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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가니, 넓은 10인용 소파에 그가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사라가 언급했던 것처럼 마트에서 사온 와인 안주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특이하게 생긴 황금색 와인병과 긴 샴페인 잔이 인원수에 맞게 세팅되어 있었다.
라희는 처음 보는 와인병에 시선을 던졌다. 전체가 반질반질 빛이 나는 황금색 와인병은, 샴페인인 듯 주둥이가 검은색으로 비죽 튀어나와 마감되어있었고, 정중앙에 트럼프 카드의 스페이드 에이스 모양이 금박에 새긴 듯이 도돌하게 돋아나와 있었다.
바흐는 사라와 함께 내려온 라희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중히 고개를 까닥였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나 하듯, 예의 바른 태도였다.
"앉으렴."
거실 끝에서 떨떠름하게 서 있는 라희를 향해 사라가 자리를 권했다. 라희는 발밑을 보고 서 있다가 바흐와 멀찌감치 떨어진 끝 소파 끝자리에 앉았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역시 처음이라 어색한가 보군요."
딱딱하게 굳어 우두커니 앉아있는 라희에게서 눈길을 거둔 사라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 황금빛 샴페인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병의 주둥이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포장을 벗겨내고서 가늘게 꼬아진 와이어를 비틀어 열었다.
뽁,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코르크가 빠지고 황금빛 병이 열렸다. 순식간에 달고 상큼한 향이 공기 중으로 가득 퍼졌다.
사라는 길고 가느다란 샴페인 잔에 진한 황금빛 샴페인을 따라서 나눠주었다. 라희는 바로 앞 테이블 끝에 놓인 샴페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뽀글, 뽀글, 영롱한 금빛 수면 아래 미세한 기포 들이 위로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아까 장을 보러 가서 데이빗이 가져온 샴페인에 대해 알아보니, 아주 좋은 술이더군요. 새삼 놀랐어요. 남편이 교수생활 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로부터 제법 많은 술을 받아보았지만, 이 종류의 샴페인은 처음 받아보거든요. 화려하고 멋진 외관이 탐이 나서 따로 보관할까 하다가, 그래도 인사 선물로 가져온 것이니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첫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마시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더군요."
사라의 말에 라희는 눈을 들어 테이블 위 놓여있는 샴페인병을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특이한 모양새긴 했다. 황금빛 금칠한 병의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운데 A가 크게 그려진 스페이드 모양의 심볼 아래쪽으로 아르망 드 브리냑 (ARMAND DE BRIGNAC)이라고 적혀있는 글씨가 보였다. 어디선가에서 샴페인 이름이라고는 기껏해야 돔 페리뇽이나, 모엣 상동에 대해 들었을 뿐인 라희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명칭의 샴페인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쁘군요."
그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사라는 밝게 웃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바흐도 이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사라는 시선을 내리고 가만있는 라희를 향해 눈짓했다. 라희는 마뜩잖은 기색을 풍기며 앞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을 손에 들었다.
"그럼, 첫 만남을 위해 건배할까요?"
챙, 위로 들려진 샴페인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라희는 떨떠름한 자세로 샴페인을 들고 있다가, 방긋 웃는 사라와 눈이 마주치자 분위기를 맞춰 주기 위해 잔을 기울여 입술에 가까이 댔다.
작게 벌어진 입안으로 흘러들어온 황금색 샴페인이 가득 머금어지자, 상큼하고 풋풋한 꽃향기가 풍부하게 느껴졌다. 혀끝에는 달콤하면서도 약간 쌉싸름한 맛이 쨍하고 선명하게 감돌았다. 이내, 혀를 매혹시키던 상큼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맛의 액체는 크리미한 거품 같은 느낌으로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와우, 놀랍네요. 맛이 굉장 하군요."
역시, 맛을 본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며 샴페인 잔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정말, 멋진 맛이에요. 이런 맛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데이빗 덕분에 좋은 술을 맛보게 되었네요."
사라는 샴페인이 입맛에 맞는지 매우 흡족한 얼굴로 연신 잔을 홀짝였다. 바흐는 그런 사라를 향해 예의 바른 얼굴을 지어 보였다.
사라를 향하다가 비켜 내린 바흐의 짙은 눈빛이 라희의 얼굴 가득 쏟아지자, 라희는 눈을 낮춰 테이블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집요한 곧은 시선에 갇힌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라희는 테이블 위에 손을 뻗어 샴페인 잔을 들고 입가로 잔을 기울였다. 따갑도록 피부 위로 파고드는 낮고 치밀한 시선은 숨이 막혔다. 신경이 곤두서 바싹바싹 타는 목구멍을 청량한 샴페인으로 적시자 그나마 조금 나았다. 조금 숨을 돌린 라희는, 샴페인 잔을 다시 기울여 입가로 가져갔다.
"데이빗, 영국은 처음인가요?"
사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요. 대학교 때 몇 번 와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대화 대부분은 사라 주도의 질문이었다. 라희는 잠자코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아, 그럼 혹시, 대학을 이쪽에서 다녔나요?"
바흐는 고개를 살짝 낮춰 부정의 뜻을 표했다.
"미국에서 다녔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다니고 있습니다."
"흐음,.. 그럼 아직 학생인가요?"
"예. 졸업반입니다."
