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82화 (8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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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은 어때요? 다닐 만 한가요?"

접시에 집중하고 있던 찰스가 짙은 갈색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라희를 향해 물었다. 올해 서른인 찰스는 사라의 조카로, 손아래 자매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자손이 없는 사라가 상속인으로 지정한 상속자였다. 만약 사라가 사망한다면 현재 살고있는 주택은 찰스에게 상속된다.

그 사실 때문인지 찰스는 아들 노릇 비슷하게 한 주에 한 번 정도 집에 찾아와 사라의 안부를 묻고, 같이 식사했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그럭저럭요. 추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가야 하는 것만 빼면 좋아요. 선생님들도 수업도 모두 만족스럽구요."

라희는 두툼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며 대답했다. 나이프 끝이 고기의 육질 속으로 깊게 파고들자, 안에 머금어졌던 붉은 핏물이 가득 흘러나와 새하얀 접시로 번졌다. 접시 위 가득 번진 짐승의 피를 내려다보던 라희의 미간이 질색하며 희미하게 일그러지자, 그 모습을 본 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쿡, 짧게 웃었다.

"이리 줘봐요."

라희의 곁으로 다가온 찰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스테이크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내, 고기를 다시 익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분 뒤 찹 스테이크로 깍둑썰기 되어 바삭하게 익은 스테이크 고기가 라희 앞에 놓였다.

"......고맙습니다."

라희가 작게 중얼거리자, 찰스는 푸른 눈을 빛내며 빙긋 웃었다.

"뭘요. 그런데 진짜 약혼한 거에요? 한 번도 전화로 연락하거나 편지 오는 거 못 봤는데."

그가 눈매를 찡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라희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한국에 약혼자가 있어요. 우린 주로 인터넷을 쓰죠."

"그래요....... 조금 아쉽네요."

테이블 건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이 들렸다. 라희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사라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희와 마주친 찰스는 바로 라희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라희는 인터넷에서 대다수 영국인 남자에게 아시아 여자가 어떤 이미지인지 알아봤었기에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싶었다.

아시아 여자는 직장이나 대학교 내의 이너서클에서 만난 상대가 아니라면 주로 쉬운 섹스 상대, 혹은 하룻밤 유희거리, 혹은 꽃뱀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더는 관심 가지지 못하도록 한 술 더 떠 약혼자가 있다고 대꾸했었다. 그런데 오늘 확인하듯 다시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응? 무슨 이야기 중이었니?"

사라가 밖에서 들어오며 현관문 쪽에서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모. 밖에 조명은 복구되었나요? 이제 불이 들어왔어요?"

"어, 응. 콘센트가 빠져있었지 뭐니. 어쩐지 아까부터 뭐가 허전한 게 계속 신경 쓰이더라니. 울타리 가운데 조명이 꺼진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흉물스럽게 보였을 거야.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사라가 먼지 묻은 손을 종이 타올로 닦으며 식탁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막 식사하던 차에, 찰스가 창밖의 울타리 가운데 크리스마스 장식 불이 꺼져있는 것을 아느냐고 지적하자 놀란 깜짝 사라가 바로 뛰쳐나갔었다.

"음식은 입에 맞니? 너 좋아하는 스테이크 했는데."

사라는 손에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면서 찰스를 향해 물었다.

"네. 저야, 이모님이 해주시는 요리는 다 좋아하죠."

찰스는 밝게 대답하고서, 라희에게 힐끔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음번엔 웰던으로 구워주시면 안 돼요?"

"왜? 이건 세인스베리(Sainsbury 마트)가 아니라, 웨이트로스(Waitrose 고급 마트)에서 산 고기란다. 이런 질 좋은 스테이크 고기를 뻣뻣한 쓰레기로 만들어서 먹으려는 이유가 뭐니?"

사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묻자, 찰스는 푸른색 한쪽 눈을 귀엽게 찡긋했다.

"에이, 이모가 요리하면 웰던도 입에서 살살 녹을걸요?"

"얘도 참."

조카에게 손을 내젓던 사라가 알겠다는 듯 덧붙였다.

"다음번엔 웰던으로 해주마."

그 말을 들은 찰스는 라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라희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서 깍둑썰린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다음 주가 벌써 크리스마스지 뭐니. 세월도 빠르지. 벌써 한해가 끝나가다니."

