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80화 (80/214)

80

라희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커다란 푸른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화면 위 붉은색 테두리에는 FLIGHT INFORMATION(비행 정보)라고 쓰여있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푸른색 화면에는 비행기 이착륙 스케줄이 빽빽이 들어차 차있다.

낯선 이국땅.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라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했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오늘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이곳 싱가포르 창이공항(Changi Airport, Singapore)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 한 뒤, 출국장을 빠져나와 가까이 보이는 공항 벤치에 털썩 앉았다.

6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와서인지 몸이 지쳤다. 라희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뻐근한 목을 빙글 돌렸다. 목 뒤로 연결된 어깨까지 무거웠다. 아니, 따지고 보면 피곤한 이유가 비행 때문은 아니다. 라희는 미간을 손끝으로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부터 지금까지가 라희의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날이었다. 유진의 전화 이후, 쉴 새 없이 몰아치듯 리스트에 적힌 일을 처리하느라 진이 빠지도록 움직였다.

마침내 리스트의 일정을 다 마치고서, 인천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이륙해서 하늘에 붕 떠오른 이후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불현듯, 기분이 이상했다. 할 일 항목에서 뭔가를 빼먹고 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게 뭘까 곰곰히 하루를 되짚어 생각해 보니, 라희가 최종적으로 참고한 리스트 메모에는 맨 나중에 추가한 병원 항목이 빠져있었다. 라희는 비행기 창에 비춘 자신의 팔뚝을 힐끔 보다가 이내 시선을 옮겼다.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다. 바흐와의 계약으로 삽입해 놓은 임플라논을 제거하는 일을 잊은 데다가, 처방이 필요한 상비약도 챙기지 못했고, 출국 전 약국에서 간단한 해열제와 진통제 소화제를 사는 일도 깜빡했다.

낭패였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 보았자, 이미 대한민국을 벗어난 시커먼 바다 위 상공이었다. 시술 제거는 고사하고, 당장 가지고 있는 상비약이 수중에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아프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여행자 보험도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건강했으니 앞으로도 큰 이상은 없으리라 낙관했다.

지난 나흘간 꼼짝 않고 모텔에 틀어박혀 완벽에 가깝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자부했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컴컴한 창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희는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심야 비행이라 이미 어두침침해진 실내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던 독서 등을 끄고 뒤로 기대 눈을 감았다.

병원 항목을 빼먹은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 때문인지, 축 저져 손하나 까딱할 힘 없는 무거운 몸인데도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었어 잠이 오지 않았다. 거기다 숨 막히게 옥죄어 오던 계약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 한국를 떠난다는 설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긴장이 한데 뒤섞여 마음이 심란했다. 비행 중간에 자기도 모르게 깜빡 눈을 붙인 한두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

생각에 잠겨있던 라희는 손바닥으로 배를 문질렀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이른 아침으로 제공된 기내식을 먹은 후부터 소화가 되지 않고 있는지 자꾸 속이 거북하고 불편했다. 하긴, 거의 하루 만에 먹은 식사라서 위가 놀랐나 보다. 어제는 너무 바빠 음료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한동안 배를 살살 문지르며 통증을 달래던 라희는 고개를 들어 비행 정보 화면에 시선을 던졌다.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여야 했다. 이제 긴 여정의 중간쯤 왔을 뿐이었다. 쉬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된다.

라희는 짐 가방이 얹어진 여행 가방을 끌고 바로 스카이 트레인을 을 향해 이동했다. 싱가포르 창이 공항은 긴 막대기 같은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터미널 3개 동을 스카이 트레인이라는 경전철로 연결해서 운행한다.

지상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있으니 창밖으로 공항 주위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같은 아시아권이라고 해도, 서울과 6시간 거리인 만큼 해외라는 것이 생생히 실감 날 만큼,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야자수를 닮은 가로수들도, 길가에 알록달록 피어 있는 꽃들도, 건물도, 자동차도, 주위 풍광도 색달랐다. 시간만 넉넉하고 체력이 허락한다면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넓은 공항 곳곳을 구경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자료 조사했을 때, 알아본 바로는 터미널마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특색있게 꾸며져 있어 관람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희는 너무 피곤했다. 싱가포르 공항 구경은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로 미뤄야 했다.

