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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액정 화면 위 선명히 보이는 1억이라는 숫자는 보고 봐도 낯설었다.
모텔에서 머물던 시간 내내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보았지만, 막상 닥치게 되니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머리가 핑핑 울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라희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덮고 코트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침착하자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라희는 마른침을 삼킨 후 깊게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쉬면서 가슴의 떨림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유진이 했던 말과, 며칠 동안 매달려서 작성했던 메모를 떠올렸다.
유진과의 계약을 이행하려면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할 일 목록을 상기하자 이성을 차린 두뇌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청담동에서 벗어나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일단 투숙했던 모텔로 돌아가 모든 짐을 챙긴 뒤,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원룸 건물 1층 우편물 함에는 나흘 전 엄마에게 전화 걸어 부탁했던 우편물이 도착해 들어 있었다.
라희는 하얀 봉투를 열어 속에 든 딱딱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마스터 카드.
해외에 나가는 것을 고려했기에, 신용 카드가 필수였다. 라희는 학생 신분이라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기에 엄마의 휴면 카드 중 마스터나 비자 로고가 있는 것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었다.
카드를 손에 든 라희는 카드 뒷면에 적혀있는 콜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개인 정보를 꾹꾹 눌러 본인 확인을 마친 후, 상담원과 연결되어 카드 결제계좌를 자신의 계좌로 옮겼다. 타인 명의로 결제 계좌를 옮기는 작업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몇 번의 전화 통화와 ARS 확인 끝에 겨우 변경신청을 완료했다.
"후..."
계획 했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라희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침착해야 한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미간을 좁히던 라희는 모텔에서 공들여 작성한 메모를 꺼내 주의 깊게 살폈다.
플랜 A. 돈을 받게 될 경우, 할 일 목록이 차례로 쓰여있다. 라희는 리스트에 적혀진 대로 일을 처리해 나가기로 했다. 일단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앱을 실행시켰다. 목록에 줄줄이 적힌 작업 몇 개를 차근 차근 처리하고 난 뒤, 택배 회사와 원룸 주인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메모를 들고 손가락으로 목록을 짚은 라희는 K은행에 들렀다가 핸드백에 신분증과 필요 서류를 챙겨 들고 삼성동 C 은행으로 향했다. 외국계 은행인 C 은행에서, 해외여행 필수라는 국제현금카드를 만들었다. 번거롭게 일일이 환전할 필요 없이 그때그때 현지 달러를 ATM으로 뽑아 쓸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희는 C 은행의 창구에 가서 새 계좌를 신청하고 국제현금카드 발급 신청서를 작성했다. 은행 내부는 한산해서 짧은 기다림 끝에 푸른색 체크카드 두 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국제현금카드는 해외 여행 중 분실이 빈번해서 아예 처음부터 분실에 대비해 2장이 발급된다. 카드가 실제 사용이 되는지 ATM으로 가 확인까지 마쳤다.
용무를 마치고 C 은행을 빠져나온 라희는 핸드백에서 빳빳한 종이 서류를 꺼내 펼쳤다. 그동안 옷장 깊은 곳에 넣어 둔 채 한번 들여다보지 않았던 서류. 바흐와 함께 서명한 계약서.
손에 쥔 계약서를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등골이 쭈뼛 긴장되었다. 미간을 좁히며 한참을 손에 든 서류를 주의해 살펴보고 있으니 입술이 말라 오는 것 같았다. 라희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현재 계약 당사자가 부재중이니 계약서 맨 하단 부분에 명시된 XXX변호사를 찾아가야 했다. 휴대폰으로 변호사 이름을 검색하자, 바로 근처 삼성동에 XXX변호사 사무실이 나타났다. 라희는 깊은숨을 몰아쉬고서 화면에 적혀 있는 주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이 밀집된 오피스 건물 가운데 위치한 XXX 변호사 사무실은 한가했다. 사무실 현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30대 초반의 사무장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느냐고 정중히 물었다. 라희가 머뭇거리며 계약서를 내밀자 사무장은 계약서를 뒤적이며 내용을 주의 깊게 확인했다. 이내, 사무장의 안내로 업무실에 앉아 있던 변호사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라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변호사에게 미리 찾아 둔 6500만원의 수표를 건넸다. 변호사는 즉시, 수표를 받고서 채무변제 영수증과 변호사 날인이 들어간 확인서를 건네주었다. 막상 손에 영수증과 확인서를 받아들자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겨우 떨리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라희는 핸드백 속을 뒤적여 메모지를 들고 리스트를 확인했다. 이제 할 일은 절반가량 남아있었다. 리스트 중간에 적혀 있는 대로, 라희는 가까운 우체국으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우체국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코트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라희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화면 위 떠 있는 번호를 확인했다. 낯선 번호. 전혀 모르는 번호로 아주 길었다.
000-1-212-0000...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라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이내 붉은색 통화 종료버튼을 꾹 눌렀다.
쿵쿵쿵.
