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89화 (8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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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바스에서 눈은 드문 편은 아니었지만, 흔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날 눈은 모두가 좋아했다.

케이트의 집에 도착한 라희는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 시작하는 디너에 앞서 주스를 들고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디너는 디너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상은 점심 식사였다. 1시나 2시쯤 시작해 오후 5시나 6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외 시간은 뭘 하든 자유. 주로 집으로 돌아와 배부르게 먹은 음식을 소화하면서 휴식한다.

보통 크리스마스 당일 날은 상점은 물론이고 대중교통까지 쉬는 날이라서 도시는 지나는 사람 없이 조용하다. 바스시의 외곽에 자리한 사라네 집과 달리 비교적 도심에 위치한 케이트의 집에서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바스 시내의 길거리가 내다보였다. 함박눈은 희게 흩날리며 거리 곳곳에 소복소복 쌓여갔다.

"라일라라고 했죠?"

오렌지 주스를 기울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소피가 걸어오면 말을 건넸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사교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국에서 젊은 여자는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말랐거나 양극단에 치우친 사람이 많았는데 약간 마른 듯 평범한 체형에 165 정도의 키, 얇고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서, 깨끗하고 하얀 얼굴에 도톰한 분홍빛 입술은 언뜻 봐서도 꽤 예쁘다라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특히, 가지런한 갈색 눈썹 아래 헤이즐색의 눈은 연갈색에 녹색이 드문드문 비쳐 보여 참 신비롭고 예뻤다.

"소피. 우리 같은 주스 마시고 있네요?"

라희는 그녀 손에 들린 오렌지 주스 컵을 보며 눈짓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는 와인을 마시라고 했지만, 대낮 식전부터 술은 좀 그래서요."

"그렇죠. 그래도 밖에 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와인을 기울여도 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와인은 분위기를 타는 술이네요."

소피는 밝게 웃었다. 소피는 라희보다 두 살 많았다. 언뜻 보기에 비슷한 또래라는 생각에 몇 년 생인지 물어봤더니 같은 년도 출생이 아니었다. 소피는 그동안 공부에 흥미가 없어 직업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날 심경의 변화로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번에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학부 기간 내내 인턴십을 하던 바스 시청에서 내년부터 근무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창밖에 눈 내리는 거 보며, 무슨 생각 했어요?"

소피 옆으로 찰스가 옅은 미소 띠고 다가오며 물었다. 라희가 별 말없이 입가를 올리자, 눈매를 살짝 휜 찰스가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크리스마스에도 연락 한 통 없는 미스테리어스한 약혼자 생각했어요?"

"오? 라일라. 약혼했어요?"

소피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라희의 손을 훑었다. 라희는 왼손등을 주스컵 아래로 감추듯 내리고는 장난스러운 눈으로 응시하는 찰스를 향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네. 오늘따라 약혼자 생각이 간절하네요."

라희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내 후회했다. 찰스의 어깨너머로 쏟아지는 곧은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법 눈길이 사나웠기에, 라희는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버렸다.

"아, 약혼한 줄은 몰랐는데. 나이에 비해서 좀 이른 편이네요."

소피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하자, 찰스가 빙긋 웃었다.

"그다지 빠른 편이라고는 할 수 없죠. 내가 라일라 남자친구라도 가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 거 같거든요. 누가 꼬득여 데려갈까 봐."

"헤. 찰스. 임자 있는 여자에게 너무 찝쩍거리는 거 아니에요?"

소피가 핀잔을 주자, 찰스는 싱긋 웃었다.

"라일라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이모 집에 열심히 드나들었는데, 약혼자라는 복병이 있더라구요."

"헛물켰네요. 그래도 반지도 보이지 않고 그러니 오해할만하죠. 우리 쪽에서는 약혼자가 있으면 반지를 끼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약혼자는 다른 곳에 있나 봐요?"

라희가 대답하기에 앞서, 찰스가 대신 말했다.

"한국에 있다던 걸요."

"음, 그럼..."

찰스 옆에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소피가 찰스의 어깨너머를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호스트인 케이트와 사라 그리고 케이트의 남편 헨리, 큰아들 롭, 그의 부인 안나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서 있는 바흐에게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다.

"데이빗은 약혼자가 아닌 거네요. 같은 국적이라 함께 영국으로 온 줄로만 알았거든요."

소피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찰스가 고개를 돌려 바흐를 한번 보고는 소피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상하지. 내가 마음에 둔 여자들은 죄다 다른 남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더군요."

"매번 말하는 거지만은서도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에요. 찰스."

소피가 밝게 말하자, 찰스가 한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서 장난스럽게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정말 아프네요. 여기가."