라희는 스카이 트레인에서 벗어나 3번 터미널로 향했다. 게이트로 들어가려고 보니, 1번 게이트 옆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위에 걸린 하얀색 팻말을 읽어보니 FIRST CLASS라고 쓰여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라는 단어를 보니 연상되는 사람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냉소가 스몄다. 과연, 남은 인생에서 퍼스트 클래스를 다시 탈 일이 있을까? 오늘 타보니 마음이 홀가분한 이코노미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공항 터미널 안에 들어가니 어딘가 낯익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천공항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라희는 여행 가방을 끌고 넓고 쾌적한 공항 내부를 걸었다. 인천 공항과 세계 순위를 다투는 국제 공항답게 편의 시설이 마음에 들었다. 무료 와이파이와 넓고 안락한 의자, 밝은 조명.

조금 더 들어가서 보니 인천 공항과 다른 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창이 공항은 특이하게도, 실내 곳곳에 꽃과 나무들을 잔뜩 심어 놓았다. 어쩐지 친환경적인 느낌이었다. 심지어 연못도 있었는데 연못 안에는 팔뚝만 한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다녔다. 조금 더 걸어보니 상업시설이 밀집한 지역의 바닥은 발소리가 실내로 울리지 않도록 알록달록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더워.."

공항 내부를 거닐던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 감상은 날씨가 확실히 다르다는 거였다. 한국은 지금 늦가을인데 반해 싱가포르는 여름 날씨였다. 새벽인데도 상당히 습하고 더웠다.

라희는 현재 입고 있는 약간 도톰한 긴소매 티셔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공항을 이동하느라 움직였더니 벌써부터 등에 찐득한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 옷으로 여기서 버티는 것은 무리였기에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싱가포르에서 며칠 정도 머무른다고 계획을 짰으면, 완전히 고생했을 거다. 옷을 죄다 여름옷으로 새로 사 입어야 할 테니까. 라희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이곳 싱가포르가 아니었다.

어제 유진을 만나 조건을 듣기 전, 모텔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모니터에 매달려 있을 때부터 라희는 해외로 나간다는 가정하에서 어디로 갈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일단, 그나마 할 줄 아는 언어는 영어. 평범한 대학생이 그렇듯, 그간 토익공부에 열을 올려서인지 간신히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의사표현 할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물론, 지난번 두바이에 갔을 때처럼 이국적인 악센트가 섞인 곳에서는 그나마 반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영어 외에 다른 언어라고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불어였다. 불어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야말로 시간 때우기였을 뿐 기억나는 말이라고는 자기소개 말과 꼬망 딸레브, 메르시 보꾸 뿐이다. 그나마 메르시 보꾸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발음이 멸치볶음과 비슷하다며 비웃던 반친구의 우스갯소리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라희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주요 국가는 당연히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였고 아시아권인 필리핀, 싱가포르도 리스트에 넣어 두었다.

하지만, 유진의 조건에 따라, 그중 미국은 제외되었다. 미국에는 바흐, 그가 있으니까. 라희는 무시무시한 위약금 2억을 뇌리에 새겨 넣었다. 그럴 일이야 절대 없겠지마는, 혹여 바흐를 스쳐 지나간다거나 우연히 만나더라도 절대 먼저 반응하지 않기 위해 바흐를 떠올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2억이 떠오르도록 연상해서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을 제하고 남은 국가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영국. 호주에는 미라가 워킹 홀리데이로 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갈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미라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미라의 기억 속의 라희 모습은, 바흐와 계약하기 전 순수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일 테니까. 그러므로 호주는 껄끄러워서 제외.

호주 옆 뉴질랜드는 목가적인 곳이라 들어서 살짝 호감이 갔었다. 하지만, 인구수가 너무 없어서 제외. 고작 500만명 밖에 살지 않았다. 쥐 죽은 듯 흔적을 지우고 지내려면 일단 사람들에게 섞여 들어가야 하는데 그정도 적은 인구수에서 한국인이 눈에 띄지 않기란 무리다.