심장이 귀벽에 박히기라도 한듯 요란하게 머릿속을 울렸다.
국제 번호.
망막에 새겨진 긴 번호로 인해 심장이 거칠게 뛰어 머릿속이 아득했다.
라희는 떨리는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 잘게 떨고 있는 손을 맞잡았다. 손과 손가락을 주물러 정신을 가다듬고서, 휴대폰 웹으로 수신 번호를 검색했다. 국가번호 1은 미국, 그리고 지역번호 212은 뉴욕이라고 나왔다.
바흐.
라희는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머릿속에 2억이라는 숫자가 아른거렸다. 손끝이 하얗게 될 때까지 주먹에 힘을 쥐고 서 있는데 다시 휴대폰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주먹 쥔 손에 땀이 찼다. 라희는 마른 침을 꿀떡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재촉하듯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를 무음으로 돌린 라희는 다급하게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 껐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했다.
여기는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번화가다. 분명...
흔들리는 눈동자 가득 대로변에 위치한 통신사 대리점이 보였다.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 신분증을 제시하고 남은 요금을 완납한 후 휴대폰을 해지했다. 대리점 안에서 20여 분이 흐른 뒤, 서비스 불가라는 메시지가 휴대폰 액정화면 가득 뜨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대폰 등록이 필요합니다.」
기지국 등록 실패 표시가 떠 있는 표시 아래 붉은 경고 메세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 보고 있던 라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원래 향하고 있던 우체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러고 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서 서둘러야 했다.
라희는 우체국에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들고 나온 서류를 복사해 카피 본을 만든 후 바흐의 사무실 주소 앞으로 사본을 동봉해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인터넷에서 채무변제의 확실한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적혀있던 것을 참고 했다.
등기 우편물을 발송한 라희는, 은행 앱을 실행해 기존의 통장 잔액을 오늘 개설한 C은행의 계좌로 옮겼다. 앞으로 신용 카드를 결제할 얼마간의 돈을 제외하고 거의 다 옮겨 두었다. 거기까지 일을 마치고 우체국 내 소포 코너로 가서 가장 큰 종이상자 10개를 샀다. 끈으로 칭칭 동여매 길가까지 낑낑대고 들고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자취방의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옷과 이불, 약간의 책, 주방용품, 자질구레한 짐들이 전부였다. 라희는 괜히 종이상자를 쓸데 없이 많이 사서 무겁고 힘들게 집에까지 이고지고 온 것을 후회했다.
방안 짐을 모두 챙겨 포장하는 일은 한 시간 가량 걸렸다. 차곡차곡 상자에 넣어 덕트 테이프로 밀봉하니,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배어 나왔다. 손등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일 하느라 열어 놓은 창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했다. 가을이라 해가 짧아진 탓도 있겠지만, 오늘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일이 많았다.
-띵동.
기다리던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라희는 인터폰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택배 아저씨를 통해 6개의 포장된 상자를 모두 충주 집으로 보냈다. 택배비를 지불하고 나서 혼자 남은 라희는 몸을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몇 달 정 붙이고 살았던 자취방은 잔짐 없이 텅 비어있었다. 침대, 냉장고, 책상, 화장대는 아까 통화한 주인아줌마의 허락하에 그대로 남겨 두고 가기로 했다.
방안을 둘러 보던 아련한 눈빛이 문앞에 덩그러니 놓아둔 여행 가방과 짐 가방에 멈췄다. 이제 정말 끝이 나고 있었다.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고서 짧은 한숨을 내쉰 라희는 집 앞 골목의 공인중개소로 향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공인중개소의 소개로 처음 원룸을 계약했다. 공인중개소 사무실 안에는 건물 주인 아주머니가 와 계셨다. 임대차 계약 기간은 1년.
원칙대로라면, 남은 계약일까지 월세를 전부 지불해야 하지만 이곳은 강남이고 공실률이 낮으니, 학생인 거 같아 우선 편의를 봐주겠다며 두 달 치 월세만 추가 지불하고 나가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라희가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닌 거 같아 아직 청구되지 않는 공과금과 두 달 분의 월세를 주인아주머니께 내밀고 공인 중개소를 나왔다.
라희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짐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에 여행 가방을 들어 챙겼다. 짐이 없어 휑한 원룸을 보니 감상이 남달랐다. 바흐와 계약하며 집을 옮긴 이곳. 오늘을 끝으로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하는 후련함이 들었다. 원룸 키를 우편함에 넣어두고 나온 라희는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했다.
"삼성역 도심공항터미널로 가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라희는 도심 공항 터미널에 들어가 1층에서 발권과 탑승 수속,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출국 심사까지 마쳤다. 오늘 밤 자정에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손에 받아드니 새삼, 출국이 실감 났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5시간 남짓.
벽에 걸린 리무진 버스 시간표를 눈여겨보던 라희는 서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거 같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신 거부 목록에 적힌 번호를 중얼거리던 라희는 몸을 돌려 한쪽 벽에 나란히 늘어선 공중전화박스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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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