찰스가 오늘 오후 이모 집에 간다길래 따라나섰죠."

찰스의 형인 롭이 옆에 서 있는 안나의 둥글고 좁은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사라는 방긋 미소 지었다.

"그렇지. 임신해서 몸도 처녀 때와 다르게 무거운 데다가 날씨까지 흐리니까 기분전환 하러 밖에 나가고 싶어도 요맘때는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으니.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지루하기도 할 거야. 집안에만 있는 것은 좋지 않단다.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당근 케이크와 뮬드 와인을 만들어 놓았는데."

안나가 둥근 배를 손바닥으로 감싸안 듯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케이크만 먹을게요. 사라. 아무리 뮬드 와인의 알코올이 약하다 해도 일단 술이라서 찝찝하거든요. 태아 알코올 증후군이니 뭐니 끔찍한 소리를 많이 들어서요."

"그래. 뭐든 안전한 게 최고지. 자, 어서 앉으렴."

사라는 일행을 소파로 안내했다. 모두가 넓은 소파에 둘러앉은 가운데, 주방으로 사라졌던 사라가 쟁반 가득 머그잔에 담긴 따끈한 뮬드 와인과, 당근 케이크 한판을 들고 나타났다.

"와우, 맛있는데요? 오늘 같은 날씨에 딱이에요. 정말 맛있어요. 뭘 넣으신 거에요?"

소피가 손에 들린 머그잔을 놀란 눈으로 보면서 사라를 향해 묻자, 사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입에 맞니? 그동안 만들던 레시피 대신 이번에는 티비에서 본 제이미 올리버 스타일로 만들어 봤단다. 클레멘타인(clementine:귤)과 레몬, 라임, 그리고 설탕, 시나몬 스틱, 월계수 몇 장, 넛맥(nutmeg), 스타 아니스(anise:미나리과 향신료), 그리고 바닐라 엑기스를 넣었지."

"아, 확실히 제이미 올리버 맛이네요. 맛이 달콤하고 굉장히 스파이시해요."

소피는 자신 앞의 접시 위에 놓인 당근 케이크를 한 입 먹고 나서 기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 오기 전부터 찰스가 사라의 집에서 하숙하면 살이 뒤룩뒤룩 찔 거라고 놀려댔는데, 정말 걱정되기 시작하는걸요. 어제도 그랬지만,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요. 심지어 이건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당근 케이크인데도 입에서 살살 녹는 거 같아요."

"오우, 소피. 넌 말라서 살 좀 쪄야겠는걸? 그나저나 이번 우리 집에 머무는 아가씨들은 죄다 말라서 먹이는 재미가 있겠구나."

"거기다 미인이기까지 해서 눈도 즐겁죠."

찰스가 빙긋 입매를 올리며 말하면서 바흐를 향해 눈짓했다.

"부러운 일이군요. 저도 여기서 살까 봐요. 방 하나 남은 거 없나요? 이모."

"얘는, 남은 방이라고는 이제 1층 서재 뿐이야. 피터가 간이침대를 놓아두어서 가끔씩 책보며 눈을 붙일 수 있긴 하다만, 그 안에서 생활은 불가능하단다."

"아쉽네요."

찰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머그를 기울였다. 그때 옆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롭이 바흐에게 물었다.

"어제 친구분들은 잘 만나신 겁니까? 어쩌다 창문 너머로 보았는데, 와우. 유명인이더군요."

"아. 예."

"엘리자베스 팔머죠? 팬던 백작가(Earl of Pendon)의 딸로 윌트셔(Wiltshire: 바스와 인접한 지역)에 패밀리 시트(family seat:본가)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이니 런던의 타운하우스에서 벗어나 본가에 왔었나 보군요. 어제 친구분과 함께 본가인 윌버리 하우스에 갔었나요?"

"오, 윌버리 하우스. 정말 멋진 곳이던데. 외부인에게 개방은 하지 않더군요. 영국의 고택을 소개하는 티비에서 봤어요."

안나가 부러움과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남편의 말에 덧붙이자, 바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요. 어제는 근처에서 안부 인사를 나눴습니다."

"오우. 그렇군요."

소피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던 바흐는 눈을 들어 라희에게 눈길을 한번 던지고 나서, 그대로 라희 옆에 앉아 줄곧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고 있는 소피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일쯤, 새해까지 본가에서 머무는 제임스가 윌버리 하우스로 초대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혼자 가기가 좀 그래서 망설이는 중이었습니다."

"와, 진짜예요? 외부에 개방하지도 않는 윌버리 하우스에 초대라니! 정말 멋진데요!"

소피가 즉각 소리쳤다. 그리고 조급하게 바흐를 향해 물었다.

"혹시, 팔머 양, 아니 팔머 씨가 동행(company)을 허락했나요?"

"예."

그가 짧게 대답하자, 소피가 뛸 뜻이 기뻐하면서 외쳤다.

"제가 함께 가도 돼요? 흔치 않은 기회인데!"

"소피."

옆에서 잠자코 있던 찰스가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듯이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피가 찰스에게 신경질적으로 눈을 흘기자, 찰스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데이빗과 단둘이 동행하면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거든요. 동성이라면 몰라도, 좀 그렇잖아요?"

"어-. 그건."

찰스의 지적에 소피가 눈을 굴리다가 옆에 가만 앉아 당근 케이크가 담긴 접시 위로 포크를 깨작이던 라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라일라."

갑작스러운 부름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라희가 놀라 눈을 들자, 소피가 입가를 가늘게 끌어올리며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해까지 어학원 쉬는 거죠? 이왕 여기 영국까지 왔으니, 바스에서만 머물지 말고 유서 깊은 윌버리 하우스에 가보는 게 어때요? 우리 같이 관광하는 셈 치고 가요."

"어....그게."

라희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주저했다. 무슨 하우스니, 백작이니, 패밀리 시트니 하는 단어가 귀를 스쳐 가긴 했어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았었다. 라희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소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 흔치 않은 기회인 건 맞는 거 같아요. 나도 임신만 아니라면 염치 불고하고 따라가고 싶네요."

그러자 소피가 흥분하며 외쳤다.

"일반에게는 물론이고 관광객에게도 개방하지 않는 백작가의 저택이라구요! 가 줄거죠? 네? 라일라가 못 가면 나도 못 간다구요. 아, 윌버리 하우스라니! 거기다 엘리자베스 팔머도 만날 수 있겠죠? 정말 꿈만 같아요!"

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라희를 주시하는 가운데 바흐의 곧은 시선이 라희에게로 향했다. 바로 옆에 앉은 소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이글거리는 눈빛을 반짝이며 라희의 입술만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들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거실에 가득 찬 무언의 압박감은 갑갑하게 라희를 눌러왔다.

라희는 입술을 안쪽을 잘근 깨물다가 눈을 들어 소피를 바라보았다. 소피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소피 옆에 앉아있던 안나도 빙긋 미소 지으며 라희를 향해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모두들 라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바흐와 동행이라니.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망설이는 라희를 향해 소피가 손을 뻗어 포크를 쥐고 있던 라희의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쥐고서 지그시 누르며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눈빛이 얼굴 위로 화끈거리도록 쏟아졌다. 숨 막히게 죄여오는 은밀한 강압 속에서 결국,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giving me all the sweetness you give 직역: 네가 나한테 주었던 모든 달콤함이 고마워: 어제 바흐가 키스했었죠?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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