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91화 (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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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이제 오는 거에요?"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코끝에 안경을 얹고서 독서를 하던 사라가 고개를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진욱은 가볍게 목례로 답하고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좀 더 있다가 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친구들은 잘 만났나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길에 잠시 들른 거라서, 간단히 안부 인사만 하다가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예정했던 대로 새해에 다시 만나야겠네요.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같은 분위기였는데 이렇듯 짧은 시간은 아쉬울 거 아니에요."

"네, 새해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진욱이 대답하자, 사라는 자신의 추측이 맞은 것을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늘 하루 돌아다녀서 굉장히 피곤할 텐데 올라가 편히 쉬어요. 아 참,"

사라의 목소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려던 진욱을 불러세웠다. 진욱이 눈을 들어 사라를 바라보자, 사라는 손가락을 세워 거실 한구석 창가 근처에 불을 환하게 밝힌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가리켰다. 진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사라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저기, 아래에 데이빗 꺼 선물 상자가 있는데 여태 그대로 인 걸 보니 아마도 모르는 거 같더군요."

"........?"

진욱은 발걸음을 옮겨 창가 옆 크리스마스 트리로 다가갔다. 1 미터 남짓 되는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장식용 선물 상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사라가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사라는 손끝으로 작고 네모난 푸른색 직사각형 상자를 가리켰다.

"그거에요."

"이거요?"

진욱이 선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다른 비어있는 장식용 상자와 다르게 조금 무게가 느껴졌다.

"아침에 라일라가 놓아뒀는데,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나 보더군요. 분명 놓아두면서 데이빗 꺼라고 그랬으니 맞을 거에요."

진욱은 겉에 아무것도 쓰여있지도 않고, 흔한 카드조차 꽂혀있지 않은 푸른색 상자를 들고 가만 서 있다가 포장을 뜯어 벗겨냈다. 포장지를 여니 보이는 것은 작은 시럽병이 5개 든 선물세트였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짧은 헛웃음을 지었다.

결코 쓸 일 없어 보이는 선물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었지만, 그 의도가 너무도 명백했기에 도리어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그가 가볍게 흘리는 헛웃음 소리에 사라가 안경 위로 호기심 어린 눈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무언가 재미난 거라도 들어있나요? 데이빗."

".......아닙니다."

진욱은 선물 상자를 손에 챙겨 들고는 사라를 향해 물었다.

"라일라는 혹시....?"

"아."

사라는 눈을 굴려 소파 쪽을 향해 눈짓했다.

"여기에요."

진욱이 소파 너머를 보니, 몸을 웅크린 라희가 소파에 구석에 파묻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아까, 케이트 집에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더라구요. 집에 와서 티비를 보다 자울자울 하는 거 같더니 저렇게 세상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네요. 이따가, 이 책 남은 것마저 다 읽고 나서 방에 들어갈 때쯤 깨우려고 하던 중이었어요."

사라가 읽고 있던 소설책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손에 잡힌 부분은 얇아서 남은 분량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진욱은 소파 뒤에 서서 라희의 잠든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선물 상자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구부려 라희의 목에 팔을 집어넣어 단숨에 그녀를 들어 올렸다.

생각 보다, 그리고 기억 보다 가벼웠다. 진욱은 이내, 라희가 앓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타국 땅에서 홀로 아파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했었지.

진욱은 가만 라희를 지켜보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긴 라희는 진짜로 곯아떨어진 모양으로 미동조차 없었다. 진욱은 라희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서 지켜보고 있던 사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방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진욱의 말에 사라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안 그래도 읽던 책이 끝나가는 중이라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외풍이 심하니 거실에서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깨우기에는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괜히 중간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에요. 그럼 부탁할게요."

세상 모르게 잠든 라희를 품에 안고서 계단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경계 선 투명한 갈색 눈빛의 심경을 투영하듯 굳게 잠겨있어서 근처에 얼씬도 못 했던 라희의 방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의 시트를 걷고 매트리스 위에 라희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침대 위에 올려두자, 라희는 조금 뒤척이다 한기를 느끼는지 다시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차가운 침대 위라서 본능적으로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던 진욱은 저만치 아래에 걷어 두었던 시트를 손으로 잡아 라희의 웅크린 몸 위로 가볍게 덮었다. 그리고서 몸을 돌려서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아무래도 방안이 기온이 꽤 쌀쌀한 거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몸을 수그려 라희의 바로 옆에 길게 누웠다. 1인용 매트리스에 무게가 더해지자, 조금 가라앉아 경사가 생겼고, 라희는 무의식중에 몸의 균형을 맞추려는 듯, 몸을 조금 뒤척이며 진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얇게 덮인 눈두덩이 아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진욱은 자신의 품에 파고든 라희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가지런한 속눈썹, 하얀 얼굴 오똑하고 작은 코 그리고 끝이 살짝 벌어진 분홍빛 입술. 입가에는 아까 사라가 말한 와인의 흔적이 조금 얼룩져 번져 있었다.

어쩐지 보고 있으려니 눈에 거슬려서, 진욱은 고개를 숙여 붉은 물이 번져 말라있는 입가에 혀끝을 가져다 댔다. 살짝 내민 혀끝으로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의 윤곽선이 느껴졌다.

"으응..."

자신의 입가에 무언가 닿은 것을 느꼈는지, 라희가 가냘픈 몸을 뒤척이며 작게 소리 냈다. 순간, 소리를 내느라 조금 벌어진 앙증맞은 입술을 내려다보던 진욱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분홍빛 입술이 입술과 맞닿았다.

따스했다. 진욱은 입을 조금 벌렸다. 벌린 속살 안으로 가득, 온기가 느껴졌다. 코끝을 얕은 호흡이 스치고 흘러갔다.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입안 가득 머금자, 답답한 듯, 라희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새로 조금씩 흘러나왔다.

"으, 으응.."

조금 뒤척이던 라희의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며 미간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주시하던 진욱은 혀끝을 세워 작게 벌어진 여린 분홍빛 속살 틈을 파고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새어나오는 입술 안은 견딜 수 없이 촉촉했다.

느리게, 음미하듯 입술을 빨아들이던 그는, 라희가 다시 한 번 뒤척이자 마지막으로 혀끝을 맞대어 아쉬움을 달랬다. 조금 달고 약한 알코올 맛이 났다.

진욱은 눈을 들어 방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지만,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 아래층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라가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할 것이었다. 그리고 소파에 내려 두었던 라희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가져와야 할 시간이었다. 진욱은 선물을 떠올리고는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라희로부터 먼저 선물을 받다니 의외였다. 정작, 그가 영국에 오기 전 준비했던 선물은 아직 전해줄 수 없었지만.

쪽, 입술 위에 짧게 키스한 진욱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남긴 온기 위에 곤히 웅크려 잠든 라희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 작품 후기 ============================

진욱시점?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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