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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 내내, 사라는 어색하게 경직된 식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바흐는 예의 깔끔하고 유려한 동작으로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면서 세련된 식사 예절로 사라의 길고 시시콜콜한 수다에 정중하고 공손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동안 그와 같이 밥을 먹어 본적이 몇 번 있지만, 제 3자가 함께 있는 식탁에서 그와 식사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사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성의껏 경청하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음식은 입맛에 맞나요?"
사라가 물었다.
"예. 훌륭합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답했다.
"다행이네요. 혹여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답니다."
사라는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어서 사라는 자신의 음식이 입에 맞는다면, 바스의 모든 음식도 만족스러울 거라면서 바스는 전통 있는 도시이니 만큼, 역사가 오래된 맛집이 많아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이름난 맛집을 들러서 식사해 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 될 거라고 제안했다.
"여기 머무는 관광객들에게 명소로 알려진 소토 소토 (Sotto Sotto)나 고든 존스(Gordon Jones)의 요리들과 샐리룬(Sally Lunn's)의 번(bun)도 한번 꼭 먹어보세요. 다들 길게 줄을 서서 먹는답니다."
그는 알려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꼭 들러보겠노라고 정중하게 답했다.
테이블 위 둘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라희는 눈을 내리뜨고 묵묵히 접시 위의 음식들을 먹어치우는 데 집중했다.
평소 사라가 자신의 요리실력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매번 식탁 위에 제공되는 음식들은 그녀의 자부심만큼 훌륭한 맛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다 남겨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만드는 일은 영 마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바흐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어 놀라 당황했고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날 선 긴장 때문인지 음식 맛을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실상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그저 앞에 놓인 접시를 비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음식물을 기계적으로 씹을 뿐이었다.
마침내 라희가 목표였던 접시를 비우기를 성공하자, 빈 접시에 힐끗 시선을 던진 사라가 디저트로 말린 과일 타르트를 내주었다. 라희는 자신 앞에 놓인 갈색 타르트를 내려다보고서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사라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디저트는 건너뛰어야겠어요. 사라."
"흐음. 그러렴. 네 마른 몸을 생각하면 마저 먹는 편이 좋을 것 같다만, 위에 무리가 가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사라는 라희의 비워진 접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이젠 음식을 곧잘 먹는 걸 보니 기분 좋구나. 예전 모습보다야 요즘이 보기 좋거든."
"......예전 모습이라니요?"
잠자코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그의 질문에 사라는 라희 향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아, 라일라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정말 파리하게 말랐었답니다. 앙상한 몸에 뼈가 툭툭 튀어나왔더라구요.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도 입원했었다고 들었어요. 초기에는 반 접시를 비우는 것조차 힘겨워하다가 요즘 들어서 몸이 제법 좋아졌는지 곧잘 먹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네요."
사라가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주의 깊은 시선이 서 있는 라희의 몸을 세세하게 훑어내렸다.
"그럼, 올라가 볼게요."
사라가 말을 마치자마자 급히 말을 건넨 라희는 몸을 돌려 주방을 벗어났다.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거실에서 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 앞으로 이어진 계단을 통해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라희는 바흐가 어느 방에 머무는지 알 수 있었다. 라희의 바로 옆방은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아무런 짐 없이 텅 비어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옆방이 아닌 건넛방인 거 같았다.
-달깍.
방문을 닫고, 혹여나 하는 노파심으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라희는 방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어제의 만남 이후, 바흐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카페에서 단 한마디 말없이 라희를 응시하던 바흐는 오늘 사라의 집에 홈스테이로 들어왔다.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라희는 주름이 깊게 팬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위약금 2억.
라희의 눈이 방안 창문을 향했다. 오늘, 당장 여기서 짐을 챙겨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은 어떨까. 영국이 아니라, 유럽으로 가면? 하지만, 솔직한 심경으로는 자신 없었다. 언어가 그나마 통하는 영국에서도 초기 적응하는데 꽤 힘들었는데 언어도 다르고 단어도 다른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유럽은 정말 자신 없었다. 라희의 미간이 절망적으로 찌푸려졌다.
자그마치 2억이다. 2억. 이대로 그냥 여기 있게 된다면, 유진과의 계약 위반이었다. 수중에 2천만 원 밖에 없는데 그런 큰 금액을 갚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라희는 이내 침대에서 일어서 초조하게 방안을 거닐었다. 물론, 오늘 밤 이곳을 떠난다면 선 지불한 어학원 수업비와 홈스테이 비용은 포기해야겠지. 현재 남은 돈으로 유럽이 아닌 터키나 그 아래 지방으로 떠나 흔적을 감추려고 발버둥 친다면?
