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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LCD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했다. 몇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눈알이 뻑뻑했다. 손바닥으로 피로한 두 눈을 지그시 눌러 비비다가, 몇 번 깜빡였다. 그러다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의 글자가 흐릿해 보였다. 이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뻐근한 뼈마디를 풀려 스트레칭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아직도 낯선 공간이 눈 안 가득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둥근 침대, 투명 창 너머 훤히 보이는 욕실, 그리고 침대 옆 아치 모양의 둥근 간이 소파와 테이블. 라희가 머물고 있는 곳은 모텔이었다. 여기서 지낸 지 벌써 나흘째.
누구의 방해도 받기 싫었고, 누구와도 만나기도 싫었다.
라희는 탁자 위 휴대폰을 켜서 확인하고서 짧은 숨을 내 쉬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희는 터벅터벅 걸어 욕실로 향했다.
바흐의 오피스텔에서 유진을 맞닥뜨린 후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 여행용 가방을 손에 들고 급히 짐을 챙겼다. 루이비통 핸드백 속 돈과 통장, 휴대폰 충전기, 간단한 생필품과 옷가지를 챙겨 들고 집 건너 강남대로 맞은편 이곳 모텔에 투숙했다. 숙박비 하루 6만 원. 월풀 욕조에 둥근 원형 침대, 컴퓨터까지 완비한 최신 모텔이었다.
투숙 첫날은 침대에 웅크리고 잠만 잤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밤사이 악몽에 시달릴 줄 알았는데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푹 자고 일어난 다음날부터 라희의 하루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때때로 휴대폰을 살피다가, 컴퓨터를 하며 모니터 화면만 줄곧 들여다보았다.
편의성을 중시한 모텔은 생각보다 쾌적했고 별다른 소음도 없어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배가 고파지면, 식사는 모텔의 맞은편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했다. 먹기 간단한 샌드위치, 삼각김밥, 우유, 라면, 캔커피 따위였다.
라희는 입에 음식을 물고 모니터를 살피며 정보 검색에 몰두했다. 중간에 눈이 피로해 지면 탁자 위 핸드폰을 켜 확인했다. 몇 번인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긴 했으나 받지 않았다. 수신 거부 해 놓은 뿔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전화라면, 응답이 없을경우 답답한 발신자가 문자를 보내기 때문에 문자 수신을 기다렸으나, 모텔에 투숙한 이래 수신된 문자 메시지는 없었다.
"음.. 여기. 호스텔. 주소가.."
라희는 인터넷을 보다가 기억해야 할 정보가 보이면 편의점에서 구입한 펜과 노트로 깨알 같은 메모를 남겼다.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어서 하루 중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머리을 비우고 정보 수집에만 열을 올렸다. 그러다 눈이 피곤하거나 몸이 지치면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감았다.
모텔 투숙 나흘째가 되자, 과연 이유진이 돈을 보낼 마음이 있는 건가 하는 의심과 함께 조바심이 들었다. 1억. 선뜻 남에게 건네 주기에는 아주 큰 돈이다. 특히나 꼴도 보기 싫은 내연녀에게 건네기에는 더더욱.
만약, 그녀가 돈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난 사흘간 꼬박 계획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라희는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아 불안감을 달래려 손톱 끝을 잘게 깨물었다. 그러면서 내내 눈은 모니터에 고정했다.
하루종일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어도, 정작 복잡한 머릿속은 쉬이 비워지지 않았다. 무의식 중에 바흐와 보냈던 시간들을 반추하다, 복잡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면 당장 모든 것을 그만 두고 뉴욕으로 달려가 바흐를 대면해 묻고 싶었다.
현재 가정한 이 모든 것이 진정 사실인 것인지.
대체, 왜 그랬는지.
왜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라희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소모적인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질한 기운에 눈을 내려 아래를 보니 무릎 위 애먼 손톱 끝만 잘게 뜯겨 하얗게 일어나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텔에 투숙한 지 닷새째 날 아침,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몇 번 울리더니 띠링, 문자 수신음이 들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온 문자가 액정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유진이에요.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라희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흐르고 이내,
"여보세요."
유진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상 들리는 목소리에 라희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리있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문자 보고 연락드렸....."
라희가 말꼬리를 흐리자 유진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우리 만나죠. 음, 지금은 일하는 중이라서, 시간 내기 애매하네요. 이따가 청담동으로 올 수 있어요? 1시에 카페 마당에서 봐요."
네, 라고 짧게 대답하자 달깍, 전화는 바로 끊겼다. 카페 마당? 낯선 이름이었기에 라희는 인터넷으로 카페 마당을 검색했다. 청담동 도산공원 근처에 있었다. 라희는 시간 맞춰서 준비하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식사와 음료를 파는 카페 마당은, 속칭 에르메스 카페라고 불렸다. 청담동 메종 에르메스 매장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북카페였다.