땡. 하고 주방에서 오븐 타이머가 다 된 알림 소리가 들려오자 케이트는 사람들을 식탁으로 불러모았다.

손님맞이를 위해 기존의 식탁과 간이 테이블을 붙인 넓은 공간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붉은색 테이블보가 깔렸다. 그 위로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투명한 와인잔과, 금테를 두른 하얀 접시가 각각 놓였다.

식탁의 가운데에는 금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색이 스트라이프 된 테이블 러너가 깔려있었고 테이블 러너 위에는 크리스마스 용 장식 촛대가 은은하게 불을 밝힌 가운데 촛대 아래로는 붉은색 포인세티아와 안개꽃이 화려하고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자,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라가 맛있다고 했으니 먹을 만은 할 거에요. 오늘 오기로 했던 내친구 릴리안이 오지 않아 음식도 넉넉할거구요."

헨리와 롭, 그리고 안나가 부지런히 부엌에서 음식들을 테이블 위로 날랐다. 이내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식탁 위에는 오븐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하고 연한 갈색으로 구워진 통통하고 거대한 칠면조 통구이, 익힌 밤, 삶은 파스닙, 작은 꽃양배추 등의 구운 야채, 슬라이스된 훈제 연어, 유리보울에 잔뜩 담긴 크랜베리 소스와 각종 화이트소스와 크림, 구운 감자, 둥근 돔 형태의 검은색 크리스마스 푸딩, 먹기 좋게 썰린 빵과 크래커, 민스 파이가 차례로 놓였다.

식탁은 어느덧 여유 공간 없이 온갖 접시에 담긴 음식으로 빽빽이 들이찼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실내를 가득 에워쌌다. 영국의 최대 명절 다운 따스한 분위기였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사라가 경건한 목소리로 크리스마스 기도문을 짧게 읊조렸다. 기도가 끝나자, 케이트의 남편 헨리가 와인을 오픈해 각자의 잔에 와인을 차례로 따랐다. 모두에게 와인이 준비되자 케이트가 자리에서 일어서 외쳤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귀한 손님들을 보니 반갑군요. 천천히 즐기길 바라요."

이내 밝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호스트인 케이트가 커다란 톱칼을 큰아들인 롭에게 건네자, 롭이 멋쩍은 표정으로 칠면조 구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접시에 칠면조 고기와 화이트 소스, 크랜베리 소스가 놓이자 다들 와인 잔을 기울이며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디너를 즐길 수 있었다.

"언제가 예정일인 거니?"

사라가 자신의 옆에 앉아 와인잔 대신 주스잔을 기울이는 안나를 향해 물었다. 안나는 볼록 솟아오른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더니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4월이에요. 봄이라서 다행이죠."

"곧 있으면 손주를 보게 된다니, 정말 부럽구나. 케이트."

사라가 부러운 듯 왼편에 앉은 케이트를 향해 말을 건네자 케이트는 자애로운 미소로 사라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 종조카이기도 해. 나중에 안나와 롭이 힘들지 않게 데이트하는 동안 아이도 맡아줘."

"그건 걱정하지 말렴. 나는 어린 천사들을 아주 좋아하니까.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잖니."

사라와 케이트가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남자들은 서로 멀뚱히 앉아 식사하다가 어색한지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데이빗,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식 발음이군요. 영국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케이트의 남편인 통통하고 평범한 영국 중년 아저씨 헨리가 와인을 기울이며 바흐에게 물었다. 질문을 들은 바흐는 짧은 눈길을 식탁 끝쪽에 앉은 라희를 향해 던지고 거둬들이고서 대답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아, 들었어요. 이모님 말씀으로는 사우스 켄싱턴에 사는 친구라고 하던걸요."

찰스가 아는 체를 했다.

"미국 대학에서 만난 친구라던데, 참 드문 인연이군요. 미국에서 사우스 켄싱턴에 사는 영국인을 친구로 만나다니요."

약간 고지식한 시골 중년 분위기의 헨리가 말하자, 잠자코 있던 소피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런던에서 그 지역 사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 편이 더 어려울 거에요. 아시다시피, 그쪽 사람들은 길거리에 잘 돌아다니지 않잖아요. 주로 애나벨스(Annabel's), 홈 하우스(home house), 랜스다운(lansdowne) 등 프라이빗 멤버스 클럽에서 사교를 나누기에 만나기도 쉽지 않아요."