더불어 아시아권인 필리핀은 여자 혼자서 지내기에는 치안이 불안해 보였고, 싱가포르는 너무 좁았다. 노트 위에 적힌 싱가포르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북북 엑스 표를 치던 라희는 뿔테가 자취방 앞에서 보았다고 말해 주었던 검은색 에쿠스를 떠올렸다. 바흐에게는 넘치는 돈과 인력이 있었다. 싱가포르같이 좁고 디지털화 된 최첨단 도시에서는 당연히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 외 캐나다는 비록 땅덩어리가 넓다고 해도 미국과 국경을 맞댄 지척이라 안될 것 같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한곳밖에 없었다.

영국.

영국은 역사가 유구한 나라답게 최첨단 디지털 국가가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아날로그적이라 들었다. 특히 시골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고 했다.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이라면 지내기 무리 없지 않을까. 말도 잘 통할 테고.

결국, 라희의 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 때문에 그렇게 쉽게 목적지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라희는 일단 아시아 허브공항이라는 창이 공항으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을 구입했다. 싱가포르에 입국한 것처럼 섞여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인천 공항 출입국 기록에는 싱가포르로 출국했다고 나올 테니까.

그 뒤, 인터넷으로 싱가포르 발 영국행 비행기 표를 따로 구매했다. 항공사는 다르게 변경했다. 귀국편은 영국발 인천으로 구입해 두었다. 귀국 표를 사둔 것은 조금 찜찜했으나, 영국은 출입국 심사가 까다로워서 관광비자를 최대인 6개월로 받으려면 리턴 항공권이 필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따로따로 편도 비행기 표를 사는 것보다 왕복으로 비행기표를 사는 편이 훨씬 돈이 적게 들었으나, 적은 돈을 아끼기보다는 안전하게 흔적을 감추는 데 주력했다.

엄마에게는 인천 공항을 떠나기 전 전화 걸어 대충 변명해 두었다. 학원 원장 소개로 해외에서 잠시 일을 하기로 했다는 등의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목적지는 미국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국내가 아닌 해외라면 이름은 어디든 상관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나마 친숙한 지명이 안심될 것 같아서였다. 당장은 연락할 수 없다고, 나중에 그쪽에서 자리 잡으면 연락하겠다고 말해 두었다.

라희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폈다. 출국 전 면세점에서 구입한 전자 손목시계다. 이제 진짜로 움직여야 될 시각이었다. 휴대폰을 해지해서 로밍되지 않는 만큼, 시간을 지각하려면 시계가 필수였다. 아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튼을 조작해 현지시각으로 설정해 두었다.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정에 인천에서 출발해 새벽 5시 조금 넘어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6시간 남짓한 비행. 싱가포르와 서울은 1시간여 시차가 있다.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1시간 느리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비행기를 탈 시간이었다.

출발 시각은 앞으로 2시간 후, 런던 히드로 행 비행기를 타고 여기를 떠나면 된다.

처음 계획 시에, 싱가포르에서 며칠 머물까도 생각했었지만, 싱가포르라는 도시에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그만뒀었다. 인터넷 검색해 본 결과 싱가포르는 서울과 비슷했다. 아시아권 대도시이고, 국제도시다. 별 특색이 없었다. 실지로 이곳에 와서 보니 예상과 달리 이국적이고, 색달랐지만 너무 날씨가 더웠다. 낙엽이 흩날리는 쌀쌀한 가을에 겨우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여름 날씨라니.

잠시 공항 대기실에서 앉아서 쉬던 라희는 다시 몸을 일으켜 티케팅을 하러 항공사 카운터로 다가갔다. 수화물을 부치고, 손에 런던행 비행기 표를 받아들었다.

