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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 보는 허공에 그의 시선에 갇힌 익숙한 침묵이 자리했다. 탁, 카페 테이블 위 펼쳐진 영어책 갈피로 손에 들려있던 펜이 놓였다. 펜을 내려놓느라 시선을 잠시 내려 비낀 라희는 다시 눈을 들어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흐를 마주 보면서 천천히 숨을 삼켰다.
그가 눈에 들어오자 마자, 머릿속에 순식간에 떠올라 굳어버린 숫자.
위약금 2억.
2억이다. 한두 푼도 아닌, 자그마치 2억. 두 달 전 유진과의 구두계약으로 손에 쥔 가슴 떨리던 금액은 1억의 두 배. 그 1억 중 6500은 바흐 계좌로 넘겼다. 나머지 3500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영국에 온 뒤 지금까지 생활해 왔다. 현재 남은 금액은 2천만 원 남짓. 지난 두 달간 사치를 한 것도 아니고, 돈을 펑펑 쓴 것도 아닌데 그렇게밖에 안 남았다.
런던에서 한 달간 쓴 비용만 해도 민박집 2주140, 플랫 쉐어 80, 병원비 300, 홈스테이 40을 합한 560에 식비와 교통비 약간 해서 600가량. 그리고 지금 바스에 와서 어학원 등록비 350, 그리고 홈스테이 1주에 130파운드. 한 달이면 한국 돈 100만 원. 그마저도 사라가 세심히 보살펴 주는 것이 고마웠는데도 달리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하숙비 석 달 치를 미리 선불로 냈었다. 거기다 항공권 구매한 비용을 더하니 남아있는 돈은 현재 그게 다다.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다고 할 수 있는 2천만 원.
2천만 원으로 2억을 어찌 갚는단 말인가.
물론, 유진에게 받은 1억과 별개로 그가 건네준 천 만원 남짓이 통장에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귀국해서 자취방 보증금과 생활비로 사용할 돈이었다.
라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에 앉아있는 바흐를 쏘아보았다. 그처럼 금전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산관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2천만 원을 2억으로 불리기는 불가능하다.
입국 시 받은 관광 비자 만료일은 4월. 그때까지 이곳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휴양지 바스에서 소리소문없이 머물다가 귀국하려 했는데 오늘, 그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
짧은 한숨을 내 쉬고서, 창밖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 라희는 말없이 앉아있는 그를 보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아마 오늘 집에가서 거울을 들여다 보면, 입술 안쪽이 잘게 씹혀 엉망이 되어있을 거 같았다.
대체, 어떻게 찾아냈을까. 라희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출입국 흔적을 감추기 위해 싱가포르에 입국한 후 영국으로 오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했는데. 거기다 투숙객 정보를 남기는 호텔은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현금을 받는 민박, 홈스테이, 플랫 쉐어. 낯선 해외체류인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일은 상당히 기력을 소모 시켰다. 정말,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라희는 이제까지 차곡차곡 저장된 기억을 헤집으며 도대체 어디에 빈틈이 있었는지를 헤아렸다. 순간, 라희의 뇌리에 지난주 사용한 신용카드가 스쳤다. 신용카드? 이내 라희의 눈매는 좁아졌다. 그것은 엄마 명의다. 바흐가 거기까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극도로 사용을 자제했었기에 몇 번 쓰지도 않았다. 그 밖에는, 지금 쓰고 있는 C은행 국제현금카드. 전 세계 인이 사용하는 외국계 C은행에서 고객정보를 소홀히 할 리는 없다 생각되었다.
대체 어떻게 그가 여기를 알아냈을까.
라희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부질없는 호기심인가. 아니, 지금 그가 앞에 나타나 이렇게 앉아있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분명 라희를 찾아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라희는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그의 모습을 살폈다. 창밖은 부슬비가 내린 흐린 날씨인 데다가 겨울이면 해가 짧은 지역 특성상 제법 어두웠기에 카페의 은은한 조명빛 아래 곧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뉴욕으로 떠나고 서너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때처럼 전혀 변함없었다. 짙은 눈썹, 반듯하고 오똑한 콧날, 차가워 보이는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얼굴선. 그리고 빈틈없이 깔끔한 헤어스타일, 세련되고 정제된 명품 셔츠와 잔주름 하나 없는 팬츠, 그리고 번들거리는 구두까지.