사라가 벽에 걸린 달력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적적하시겠는데요? 작년에는 만실이라서 네 명이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잖아요. 올해는 이렇게 두 분뿐이니."

"으음, 그러게 말이다. 나는 괜찮은데, 라일라가 심심해하는 것같아 보여서. 영어로 이야기할 또래가 없잖니."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자주 방문하잖아요."

찰스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외쳤다.

"아, 그러면 차라리 이번 크리스마스에 저희 집에 오실래요? 엄마도 이모가 온다면 아주 기뻐할 거에요."

"그럴까?"

"네. 라일라도 같이 올 거죠?"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초대였다.

"......아니요. 전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은데요."

"왜요? 명절에는 모두가 함께해야 좋은 거라구요. 더군다나,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처음 아니에요?"

라희는 잠시 고민하느라 눈빛을 낮췄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들고 입을 열었다.

".....숙제가, 연휴라서 어학원 숙제가 아주 많아서요."

"에이, 크리스마스에 숙제를 무지막지하게 내주는 학교가 어디 있어요?"

찰스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투로 놀리듯 말하자 갑자기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올 거죠? 이모님과 함께 오세요. 어머니께 이번 디너는 라일라까지 9명분 준비하라 일러둘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찰스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재차 초대했다. 그러자 옆에서 사라가 거들었다.

"그래. 라일라. 같이 가자꾸나. 사람들이 많으면 더 재미있을 거야. 크리스마스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이니까, 너 혼자 우두커니 집안에 남아있는다면 내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같이 가주지 않으련?"

사라까지 간곡하게 초대하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라희는 테이블 위로 눈을 내리깔고서 고개를 끄덕여 작게 말했다.

"네."

이내 테이블 위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마을 이야기였다. 사라는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했기에 시정(市政)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조카인 찰스 역시 지역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사라가 흥미가 있을만한 시청 뉴스들을 들려주었다.

라희는 잠자코 식사하면서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일상적인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서 전부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라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둘의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라희는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접시를 들고서 싱크대로 다가갔다.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가 하기 때문에 접시에 묻은 음식물 건더기만 수돗물에 가볍게 흘려보내면 족했다. 라희는 애벌로 행군 접시를 식기세척기 안에 넣고서, 주방으로 돌아와 식탁에서 토론 중인 두 사람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나와 계단을 올라 2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오다 보니, 라희방 옆의 방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사라가 청소하다가 문을 열어둔 듯했다. 그 옆의 방문은 여느 때처럼 굳게 닫혀있었다.

사라의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넓은 마당이 있는 독립된 하우스인 만큼 꽤 크고 넉넉한 규모였다. 2층에 사라가 쓰는 방을 제외하고도 커다란 방이 3개가 더 있었는데, 모두 홈스테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리모델링을 완료한 방이었다.

각 방마다 원룸처럼 개별 욕실과 화장실을 갖췄다. 그 중 한 방은 라희가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방 2개는 현재 비어있는 상태였다.

'저 방이 죄다 차 있었다면 이번에 크리스마스 디너를 먹으러 찰스네 집에 갈 필요가 전혀 없었을 텐데. '

내심 못마땅한 짧은 한숨을 복도에 남긴 라희는 발걸음을 방으로 재촉했다.

라희는 방에 들어와 책상에 털썩 앉았다. 책상 위에는 영어교재와 핸드아웃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지난주, 바스 도심에 위치한 K 어학원의 집중 과정(Intensive course)에 등록하고서부터 그날 그날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는 배운 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복습하느라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비록, 지금까지 고작 한 주 다녔을 뿐이지만, 집중과정의 주당 26시간의 수업시간은 매우 빡빡했다. 26시간을 주 5일로 나누어보면 하루에 5시간 정도를 꼬박 수업 듣느라 보내는 거였다.

벌써 영국에 온 지 2달째, 이제는 더듬거림 없이 간단한 문장을 매끄럽게 말할 수 있었지만, 작문은 아직까지 큰 과제였다. 어학원 수업은 듣기, 말하기, 작문 전부 골고루 연계해서 배울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후.... 많다..."

