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84화 (8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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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린 라희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닫힌 문 사이로 작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 서툰 피아노 소리였다. 오늘도 찰스가 집에 온 모양이었다. 라희는 현관문 고리를 비틀어 열고 집안으로들어갔다.

"라일라."

거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찰스가 몸을 비틀어 라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사라네 집 거실 창가에 놓인 피아노는 작고한 사라 남편인 피터의 물품으로 사라는 피아노 연주를 할 줄 몰랐다. 종종 찰스가 와서 피터가 살아생전에 즐겨 연주하던 곡을 치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라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 주곤 했다.

오늘처럼 흐리고 쌀쌀한 비 오는 날은 우울한 감상에 젖기 쉬운 날씨로 찰스는 제법 비싼 집을 자신에게 상속해줄 이모를 위해 나름의 아들 노릇을 하기 위해 방문한 듯 보였다.

"라일라. 왔니? 방에 올라가지 말고 소파에 앉아 조금만 기다리렴, 지금 초콜릿 스콘을 굽고 있단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크림 티가 딱이지."

사라가 부엌에서 고개를 비죽 내밀고 소리쳤다. 초콜릿 스콘은 스테이크와 더불어 찰스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네 명의 조카들 중 찰스를 가장 편애한다는 사라는 찰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주었다.

"음, 그리고 마카롱도 있단다. 오늘 장 보러 갔다가 네 생각 나서 사왔어."

"고마워요. 사라."

라희는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하고서 소파로 걸어가 털썩 무너지듯 앉았다. 영국에 와서 맛 들인 바삭하고 달달한 마카롱은 라희가 차 마실 때 즐겨 먹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였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안색이 별로인데요?"

건반을 두드리던 찰스가 연주를 멈추고 라희를 향해 물었다. 라희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날씨가.."

"음,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설마, 약혼자와 싸우기라도 한 거에요?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일 텐데."

찰스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라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런다면 그동안 약혼자와 연락하지 않을 테니 숙제할 시간이 늘어나겠죠. 안타깝게도, 우린 사이가 너무나 좋거든요."

라희는 귀찮은 듯 음 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흐음. 그것 또한 부러운 일이네요."

찰스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서 피아노에서 일어나 거실에 벽에 걸려 있는 기타를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밖은 춥지? 자, 여기 따뜻한 차를 마시렴."

사라가 주방에서 홍차 티폿과 찻잔 그리고 티 푸드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나와서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다가, 기타를 품에 들고 앉아있던 찰스를 발견하고는 기쁜 듯 소리쳤다.

"어머. 어쩜. 오, 찰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그 곡이 꼭 듣고 싶었단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이모. 이모부처럼 피아노로 연주해 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제 기타 실력이 피아노보다는 나으니까요."

이내, 찰스가 눈을 내리깔고서 기타를 부드럽게 튕기며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거실 가득 기타 선율이 울려 퍼졌다.

지금 찰스가 연주하는 곡은 사라가 좋아하는 Say you love me 라는 곡으로, 1970년대 발표 된 패티 오스틴(Patti Austin)의 곡인데, 피터로 부터 프로포즈 받았을 때 그가 직접 연주해서 들려준 곡이라 했다.

"고맙다. 찰스."

찰스는 사라를 향해 작게 미소 지어 보이면서 연주를 계속 했다. 찰스의 기타 실력은 기타에 대해 잘 모르는 라희가 듣기에도 수준급으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멜로디의 음 하나하나 줄을 튕겨 셈세 하게 연주하는 느리고도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자 사라의 눈매가 아련해졌다. 아름다운 지난 과거를 거니는 듯한 애잔한 표정으로, 사라는 기타 연주를 감상했고 그 모습을 보며, 라희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기울여 입에 댔다.

오늘 수업 끝나고 카페에서 마시려던 핫초코는 경황이 없어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뛰쳐나왔는데, 뜨거운 차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라희가 눈을 들어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은 거실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마침내 기타 연주가 끝나자, 사라는 감탄하며 작게 박수를 치다가 찰스를 향해 다가가 포옹했다.