......소용없다.
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영국까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까지 온 힘과 모든 노력을 다해 흔적을 감추려고 애썼음에도, 바흐는 결국 찾아왔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유진과의 계약대로라면, 벌써 두 번째 만남. 이대로 가면 라희쪽에서 2억을 고스란히 물어주어야 했다.
라희는 걸음을 멈추고 창가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창문 아래로 내리뜬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겨우, 진창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여기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무력감이 엄습했다.
불안으로 초조하게 눈을 굴려 방안을 배회하던 라희는 유진이 내 걸었던 조건들을 떠올렸다.
-정당한 이유 없이 파기할 경우, 그로 인한 손해액은 계약금의 두 배로 한다. 바흐 쪽에서는 연락이 없을 거라는 전제하에, 소재를 감추고, 연락수단을 없애고, 해외로 나가 있는다, 그리고 만약 연락이 온다면 라희 쪽에서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
라희는 하나하나 조건을 체크해 보았다. 소재를 확실히 감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연락 수단도 전부 없앴다. 해외로 왔다. 그리고...
그의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
라희는 유진의 싸늘한 표정을 떠올렸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지.
애당초, 유진과의 계약에서 전제는 바흐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진의 전제는 깨졌다. 그가 먼저 라희 앞에 나타났다. 이 상황은 라희의 선에서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희는 계약사항을 위반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2억은 억울하다.
만약, 후에 이유진을 향해 스스로를 변명해야 한다면, 그러니까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즉 모든 사항을 다 이행했음을 주지시켜야 했다. 위 셋의 조건은 전부 철저히 지켰으니, 마지막 남은 조건. 그의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준수 하고서, 잘못된 전제였던 바흐의 연락이 불가항력이고 일방적이었다는 것으로 소명해야 했다.
다른 곳으로 도망쳐 보았자, 뻔한 시간 낭비가 될 것으로 추측되는 지금으로써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 그에게 일절 반응하지 않는다.
유진이 내건 마지막 조건을 떠올리며 라희가 창가에 기대서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려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방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일라?"
사라의 목소리였다. 라희는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사라는 라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많이 바쁘니?"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사라가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몰랐기에 라희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글세요."
라희의 대답에, 사라는 얼굴 가득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데이빗이 오늘 집에 오면서 선물로 와인을 사가지고 왔는데, 알고 보니 아주 품질이 좋은 와인이더구나. 집에 새로 온 식구끼리 친해질 겸, 서로 어색함도 해소할 겸 해서 함께 마셨으면 하는데 잠깐 거실로 내려오지 않을래?"
방금까지, 바흐에게 일절 반응하지 않겠다고 결론 내렸는데 그와 마주쳐야 한다고? 그럴 수 없었다.
라희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자, 라희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던 사라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실은, 내가 데이빗 더러 너를 부르러 방으로 올라가 보라고 했더니 네가 낯설고 어색해할 것 같다며 완곡히 거절하더구나. 데이빗은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은가봐. 처음 봐서 어색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구나. 하여튼, 오늘 마트에 가서 와인 안줏거리도 잔뜩 사왔고 네가 좋아하는 마카롱도 있으니 새 식구 맞이한 기념으로 같이 가서 얼굴 비춰주지 않을래?"
사라는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라희의 의견을 물었다. 라희는 난처한 얼굴로 입매를 굳히고서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내켜 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라희를 보며, 사라가 다시 완곡하게 말했다.
"데이빗에게는 오늘이 첫날이란다. 그도 이곳에 오래 머물 예정인가 보더구나. 두 달 치를 금액을 미리 주었단다. 앞으로 한집에 살아야 하고, 또, 서로 국적이 같으니까 이런 기회로 미리 안면을 트고 지내는 편이 낫지 않겠니? 어차피 같은 한국인이라서 나중에는 친해질 텐데. 나역시 너나 데이빗이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서로 어색해하지 않고 사이좋게 편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 그가 처음 온 날이기도 하고, 서로를 간단히 소개하는 자리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아래 내려가서 간단하게 인사하고서 올라오면 될 것 같구나."
그와 함께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라희는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왔지만, 재차 간곡하게 부탁하는 사라에게 매몰차게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라희의 건강을 회복 시키기 위해 갖은 정성을 기울이고 애정을 쏟아 부었던 사라였다.
라희는 입술을 비틀어 깨물다가 문 앞에서 간절히 기다리는 표정의 사라를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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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