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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거푸 와인을 마셨더니 머리가 띵했다. 라희는 책꽂이 옆 등받이가 높은 하이 암체어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응접실 구석 창가에 앉아 취기를 다스렸다. 창밖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을 보고 있던 라희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가 영국 내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긴 들었지만, 정말로 절친한 친구인 줄은 몰랐었다. 라희 역시 바흐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솔직한 심정은, 의외였다.
영국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 당일 날 오후에 찾아 오는 친구라면 보통 사이는 아닐 테니까. 거기다 소피가 말한 엘리자베스 팔머라는 여자. 대체 무슨 사이일까? 소피가 추측한 대로 그저 친구의 동생인가. 라희의 시선은 눈 내리는 텅 빈 거리에 머물렀다.
바흐가 사라지고 크리스마스 디너가 어느 정도 끝나자, 케이트네 집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들 거실로 이동해 티비 앞 소파에 둘러앉았다.
라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뭐 하는지 물어보자, 소피가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크리스마스. 3시잖아요."
라희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있으려니 옆에서 찰스가 쿡, 웃으면서 설명했다.
"크리스마스 오후 3시면, 여왕이 연설을 하거든요. 딱딱한 연설이 아니라, 명절을 맞은 영국인들을 위한 덕담 정도 되겠네요. 그래서 모두들 BBC를 시청하죠."
과연 텔레비전 화면 가득 성장을 차려입은 귀족들과 왕실이 비추더니, 이내 넓은 응접실에 서 있는 백발의 영국 여왕이 화면에 나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실 안 사람들이 모두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을때, 라희 옆에 안락의자에 앉은 소피가 가득 차 있는 와인잔을 들고와 라희 손에 건네주면서 말을 걸었다.
"데이빗은 찰스와 동갑이라 들었는데요."
데이빗. 바흐 이야기다. 라희는 한숨을 푹 쉬며 손에 들린 와인잔을 기울였다. 미지근한 레드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미 한껏 마셨던 터라 이제는 머릿속이 얼얼했다. 라희는 취기를 쫓기 위해 머리를 휘휘 내저어 흔들다가 절반 쯤 남은 와인잔을 옆에 놓인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네. 그렇죠."
"난 아까 말이에요. 데이빗과 찰스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책의 첫 문장이 떠오르던걸요?"
소피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녀의 미소 띤 헤이즐 색 눈은 매우 신비로워 보였기에 라희는 취기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소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문장인데요? 아마 말해 줘도 모를 확률이 높아요. 인문 쪽에 영 소질이 없거든요."
라희가 의기소침하게 말하자, 소피는 씨익 웃었다.
"그래요? 이곳 바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의 서두인데요."
이내 그녀는 마치 외우고 있는 듯이 말을 이었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라희가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소피는 작게 웃었다.
"제인 오스틴이요. 바스 시내에 제인 오스틴 기념관도 있잖아요? 오만과 편견의 기념비적인 첫 문장이죠."
"아."
이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뜻으로 라희가 말하자, 찰스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참, 듣기 좋은 말이군요.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는 남자라는 소리니까요. 한마디로 인기남이라는 거죠."
소피는 그를 향해 가늘게 눈을 흘기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죠. 찰스도 사라 이모님으로부터 집을 상속받게 될 거잖아요. 집과, 안정된 직장이 있으니 꽤 괜찮은 조건의 신랑감임은 틀림없죠. 하지만, 누차 말했다시피 그쪽은 내 타입이 아니라서요."
"호오. 언제 들어도 가슴 아픈 이야기군요. 오늘 벌써 두 번째에요. 소피."
찰스가 투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진실이니까."
소피가 딱 잘라 말했다. 찰스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제외라면, 한 사람이 남았군요. 소피."
찰스가 지적하듯 말하자, 소피가 입가를 가득 끌어올렸다.
"지금 하려던 말이 그거에요. 라일라."
안락의자 깊숙이 파묻혀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라희는 소피가 자신을 부르자 눈을 들어 주의를 집중했다.
"나, 데이빗에게 관심이 생겼거든요. 라일라는 약혼자가 있으니 열외된 거 맞죠?"
소피가 확인하듯 물었다. 라희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다가 문장이 머릿속에 완전히 이해되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날 좀 도와줘요. 나 한번 열심히 노력해 보고 싶거든요."
"와우. 덤비는 여자는 무서울 텐데요."
옆에서 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피는 찰스에게 눈을 흘기고서, 라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이제 한집에 사는 거잖아요. 나도 사라네 집에 하숙하기로 했으니까요. 사라에게서, 데이빗이 앞으로 두 달 정도 머무를 거라 들었어요. 남은 두 달 간만이라도 노력해 보고 싶어요. 그동안 날 좀 지원해 줄래요?"
라희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는 소피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얼얼한 것은 취기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소피의 폭탄 선언에 정말로 머릿속이 멍했다. 라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의자 옆 작은 원형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 제가, 알기로는 데이빗은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미간을 약간 찡그린 라희가 작게 중얼거리자 소피는 가볍게 손을 내 저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에 데이빗은 이쪽 관습에 익숙한 듯 보였어요. 아마도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한 거나, 영국의 어퍼 클래스(상류층)와 친하게 지냈으니 당연하겠지만요. 하지만 그의 손가락 어디에도 반지는 보이지 않던걸요? 그럼 누가 됐든지 간에 그 사람과 심각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인 거 같아서요. 한번 시도해 볼래요."
멍한 표정의 라희를 향해 소피가 입가를 가득 끌어올렸다.
"나, 이번에 스물다섯 생일을 맞으면서 결심한 것이 있거든요. 25년이면, 사반세기(25/100: quarter century)잖아요? 요즘에야 100세 시대지만, 예전 같았으면 앞으로 남은 생의 절반을 산 셈이죠. 그래서 생일날 저녁 우연히 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의 노래를 듣다가 좌우명으로 삼았어요."
소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Non,Je ne regrette rien. 이라는 노래였어요. 뜻은 다시는 후회하지 않아(No, I regret nothing)에요. 이왕 한번 사는 거, 후회 없이 살아 보려구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할거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질 거에요. 당장 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이라도 할거에요."
라희가 멍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자, 소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요. 라일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