"정말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꼭 듣고 싶었거든."

"이모님을 위해서 이 곡은 얼마든지 연주해 드릴 수 있어요. 저도 이모부의 연주를 좋아했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약속이나 한 듯, 거실 창가의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을 함께한 가족만의 기억이 담긴 행동이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그리워하고, 같이 추억한다.

가슴이 먹먹해진 라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소파 테이블 위 색색이 놓인 마카롱 중 아몬드 맛이 나는 하얀색을 골라 입에 넣었다.

"아, 정말 오늘 같은 날이면 그이가 그립단다. 우린 이렇게 비 오는 날 같이 나란히 앉아 차 마시는 것을 가장 좋아했거든."

사라가 말하자, 찰스가 테이블에 손을 뻗어 접시 위의 초콜릿 스콘을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기억나요, 이모부께서도 마카롱을 좋아하셨죠."

"그래. 그래서 한동안 마카롱은 사지 않았는데, 라일라가 이걸 좋아하더구나."

라희는 순간 놀라 사라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따스하게 눈매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라일라. 네 덕에 그래도 마카롱을 보면서 울적해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뭐니. 전에는 마카롱을 보면 굉장히 우울했는데, 네가 즐겨 먹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나니 이제는 마카롱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단다."

그저 잠시 집에 머문 이방인인 라희를 신경 써주고 걱정해주는 사라. 사라의 다정하게 주름진 눈길 속에서, 조금 전 까지 심란하고 뒤숭숭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아, 어제 어머니께 크리스마스 때 이모님이 오실 거라 말씀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셨어요."

"아, 맞아. 오늘 낮에 통화했단다. 라일라도 같이 간다고 했더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길래 한국이라고 했더니 그럼 디너에 김치를 준비해야겠다고 호들갑을 떨던걸. 라일라, 김치 좋아하니?"

"아. 네. 아주 좋아해요. 한국인 치고 김치 싫어하는 사람 없을 거에요."

라희가 대답했다. 사라는 뭔가를 생각하듯 눈을 위로 들어 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마트에 가면 각 나라 모든 음식을 구할 수 있지. 마트 선반에 놓여있던 김치가 담긴 병을 구경만 했지 실지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삼일 뒤 크리스마스 디너에 케이트가 준비해놓는다니, 벌써부터 맛이 기대되는걸."

"아마 입맛에 맛을 거에요. 조금 짜고 새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니까요."

"호오. 겉보기에는 매워 보이던데. 독특한 맛인가 보구나."

사라가 호기심을 드러내자, 찰스가 답했다.

"그다지 맵지는 않아요. 맵기로 따지면 할라피뇨가 더 맵죠."

"그래? 라일라가 덕에 새로운 경험이 하나 더 늘겠구나. 재미있겠는걸."

사라가 라희를 향해 눈을 찡긋하자, 라희는 입가를 조금 들어 올렸다. 그래, 불쾌하고 악몽 같았던 과거는 털어내고, 사라처럼 애정으로 충만하게 회상할 수 있는 기억들을 만들어가자. 테이블 위로 낮게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찻잔을 기울이며, 라희는 그렇게 다짐했다.

***

"으......."

라희는 세면대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엉망이었다. 더불어 머리도 지끈거렸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어제밤 늦게까지 찰스와 사라 그리고 라희는 함께 어울려 와인잔을 기울였다.

여느 때처럼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스는 흐린 겨울밤, 현관문을 열자 돌연 불어온 세찬 바람에 사라가 조금 놀라 하자, 이런 날 집안에 연약한 여자 두 명만 달랑 두기는 불안하다고 남자가 있어야 한다면서 열었던 현관문을 닫고 집안으로 돌아섰다.

사라는 그렇지 않아도 조금 불안했다면서, 이런 날에는 홈스테이 학생들로 방이 꽉 차있던 날이 그립다면서 찰스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했다.