손에 든 짐 없이 핸드백만 달랑 맨 가벼운 몸으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서, 보안구역 내로 들어왔다. 이곳에서도 와이파이는 무료였다. 다만 밖과 다른 점은 안내 데스크에서 패스워드를 따로 발급받아야 했다. 실내에 심어진 나무 근처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탑승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연못으로 다가가 금붕어를 구경하기도 했다. 8시가 넘어가자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항 내부가 붐비기 시작했다.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 게이트 앞 벤치로 이동했다. 커다란 통 창밖에 대기 중인 비행기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타국의 낯선 공항에서 맞는 아침은 색달랐다. 소리 없는 분주함으로 사람들이 오갔고, 쉴새 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긴 활주로를 벗어나 하늘로 떠오른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설렜다.

라희는 저 먼 하늘 너머로 멀어져가는 비행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라희에게는 이번이 세 번째 해외 여행이었다. 처음은 고등학교 단체 수학여행, 그리고 바흐와 두바이 여행, 오늘은 혼자. 생각해 보니 혼자 비행기를 타고 여행 하는 일은 또 처음이었다. 바흐와 여행 갔을 때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이번 여행 준비를 하다보니 세세한 것까지 전부 주의를 기울여야 해서 힘들었다. 그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영어는 간신히 상대방의 의사를 알아듣는 수준에 그쳤기에 앞으로 어쩌나 하는 막막함이 앞섰다.

라희는 손에 들린 비행기 표를 살폈다. 이코노미, 런던.

이코노미석에 대한 감상은 고속버스 좌석과 비슷하다는 것 뿐. 그다지 답답하거나 비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측이 아닌 통로 쪽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통로 쪽은 바깥으로 몸을 기울이거나 발을 내밀 수 있었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있어서인지 창가 쪽 보다 편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싱가포르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런던에는 오후 늦게 도착하게 된다. 순수 비행시간만 14시간 걸리는 거리였지만 시차 때문에 당일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런던에 도착해서 머물 곳은 일단 민박집으로 잡아 두었다. 호텔은 투숙객 정보가 남으니까. 되도록이면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한인 민박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박을 제외하면 호스텔인데 런던의 호스텔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았다. 특히 남녀 혼숙인 호스텔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인 민박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중에서 특히 여성전용 민박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가려는 A민박집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1인 독방이 있다는 거. 몸도 마음도 지쳐서,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진과 블로그 후기를 보니 독실이긴 했지만, 매우 좁아서 침대만 달랑 들어가는 고시원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호감을 가지고 살펴보니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하루 숙박비는 40파운드, 한국 돈 7만 원가량이었다.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일주일 예약을 완료한 상태였다.

언제까지 민박집에서 머물지는 몰랐지만, 하루 숙박비 7만 원은 상당히 부담되는 금액이다. 30일이면 순수 숙박비만 210만 원이기에, 상업적인 숙박 시설 외 달리 머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홈스테이와 플랫 쉐어가 있다. 홈스테이는 하숙과 같은 개념인데 반해 플랫 쉐어는 조금 복잡했다. 쉽게 말해 공동 자취였는데 디파짓이라는 보증금도 미리 내야 했고 공과금도 따로 계산해서 지불해야 했고 모든 음식을 직접 해결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컸다.

학생이 아닌 이상, 기숙사는 제외이니 어쨌든 앞으로 하숙과 자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Attention passengers : Flight XXX to London will be departing shortly."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라희의 귓가에 탑승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 게이트 앞을 보니 이미 탑승 수속이 시작되고 있었다.

라희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 올랐다. 훤한 낮이라서 비행기 창 아래 보이는 아기자기한 도시 모습에 신기했던 기분도 잠시, 누적된 피로로 잠이 마구 쏟아졌다. 숨 가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인천에서 싱가포르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했기 때문인지,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잠은 정말 솔솔 잘 왔다. 중간에 기내식 두 번을 먹으러 깬 것을 제외하고는 세상 모르게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니 밝게 웃고 있는 승무원이 보였다.

"Welcome to London, Miss Song."

승무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객들로 가득했던 비행기 좌석들은 어느덧 비어있었다. 라희는 핸드백을 챙겨서 비행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히드로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답게 혼잡했다.

영국.

라희는 숨을 깊이 들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챕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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