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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이었다. 뿔테에게 전화 거는 일.
숨죽인 귓가에 전화선을 타고 느리게 흐르는 신호음이 들렸다. 수화기를 든 라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대형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7시도 넘은 시각. 20분 마다 출발하는 도심 공항 리무진 버스 막차는 8시.
확실히, 오늘 할 이야기가 지난번 했었던 말의 반복이라 해도, 전화상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네는 일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차 시각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이리저리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라희는 머릿속 주절거리는 변명들을 치웠다.
힘없이 내려 뜬 라희의 시선이 바닥에 머물렀다. 뿔테가 바흐와의 실질적 만남의 이유였던 돈에 대해 알아버린 이상, 그와 마주 보고 차분히 이야기 나눌 자신이 없었다.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 짙은 한숨만큼이나 길게 울리는 신호음은 계속 이어졌다. 평소라면 이 정도 신호음이 가도록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바로 끊어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마지막이니까를 되뇌며 전화기를 들고 기다렸다.
이내, 신호음이 가다가 뚝 끊기고, 건너편에서 전화를 수신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조용한 실내는 아닌 듯했다. 길거리나 바깥 같았다.
"네. 정선우입니다."
낮은 목소리. 여보세요, 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전화를 받는 모습이 라희에게는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바흐도 자신의 이름을 대며 전화를 받았던 거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이렇게 되나?
"말씀하시죠."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뿔테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자 라희는 말문이 턱 막혀서 대답 대신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
이쪽에서 계속해서 아무 말 없자, 그는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이상하지,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침묵뿐이 괴상한 전화는 주저 없이 끊었을 텐데. 뿔테는 짜증도 없이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라희는 공중전화기 밑에 매달린 단단한 메탈 선을 손가락 끝으로 느리게 따라 그리다가 그냥 이대로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망설였다.
"........."
전화선을 타고 밀도 높은 침묵이 오갔다. 뿔테는 상대방의 침묵에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젠 실내로 이동했는지, 그쪽에서부터 작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기에, 라희는 목구멍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짧은 한숨을 모아 가두고 천천히 억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애먼 아랫입술만 비틀어 깨물었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사이, 공중전화기의 요금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라희는 바닥을 향했던 눈을 들어 올려 저 멀리 보이는 벽에 걸린 대형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라희는 좀처럼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다잡으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아래로 내리 떴다. 내려뜬 시선 아래,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저에요. 선우 씨."
한동안 입을 닫고 있어서였는지, 살짝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희는 작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뿔테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건네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어색했고 나름 용기가 필요했다.
"응. 알아. 자기야."
나란 것을 알고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대답에 라희는 할 말도 잊고서 깜짝 놀랐다. 이내, 좁혀진 라희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공중전화 발신 번호 때문에? 이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
"조금 전 자기 집에 들렀다가, 문이 활짝 열려있길래 기뻐하며 달려갔더니 처음 보는 주인아주머니께서 빈 방을 청소 중이시더라. 오늘 방 뺐다 들었어. 아주머니 폰으로 자기에게 전화 걸어보니 없는 번호로 나오던걸.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어쩐지, 기다리고 있으면 전화해 줄 것만 같아서.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공중전화로 전화할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지만."
뿔테는 서운한 말투로 투정하듯, 하지만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라희는 지금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입안이 깔깔하다.
"저, 오늘 이사했어요. 아시다시피, 휴대폰 번호도 새로 바꿨구요."
버석하게 마른 목구멍에서 담담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짓말이지만, 굳이 그에게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태연하게 말하기 위해 음절 음절 힘이 들어갔다.
아래로 향한 시선은 이리저리 미끄러졌다. 오늘 출국에 앞서 뿔테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던 이유는, 지난번 해외로 여행 갔을 때처럼 혹시나 그가 마냥 기다릴까 봐서였다. 이제 떠나면,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기에 부질없는 시간 낭비, 감정 낭비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어디로? 서울이지? 지금 어딘데?"
뿔테의 질문이 빠르게 쏟아졌다.
"라희야?"
라희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모순되게 느껴졌다. 지난번 그렇게 할 말도 할 이야기도 없다고 싸늘하게 자르듯 말해 놓고서 이렇게 전화를 걸다니. 그냥, 전화하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저번처럼 술 취한 그가 주변에 민폐를 끼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서라고, 라희는 애써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피식, 입꼬리가 설핏 들어 올려지면서 서늘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삐딱하게 자조하던 라희는 눈을 들어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 할 말을 마치고 끊어야 했다.
"우리, 그날 끝난 거에요. 선우 씨 좋은 사람이니까, 다음번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요. 그 말 하려 전화했어요. 그럼."
오늘 뿔테에게 전화를 건 것은, 이를테면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간 바쁜 일과 동안 단 몇 초 간의 시간이라도 내 자신를 떠올려주고 안부를 물어 물어준 사람에 대한.
한강에서 그가 말 해준, 신경 쓰이고, 눈에 밟히고, 머리에 남고, 마음에 걸렸다던 그 말. 진창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나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구나 하고, 한 가닥,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하얀 솜털 같은 위안으로 남았다.
"라희야!"
전화기 너머 들리는 그의 외침을 외면하고 라희는 공중전화 거치대에 수화기를 올려 놓았다. 이내 탁, 탁, 탁, 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넉넉히 넣어두었던 남은 동전이 아래 동전 반환구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희는 시선을 내려 공중전화를 멀거니 응시했다. 먹먹했다. 뛰고 있는 가슴 위로 얕은 호흡이 오갔다.
아마, 뿔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은 조금 더 단순 했을 거다. 그리고 바흐와의 관계를 마냥 받아들였을 거다. 그는 돈을 주고, 나는 몸을 건넨다. 이 단순한 교환에 별다른 환멸이나 거부감의 내색 없이 계약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을테지.
아니, 개도 밥 주는 사람을 따른다고, 넉넉하게 돈을 건네는 바흐에게 완전히 길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달콤한 사탕에 이 썩는 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차츰 돈맛에 중독되어 뼛속까지 돈에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겠지.
라희는 냉소적인 눈빛으로 공중전화를 응시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유진이 바흐에게서 떨어지라 돈을 건네도, 이렇게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차라리 바흐 곁에 남아 어떻게든, 돈 많은 그를 구슬렸겠지. 그가 사준 명품들을 몸뚱어리에 훈장처럼 칭칭 휘감아 두르고 그가 건네는 돈을 애정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후......"
스스로의 처지가 일깨워지자, 목구멍에서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망연하게 서 있던 라희는 묵은 먼지를 털어내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진득하게 엉겨붙은 생각들을 털어냈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려 저 멀리 보이는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시선을 내려 잠시 발밑을 내려다 보던 라희는 등을 펴고 허리를 세웠다. 발아래 질퍽거리던 진창을 벗어날 시간이었다. 단단하게 발목을 옥죄어 왔던 계약이라는 족쇄도 이젠 없다.
"........."
마른 숨을 내 쉬던 라희는 몸을 돌려 공중전화 부스를 벗어났다. 주먹을 꽉 말아쥐고서, 리무진 버스 승강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