이내 모두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찰스가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멋진 음악이 흐르는 밤에는 와인이 있어야 한다며 사라가 와인을 꺼내 왔다. 그러다 보니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지난밤 대화를 떠올린 라희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찰스는 술자리에서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라희를 향해 이런저런 농담을 건넸고, 예의상 웃어주는 일도 조금 힘이 들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라가 뭔가 이야기하도록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약혼자에 대해 물었고, 라희는 대충 둘러대며 말을 했는데, 찰스가 어쩐지 미심쩍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손가락에 약혼반지가 안 보인다면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라희는 당황해서 반지야 물론 받았지만, 한국에서는 흔히 약혼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다고 변명했었다.

"흠."

라희는 왼손을 들어 올려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라도 반지를 사서 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한편으로는, 왼손 약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으면 임자가 있다는 소리니 일일이 남자 친구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편하겠다 생각되었다.

물끄러미 왼손을 바라보던 라희는 오늘 오후 수업 끝나고서 보석상에 가 얇은 금반지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지긋지긋한 찰스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오후 늦게 어학원 수업을 마친 라희는 집으로 가지 않고 몸을 돌려 하이 스트리트 (high street: 중심가)로 향했다. 바스는 유명 관광명소답게, 쇼핑 시설도 빠짐없이 들어서 있었다. 영국 내 주요 으리으리한 프랜차이즈 상점뿐만 아니라, 역사가 오래된 고풍스러운 상점들도 즐비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거리마다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어둑어둑해진 4시면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로 가득한 거리마다 환히 불을 밝힌 색색의 조명들이 건물마다 늘어지듯 걸려있어서 반짝이기 때문에 마치 동화 속 도시에 온 것 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라희는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에 감탄하며 길을 걷다가 주변 상점보다 훨씬 럭셔리하게 꾸며진 보석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어서 오십시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티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정중히 인사하며 반겼다.

"반지를 보려고 왔는데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반지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보석상에서 처음에 보았던 반지들은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패션 반지로, 아무리 봐도 약혼반지로 착용하기에는 무리였다. 때문에 좀 더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를 원한다고 말했다가 심플한 금가락지를 보게 되었는데, 주인이 이건 결혼 반지(Wedding band) 라면서 혹시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이런 반지를 찾으시는 겁니까?"

보석상 주인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라희는 머뭇거리다가, 약혼반지(engagement ring)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꺼내 보여준 것들은 죄다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었다. 고작 반짝이는 돌멩이를 박아넣었을 뿐인데, 가격이 상당히 고가였다. 라희는 그중에서 가장 저렴한 14K 아쿠아마린 반지를 골라 값을 지불했다.

보석상 주인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면서, 아쿠아마린 보석의 뜻은 젊음과 행복이라며 약혼자와 함께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어쩐지 라희를 레즈비언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뭔가 오해를 산 거 같았지만, 해명하기 귀찮아진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대답하고서 샵을 나왔다.

라희는 손에 들려 예쁘게 포장된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단 반지를 사기는 했지만, 갑자기 끼려니 괜히 쑥스러웠다. 라희는 케이스를 그대로 가방에 넣고서 발걸음을 재촉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라희는 크게 울리고 있는 전화벨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집안 가득 풍겨 나오는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에 코를 킁킁댔다. 코끝 가득 스민 냄새는 잘 구워진 스테이크 냄새였다.

냄새를 맡은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스테이크는 찰스가 방문하는 날 먹는 음식인데, 찰스는 분명 어제 술을 마시고 오늘 아침까지 머물다가 출근한다며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간 찰스가 사라의 집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오늘 다시 방문 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어머, 왔니. 라일라. 배고프지? 어서 식사하렴. 나는 먼저 먹고 있었단다. 잠깐만, 전화가 와서."