처음 미라의 손에 이끌려 가서 그를 봤던 때와 똑같다. 마치 잡지 화보를 찢고 튀어나와 앉아있는 것 같은 모습. 아니,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 자체가 모델 컷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고는 주위를 둘러싼 미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흑요석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라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안 검은 눈동자 가득, 라희의 모습이 비쳤다. 라희는 그의 굳게 다물린 단정한 입술을 노려보았다. 순간, 라희의 입가에 냉소가 스몄다.
그는 침묵의 달인이다. 항상 과묵했고, 스스로도 조용한 침묵을 즐겨서 함께 있을 때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절대적이고 끝없는 침묵은 어쩌면 그가 평생 연마해온 침묵의 기술일지도 몰랐다.
그의 몸에 각인된 침묵은 무겁게 라희를 압박했다.아마, 저 입술이 열리길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다가는, 얼마 남지 않은 올해가 다 지나고도 남을 것이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
"음....."
답답한 고요를 깨기 위해, 라희가 낮은 소리를 냈다. 갑자기 목소리를 내려니 잔뜩 잠겨있었다. 음, 음, 하고 라희는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한진욱 씨."
라희가 딱딱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짙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려 흥미를 보이며 라희를 응시했다. 라희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책을 덮어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희는 그의 앞에 우뚝 섰다.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쨌거나 그와 계약은 끝났고,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거다. 완벽한 타인.
유진이 어쩌다 우연히 한번 스치는 것은 괜찮다 하지 않았는가. 지레 겁을집어 먹고 사색이 되어 벌벌 떨지 말자. 겁먹지 말자. 침착해야 해. 라희는 떨리는 가슴을 다잡으며 계속 되뇌었다.
테이블 앞에 서서, 앉아 있는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날카로운 시선이 라희를 향했다. 라희는 미간을 구겼다.
두 달 전,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경악에 가까운 가정들이 모두 사실인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하지만, 이제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이미 혼돈의 시간은 라희를 비켜 흘렀다.
지금 당장 과거 일을 알아서 뭐할 것인가. 긍정? 그가 그랬다 치면 나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사과? 이미 지난 일을 뭐로? 무슨 수로 사과받는 단 말인가. 미안하다는 말? 그런 말 들으면 과거가 달라질까?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오빠가 차 사고를 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이 마법처럼 없던 일이 되지 않으니까, 보험회사에 기재된 사고 기록도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그가 아니라고 부정하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 착각해서 미안해요. 오해했군요 할 것인가?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데.
그가 여기까지 어찌 찾아왔건, 이제는 중요하지도 않았고 큰 상관 없었다. 라희 앞에 놓인 차가운 현실은, 바흐와 계약은 끝났고, 이제 유진과의 계약에 따라 그와는 만나거나 연락하면 안 되었다. 이미 라희와 관련 없는 그에게서는 더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그리고....
라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벌써 두 달이 지났으니, 아마도....
".......부인께 돌아가시죠."
그가 침묵하던 시간동안 홀로 번민한 라희가 그에게 할 말은 그것 뿐이었다. 차갑게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짧게 말을 마친 라희는 재빨리 몸을 돌려 카페를 벗어났다. 뒤에 매달린 곧은 시선에서부터 도망치듯 다급한 발걸음으로 앞을 향하는데 심장이 쿵쾅이며 뛰었다.
뒤에서 일어서 쫓아오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카페에서 제법 멀어지자, 그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바깥의 부슬거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오싹하게 흘렀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라희의 눈에 다가오는 빈 택시가 보였다. 라희는 바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택시가 멈춰 서자, 문을 열고 올라타 재빨리 집 주소를 댔다.
"후......"
뒷좌석에 몸을 묻은 라희는 눌렀던 숨을 터트렸다. 뭔지 모르게 몸이 잘게 떨렸다. 됐어. 이제, 이제 된 거야. 끝났어. 완전히 끝난 거야. 라희는 초점 없는 눈으로 어두운 창밖으로 스치는 거리의 풍경을 마냥 흘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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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