책상 위 교재와 자료를 살펴보던 라희는 펜을 들고서 내일 아침 과제인 에세이부터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날씨는 제법 쌀쌀해졌다. 서울의 혹독한 겨울 추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추운 날씨가 이어져서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까지 계속되자, 어학원 수업을 막 마친 라희는 추위로 몸을 덜덜 떨었다. 가까이에 있는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나, 하다못해 핫초코라도 한 모금 먹어야 할 그런 날씨였다.

"으... 추워."

어학원 현관문을 열면서 바깥 외기에 몸을 부르떨며 걸어 나오다 보니, 바로 앞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검정색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리무진처럼 긴 직사각형의 위압적인 보닛 위에 비죽 솟아있는 조각상 모양의 엠블럼. 영국의 자존심 롤스로이스였다.

라희가 영국에 와서 놀란 점 중 하나는, 주위 돌아다니는 차가 죄다 외제 차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외제 차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독일 차의 비율이 가장 높았고, 프랑스 차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마도 영국과 프랑스 특유의 국가감정 때문인 듯했다.

특히 런던 길거리를 돌아 다닐 때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등 한국 내에서도 보기 힘든 이태리 스포츠카를 적잖이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바스 역시, 비록 런던만큼은 아니지만, 부유층이 거주하는 비율이 높은 만큼 고가의 외제 차가 빈번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스로이스는 그리 흔한 차가 아니라서 라희는 서 있는 차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거두고는 카페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자동차에 아무런 관심이라고는 없는 라희는 저 자동차가 롤스로이스인지 벤틀리인지 페라리인지 몰랐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번 바흐와 두바이에 갔을 때 버즈 알 아랍 체크 아웃 하고 알마하 리조트로 체크인 하려고 움직이느라 이용했던 자동차가 다름 아닌 롤스로이스였다. 때문에 어학원 앞에 세워진 차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직접 타보기까지 했으니까.

"핫초코 한 잔 주세요. 테이크 어웨이 (take away: take out의 영국식 표현)로요."

라희는 커피숍 카운터에서 핫초코를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종이컵에 담긴 핫초코가 나왔다. 그걸 들고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버스를 타러 나갈까 하다가, 문득 카페안 공기가 굉장히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져 추운 밖으로 나가기 망설여졌다. 은은한 커피 향과 차 향이 감도는 실내 냄새도 맡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뜻한 카페에서 조금 몸을 녹이고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핫초코가 담긴 컵을 올려놓고서, 가방을 열어 책과 펜을 꺼냈다. 라희는 오늘 어학원 수업에서 배운 문법과 단어들을 정리하느라 영어 책에 고개를 숙인 채 부지런히 여백에다 펜을 놀렸다.

한참을 그렇게 열중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조금 주위가 어두워진 기분.

'.........뭐지?'

라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앉아서 공부하고 있던 테이블 위로 긴 음영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의아함에 눈을 더 들어 보니,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페의 조명을 등지고 선 키 큰 남자가 라희의 테이블 앞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단 한 사람.

".........!"

그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온 순간, 라희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굳어버린 눈동자에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오자, 이젠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라희는 급히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아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시선이 따갑게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머릿속 가득 거칠게 뛰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라희는 고개를 수그린 채 입술을 꽉 깨물어 짓씹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해!

바흐는 테이블 앞에 우뚝 서서 미동도 없이 위에서 라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따끔, 따끔, 그의 시선이 닿는 곳 마다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가운 감각이 일어섰다.

".........."

라희는 손바닥에 박힌 손톱 끝이 하얗게 될 때까지 힘주어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목이 악력을 이기지 못해 잘게 떨고 있었다. 바닥에 내리꽂힌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로 지척에 서 있는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근 눌린 입술 안쪽에서 이젠 희미한 피 맛이 느껴졌다. 라희는 애써 참았던 숨을 천천히 억눌러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 가닥가닥 흐트러진 용기를 끌어모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

앞에 우뚝 서서 서늘하게 내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이제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

라희는 지지 않으려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흐의 검고 깊은 눈매가 미미하게 좁혀지더니 이내, 곧게 서 있던 그가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길고 단단한 다리로 두어 걸음 걸어간 그는 라희의 바로 앞 의자에 흐트러짐 없는 곧은 자세로 바로 앉았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라희를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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