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87화 (8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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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어스름이 깔린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어학원 수업을 마친 늦은 오후라서, 3시 반이면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이곳 특성상 이제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라희는 쇼핑거리가 밀집한 하이 스트릿(high street)을 향해 걸어갔다. 저 멀리 길에 보이는 바스 대성당은 어두운 하늘 아래, 고딕양식의 뾰족한 첨탑을 찌르듯 세우고 우뚝 서 있었다. 4시 반이면 문을 닫아버리는 대성당은 환히 켜진 오렌지빛 조명 속에 고풍스러운 고고함으로 유서 깊은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대성장 앞 광장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는 온갖 반짝거리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푸른 빛을 은은하게 밝혔다.

라희가 걷고 있는 하이 스트리트의 쇼핑 거리는 벌써 불을 환히 밝히고 지나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꽤 쌀쌀한 날씨임에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마다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내일이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 마스부터 새해까지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으므로, 막바지 선물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돌아다녔다.

라희 역시 선물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에 영국인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우리나라에서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판판하고 좁은 인도를 걸어가면서, 라희는 선물을 줄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친절한 홈스테이맘 사라와 그녀의 조카 찰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라희를 초대한 호스트 케이트까지. 케이트는 사라와 찰스의 대화에서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친숙한 이름이었으나,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중심가를 지나 좁은 1차선로인 스톨 스트리트(stall street)으로 쭈욱 내려가자 이내 목적지가 보였다. 라희는 진푸른색 위타드 (Whittard of chelsea) 샵 앞에서 멈췄다.

라희는 어학원에서부터 줄곧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사야할지 고민했었다. 모두의 취향도 제각각일 테고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기에 무난한 홍차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영국의 대표 홍차 브랜드인 위타드의 샵은 라희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위해 새 패키지를 선보이는 위타드는 영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유리문을 열고 샵 안으로 들어가니 예산 금액별로 선물 패키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15£, 30£, 50£(파운드)로, 총 세종류의 카테고리였다. 한국 돈으로는 3, 5, 9만원 가량의 구성이었다.

가장 저렴한 15£ 것으로만 3개를 사도 1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기 때문에, 어학 연수생이자 관광객 신분인 라희는 15£ 코너 앞에 섰다. 핫초코 3개가 든 패키지가 12£, 둥그렇고 납작한 사탕 틴 케이스 사이즈의 허브티 패키지가 15£, 그리고 평범한 틴 케이스에 든 세 가지 홍차 패키지가 10£였다.

라희는 가장 저렴한 홍차를 제외한 허브티와 핫초코 2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계산대로 향하려다 우뚝 멈춰 서서 조금 전 벗어난 15£ 진열대를 다시 살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제부터 같은 집에 머물기에 이번 크리스마스 때 어쩔 수 없이 선물을 건네야 하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흐.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사라의 집에 기거하기로 했는지.

어제 사라에게서 들은 바로는, 두 달 치 금액을 미리 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 두 달간 머무를 생각인 건가.

라희는 작게 한숨 쉬었다.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라희는 사라네 집에서 어학원 수업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 머무를 생각이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도망쳐 보았자,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그에게 발각될 것이다.

해외에 나와 있는 것은 일시적일 상황이었다. 내년 가을학기에 복학하기 위해서라도 종국에는 국내로 돌아가야 했다. 해외에 모처에 몸을 숨겼던 라희를 고작 두 달 만에 찾아낸 그였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국내에서는 하루 만에 찾아낼 것이다.

유진을 앞에 두고 위약금 2억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려치면, 그에게 일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서 그가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유진이 건넨 1억의 의미는 바흐와의 관계의 단절을 뜻한 것이니까.

라희는 눈을 들어 진열대 위에 예쁘게 디스플레이된 크리스마스 패키지를 둘러보았다.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선물을 주긴 주어야 했다.