사라가 주방에서 바삐 걸어 나오며 재빠르게 말하고선 거실 소파 옆 협탁 위에 놓인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 케이트. 그래. 응. 맞아, 아니 10명분이라니까. 아까 말했잖아. 응."

사라의 동생이자, 찰스의 어머니인 케이트에게서 온 전화인 모양이었다. 전화받는 사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희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라희가 사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저녁 식사는 항상 함께했다. 라희가 집에 오면 사라와 함께 부억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사라가 먼저 디너를 시작하다니?

넓은 거실 소파에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서, 라희는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의 모퉁이를 지나, 주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라희는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라일라......"

라희 뒤에서 사라가 주방으로 걸어오다가 우뚝 멈춰선 라희를 발견하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소개해줄 사람이 있단다. 인사하렴."

멈춰 서 있는 딱딱하게 굳은 라희의 두 눈 가득, 식탁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새카만 눈동자가 들어와 박혔다.

"오늘 새로 들인 식구란다. 이름은 데이빗 한. 한국 이름은 진욱, 한이라던데 너와 같은 한국인이야."

사라가 옆에서 말하자, 바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말을 건넸다.

"Good to see you."

(보게되니 반갑군요.)어쩐지 그 말 뒤에 Again이 생략된 것 같았다.

"............."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너무 놀라, 라희는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서서 얼어버렸다. 그를 발견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을 뻔 했다. 지금은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었다. 그저 멍했다. 지금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낮게 가라앉은 차분한 검은 눈동자는 라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이니?"

차갑게 굳은 라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라가 의문을 표했다. 라희는 놓았던 정신을 거두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로 식탁에 앉은 바흐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이 담담한 짙은 눈동자로 라희를 응시했다. 이제는 어제처럼,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한기를 넘어 온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니요."

라희가 가늘게 떨리는 입을 겨우 열어 대답하자, 사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라희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방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라희에게 손짓했다.

"어서 앉으렴. 데이빗이 오후에 도착했거든. 그래서, 오후부터 새 식구를 환영하는 의미로 부랴부랴 장을 봐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바빴단다."

라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키지 않는 굳은 표정으로 식탁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바흐와 멀리 떨어져 대각으로 비킨 자리였다. 테이블 위로 숨죽인 긴장감이 흘렀다. 그의 곧은 시선 속에서 라희는 뻣뻣하게 굳어 가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갑작스레 가라앉은 식탁 분위기를 어색함이라 생각한 사라가 싱긋 미소 지으며 음식이 가득 담긴 보울을 들어 라희의 접시 위에 샐러드니, 크림에 졸인 병아리콩이니를 덜어 놓아 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말, 보기 드문 훤칠한 청년이지 뭐니. 영어도 정말 유창하고, 나이도 찰스와 또래라 말도 잘 통할 거고, 라희 너와 영어로 이야기도 할 수 있겠고 또 같은 한국인이니 통하는 게 있을 거 아니니. 너도 그동안 적적했을 텐데 정말 잘 되었지 뭐니. 여자만 있는 집이다 보니 남자가 집안에 있는 것이 든든하기도 하고. 나는 데이빗이 우리 집에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 기대 되서 정말 기쁘단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사라의 말에, 라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보며 경청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녀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라가 하는 말들은 그저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바흐를 지척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긴장으로 피부 위 솜털 하나하나까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대각에 앉은 그가, 시선을 사라에게 향하는 한편, 라희를 집요하게 주시하고 있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바흐의 시선을 눈치챈 사라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머, 데이빗. 이렇듯 예쁜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지는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라일라는 약혼자가 있답니다."

"...약혼자요?"

그가 미간을 미미하게 좁히며 나직이 되묻자,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있다더군요. 때문에 우리 찰스도 처음엔 실망이 컸답니다. 그렇지? 라일라."

노골적인 불쾌감을 담은 곧고 집요한 시선이 바로 라희를 향해 쏘아져 왔다. 차갑게 쏟아져 내리는 숨 막히는 눈빛 속에서 라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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