학생이라는 말을 들은 사라는 입가를 밝게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남편이 교수였었기 때문인지 학생들을 보면 왠지 반가워요. 그런데, 대학 생활 중에 영국에 와보았다니, 혹시 여자친구 때문이였나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의도로 그를 놀리는 듯한 짓궂은 질문이었다. 그는 단정한 입매를 옅게 올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친한 친구 한 명이 사우스 켄싱턴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중하고 친절한 말투였지만, 더 묻지 말라는 듯한 단단한 경계가 서 있었다. 사우스 켄싱턴이라면, 영국에서 첼시와 함께 손꼽히는 부촌이다. 친구도 끼리끼리 사귀는 건가?
라희는 눈을 조금 들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눈을 미끄러뜨려 시선을 흘려보냈다.
사라는 잠시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분위기를 살피더니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참, 내일모레 크리스마스는 여동생인 케이트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오후쯤 그쪽으로 같이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좋겠어요. 오늘, 케이트 더러 이번 크리스마스 디너에 데이빗도 참석한다고 통보했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예의 바른 대답에 사라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당연한 걸요. 크리스마스 디너는 함께 하면 할 수록 더 즐거우니까요. 그런데, 아까 낮에 우연히 통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크리스마스 날 따로 일정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군요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거라면 괜히..."
"아닙니다. 원래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새해로 미루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것참 다행이네요. 만약 다른 계획이 있는 거였다면, 멋진 청년을 만날 거라 잔뜩 기대한 케이트가 적잖이 실망할 거였거든요. 혹시, 그 친구가 아까 말한 사우스 켄싱턴에 사는 친구인가요?"
"예."
소파 테이블 위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라희는 조용히 입가를 피식, 올렸다. 바흐는 역시 그답게도 먼저 화제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사라가 물으면 간단하게 답만 했다. 사라는 바흐에게 호감이 가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반응이 필요한 부분에만 짧게 호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
라희의 손에는 어느덧 빈 샴페인 잔이 쥐여 있었다. 그와 마주한 껄끄러운 자리에서 이 정도의 시간을 버틴 것만 해도 대견했다. 나름 이 자리를 부탁한 사라를 위해 구색을 맞춰 주었다고 생각한 라희가 이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보겠다는 의사를 무언으로 밝히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순간적으로 몸이 균형을 잃고 조금 휘청했다.
라희가 앉아있던 테이블 앞에 빈 잔으로 남은 음료는 비록, 상큼 달콤한 맛이었지만서도 술은 술이었다. 어젯밤에도 진탕 마셨기에, 몸이 알코올을 처리하는 일이 힘에 부친듯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연이은 알코올의 취기를 버티지 못한 몸이 조금 흔들리자, 저만치 앉아 있던 바흐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라희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그는 라희의 뒤에서 휘청이는 등을 받치고 균형 잃은 팔목을 움켜잡아 그녀를 지탱했다.
예기치 못한 그의 접근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뒤에서 지척으로 훅, 하고 끼쳐오는 그의 그윽한 체향이 코끝에 느껴졌다. 일순, 숨이 저절로 멈춰지면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등이 굳었다.
몸이 서로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바로 뒤에 서 있는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체향이 라희의 피부 속으로 그대로 스미는 것 같았다.
아찔하게 흐려지는 시선 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척에서 오가던 농밀한 숨결. 가늘게 뜨인 눈으로 보이던 몽롱한 시선. 보드랍고 부드러운 촉촉함. 혀끝에 엉기던 뜨끈하고 감미로운 맛 . 맞닿은 채 부벼지던 살갗의 가는 떨림. 촉촉이 젖어 짜릿하다 못해 내내 찌릿거리며 안달 나게 하던 감각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아스라한 편린들이 잠잠했던 기억 속에서 날카롭게 비죽 윤곽을 드러내며 솟아올랐다. 너무도 선명하고 생생한 기억들이 몸의 감각을 거칠게 두드리며 일깨우자 몸에서 열기가 화악 치밀어 올라왔다. 라희는 열기를 피워올리는 기억들을 지우려 아래로 향한 눈을 재빠르게 한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차게 식혀지지 못한 열기는 얼굴까지 가득 몰려 들었다. 아찔한 뜨거움 속 부유하는 감각들의 흔적은 견딜 수 없이 아득했다. 순간, 단단하게 잡혀있는 손목과 그가 가볍게 손바닥을 대고 있는 등이 못 견디게 뜨거워졌다.
흠칫, 몸이 가늘게 떨자 손목을 쥐고 있던 그가 힘을 주어 잡힌 손목을 지그시 눌러왔다.
찌릿, 제 감각에 깜짝 놀란 라희가 몸을 비틀자, 그가 이내 라희에게서 몸을 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조심하시길."
귀 뒤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듯이 들려오는 그의 음성은, 라희를 못내 애타게 했던 이끌림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남긴 진득한 감각의 거미줄에 갇혀 버린 듯, 갑자기 꼼짝 할 수 없었다. 목 뒤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옅은 숨결은, 라희의 목덜미를 타고 스미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 "
라희는 참았던 숨을 내 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감각을 떨쳐내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조심하라는 말. 그가 예의로서 하는 말에는 예의로서 대답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열기로 흐려졌던 의식을 불러 일깨우니, 앞으로의 기간 동안 그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떠올랐다.
라희는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그가 몸에 새겨 놓은 감각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해다. 이내, 나머지 정신까지 마저 추스른 라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나서, 소파에 앉은 사라를 향해 눈을 고정하고 빠르게 말했다.
"이만 올라가 볼게요."
사라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라희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2층으로 향했다. 말없이 등 뒤에 매달린 시선이 무겁게 짓눌러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