소피의 말처럼, 영국, 그중에서 특히 런던은 상류층, 중산층, 노동계층으로 나뉘는 계층사회였고 왕족과 귀족이 존재하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라희로서도 영국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상류층은 그들만의 이너서클이 확실하기 때문에 만남과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함께하는 사교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런던 내에서 부촌으로 분류되는 사우스 켄싱턴, 메이페어, 첼시에 사는 Uppper class(상류층: 엘리트 Elite, 귀족 Aristocrats 포함)를 길에서 흔히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몰고 다니는 사치스러운 최고급 외제차는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 대학에 다녔어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소피가 호기심 담긴 표정으로 바흐에게 물었다. 그는 조금 난처한 듯 가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무례라고 생각했는지 짧게 말했다.

"......예일대학교를 잠시 다녔습니다."

"와우, 거기 명문 아닌가요? 영국으로 치면 옥스브릿지(옥스퍼드+캠브리지)와 같은 데죠?"

"아이비리그지. 아니, 아이비리그 내에서도 탑인 하버드와 나란한 명문대지요?"

저만치 앉아있던 찰스의 형 롭이 끼어들었다. 바흐는 그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예일대라면, 확실히 사우스 캔싱턴에 사는 친구가 생긴다 해도 이상하지 않군요."

찰스가 부러운듯 말했다. 라희로서는 낯선 개념이었지만, 이곳 영국인들은 은연중에 자신의 계급이나 계층에 대한 확실한 인지가 있는 듯이 보였다. 식탁 위 대화가 오가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안나와 사라 케이트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성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이면, 혹은 딸이면 이라는 가정으로 인생설계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고, 남자들은 으레 그렇듯, 스포츠, 특히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피는 활발하게 남자들 대화에 끼어들었고, 라희는 스포츠와 친하지도 관심도 없었기에 대화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 호응하며 음식을 먹었다.

크리스마스 디너의 거의 마지막 코스인 크리스마스 푸딩과 민스 파이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배가 부른 나머지 포크 끝으로 잘게 부숴서 깨작이고 있을 때, 잠자코 앉아 약한 진동벨 소리를 내던 휴대폰을 가끔씩 들여다보던 바흐가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주의가 집중된 가운데 그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전화가 와서 급히 나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 오늘 같은 날은 택시 잡기도 힘들 텐데요."

케이트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넸다. 바흐는 현관 옷장에서 꺼내준 두꺼운 겨울 외투를 껴입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갑작스레 친구가 이 근처에 왔다는군요. 맛있는 크리스마스 디너 감사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러서 따로 베풀어 주신 호의에 대해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눈을 돌려 식탁에 앉아있는 라희에게 시선을 한번 던지고서 그대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바흐가 현관을 나선 뒤, 문을 닫은 케이트가 식탁으로 돌아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소피가 약간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는 창문 밖의 거리를 내다보면서 작게 소리 냈다.

"와우, 진짜네요."

"뭔데요?"

찰스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소피가 서 있던 창가로 다가갔다.

"저기, 길가에 서 있는 큰 차는 롤스로이스 팬텀이네요. 역시 사우스 캔싱턴에 사는 친구라서 그렇군요."

소피는 흥미로운 듯 중얼거리면서 유심히 창밖을 보다가 뭔가 놀란 듯 눈썹을 크게 올리고서 말했다.

"어? 가만. 나 저 여자 알아요."

"응?"

식탁에 앉아있던 롭과 안나도 궁금한지 창가로 이동해 창밖을 내다보았다.

"엘리자베스 팔머잖아요. 잇걸에서 봤어요."

"잇 걸? 그 케이블 리얼리티 티비쇼 말인가요? 상류층 딸들의 일상을 중계한다던."

"맞아요. 지난 9월, 런던 사교계 최대 하이라이트였던 하이클레어 성(Highclere Castle:영드 다운튼 애비의 배경)에서 열린 퀸 샬롯 데뷔탄트 볼(The Queen Charlottes Debutante Ball)에 나타나 화제가 됐었죠. 오늘도 황홀한 패션스타일이네요. 방금 차에서 나와 데이빗과 포옹하더니 함께 차 안으로 들어갔어요."

"데이빗 친구가 남자라고 들었는데."

사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소피가 식탁으로 돌아와 앉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마 엘리자베스 오빠인 제임스일 거에요. 찰스와 동갑이라 들었거든요."

소피는 턱을 살짝 비틀며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신기하네요. 티비에서나 보던 유명인사와 아는 사람이랑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니. 어쩐지, 데이빗을 처음 봤을 때부터 분위기가 남다르게 느껴지더니."

소피에게는 놀라운 일처럼 보였을지라도, 라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시아 엘리트 미인 출신 이유진이니까. 머릿속으로 유진을 떠올리자 마음에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아 먹먹해진 라희는 짧은 한숨 쉬고 나서 와인잔을 기울여 단숨에 마셨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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