라희의 시선이 커피시럽 선물세트에 머물렀다. 라희는 몸을 움직여 포장된 패키지를 집어 들었다. 가격은 가장 저렴한 10£로 다섯 가지 맛(시나몬, 바닐라, 헤이즐넛, 진저, 카라멜)의 커피시럽이 작은 병에 들어있는 패키지였다. 바흐가 항상 에스프레소나 블랙커피만을 마시기에 커피에 시럽을 넣어 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라희로서는 사심 가득한 심술이 잔뜩 담긴 선택이었다.

이제 거리를 지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쇼핑백 가득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들고서 길을 걸었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시간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어학원 수업이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 거실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쉬었을 테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라희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젯밤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겨우 잠이 든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던 라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라일라, 좋은 아침."

식탁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라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사라."

라희의 인사에 몸을 일으켜 조리대 앞으로 걸어간 사라는 이내 식탁에 앉은 라희 앞에 커다란 접시를 내려놓았다. 둥글고 하얀 접시 위에는 노란 계란 후라이와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 세줄 그리고 갓 오븐에서 꺼낸 노릇노릇한 토스트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옆에 주먹만 한 사과 한 개와 우유를 놓아두었다.

사라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은 베이컨과 달걀, 그리고 토스트, 과일 우유 혹은 오렌지 주스를 먹었다. 가끔씩 감자나 시리얼이 나오기도 했다. 음식을 준 사라는 라희의 맞은 편에 다시 앉아 콧등에 독서용 안경을 걸치고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주방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바흐다. 취기로 몽롱한 꿈이나 상상이길 바랐건만, 진짜로 어제부터 사라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라희의 시선이 접시에 내리박혔다. 고개를 숙인 라희의 귓가에 그가 걸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제발, 제발. 여기는 8인용 식탁이라구. 고개 숙인 채 속으로 되뇌이던 바램과 달리, 그는 접시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앉아있는 라희의 바로 옆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막 샤워를 마친 은은한 체취가 코끝에 와 닿았다. 포크를 쥐고 있는 오른쪽 팔꿈치 바로 옆으로 그의 존재가 또렷이 느껴졌다.

"데이빗. 좋은 아침이에요."

사라는 좀 전과 마찬가지로 보던 신문을 식탁에 올려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리대로 걸어가서 커다란 접시를 꺼내 아침 식사를 차곡차곡 위에 옮겨 담았다.

탁, 그의 앞에 아침 식사 접시가 놓였다. 고개 숙인 라희의 시선 가장자리에 그의 접시가 보였다. 접시를 내려놓은 사라는 라희를 힐끗 보면서 입을 열었다.

"라일라가 쓸쓸해 보이지 않아서 좋군요. 그동안 다른 하숙생이 없어서 아침을 늘 혼자 먹었거든요. 커피? 아니면 우유? 오렌지 주스도 있어요. 어떤 것을 선호하나요?"

"커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조르르, 사라가 그의 앞에 김이 희미하게 피어 오르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라고 예의 바르게 말한 그는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사라는 아까처럼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앉아 신문을 읽었다.

달그락, 달그락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만 조용히 오가는 테이블 위에서 라희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그의 끈질긴 시선 때문에 오른쪽 뺨이 따가웠다. 라희는 재빨리 포크를 움직여 대충 음식을 입에 욱여넣고 컵에 든 우유를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사과를 챙겨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요. 사라."

쫓기듯 주방을 벗어나는 라희의 뒤에서 사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 저녁은 스파게티란다."

아침 식사 시간에 그 넓은 8인용 식탁에서 굳이 라희 옆에 앉았던 그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거실 소파에 철푸덕 앉아있다가는 그가 바로 옆에 와서 앉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결국 그를 피하기 위해서 꼼짝 않고 방안에만 머물러야 하겠지.

"후......."

어두운 허공으로 한숨을 길게 내쉰 라희는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목에 젖은 모래 더미라도 매달린 듯 무겁게 느껴지는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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