에르메스 매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직원의 안내로 지하로 향하는 원형의 소라 고동 같은 계단을 내려가니 조금 침침한 조명의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매장 인테리어는 모던한 스타일로, 한쪽 벽 끝은 서재 같이 책꽂이로 장식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은 통유리로 뻥 뚫려 있었다. 세련된 인테리어, 나지막한 음악, 차분한 느낌의 조명으로 제법 인기가 있는 장소인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의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카페 직원의 안내에 따라, 라희는 구석 창가에 위치한 유진에게 안내되었다. 유진은 예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차려 입고서 쭉 뻗은 팔다리를 뽐내며 홀로 우아하게 식사 중이었다. 흰 테이블 보가 깔린 사각 테이블 위로 화려한 접시의 시저샐러드와 요거트 푸딩, 그리고 클럽 샌드위치가 놓여있었다.
라희가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가자 유진은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어요. 점심시간인데, 같이 식사할래요?"
하얀색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가를 훔치며, 건조하게 건넨 말에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어색한 상황에서 사이좋게 유진과 앉아 식사할만큼 비위가 강하지 않았다.
달깍, 묵직한 에르메스 나이프가 하얀 테이블 매트 위에 놓였다. 라희의 눈에 잡지에서나 보았을 법한 화려한 문양의 에르메스 식기와 특이한 모양의 포크와 나이프가 보였다. 에르메스 매장 지하에 위치한 카페인 만큼 식기나 커트러리(Cutlery) 모두 에르메스 제품으로 서브되는 모양이었다.
"앉아요."
자리를 권한 유진은 고개를 빳빳이 들어 턱을 올리고 맞은편 앉은 라희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형식적으로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숙한 듯 예의상의 미소를 입가에 짧게 떠올린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 큰돈을 건네기에 앞서, 라희씨와 직접 만나야겠더군요."
돈.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라희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얕은 호흡을 억누르며 내쉬던 라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유진은 라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를 올려 다시 사교적 미소를 짓더니 옆에 놓아둔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유진의 휴대폰이 테이블 한가운데 놓였다. 액정 화면을 깨워 녹음기능을 활성화 시킨 그녀는 라희를 향해 싸늘히 입을 열었다.
"실은, 녹취가 필요해서 라희씨를 이자리에 불렀어요. 요즘 세상은 각박해서 뭐든지 확실해야 안심이 되니까요. 차후 법적인 자료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동의가 들어가야 한다더군요. 허락 하에 녹음을 시작할 거에요. 녹음이 끝나면, 바로 라희씨 계좌로 돈이 입금 될 거구요."
유진은 테이블 가운데 놓인 휴대폰을 조작해 은행 앱을 실행시켜 1억의 계좌 이체 버튼이 화면에 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의하느냐는 무언의 눈초리를 보내자, 라희는 가만 굳어있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녹음을 하든, 안 하든 큰 상관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까지 유진이 연락 없었던 이유가 돈이 준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잡다한 것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느라 그랬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은 휴대폰 녹음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 위로 녹음 중인 것을 알리고 있는 붉은 등이 켜지고 시간을 표시하는 초 단위 숫자부터 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진은 휴대폰을 향해 녹취를 시작한다고 언급하고 녹취 당사자들의 이름과 오늘 날짜 그리고 시간을 차례로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어투로 거기까지 서술하듯 말을 마친 뒤, 라희 향해 입을 열었다.
"돈이 입금된 이후로, 일절 그쪽에서 연락도 하지 말고, 진욱에게서 연락을 받지도 마세요. 사는 집도 흔적 없이 옮기고, 휴대폰도 해지하세요. 진욱과 관련된 모든 연결 고리를 끊길 바라요. 그정도는 기본인 거, 인지하고 있겠죠?"
라희는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녹취 중이니까. 대답은 예, 아니오로 해주세요. 증거 자료로 쓰이기 위해서는 의사가 명확하게 표현되고 뜻이 명료해야 한다더군요."
유진이 덧붙임에 라희는 소리 내어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유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입매 끝을 습관적으로 끌어올리며 라희를 향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물론, 라희씨가 앞으로 어련히 잘하겠지만, 노파심에서 말이 나오네요. 당분간 국내를 떠나있는 게 어때요? 아니, 국내를 잠시 떠나는 것이 조건이라고 해 두죠. 몇 달간이라도 대한민국을 떠나 주었으면 해요. 금액이 금액인 만큼 이 정도는 요구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되는군요. 라희씨 남자친구가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기간은 길면 길수록 좋구요."
남자친구? 뿔테를 말하는 건가. 라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방금 유진이 내건 조건은 어쩐지 나영과 둘이서 고민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라희와 뿔테가 엮이길 희망하지 않는 나영에게도 좋은 조건이니까.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뿔테를 굳이 엮어 넣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모텔에서 머문 지난 나흘간, 라희도 해외에 나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엄마, 오빠, 뿔테, 바흐. 처한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라희의 표정을 가만 들여다보던 유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설마, 해외라고 미국 이런 곳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지금 진욱이가 어디 있는 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유진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미국을 제외하고 일본, 중국 등 국내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도 아니었으면 해요."
"알겠어요."
라희는 짧게 대답했다. 유진은 녹음 중 표시가 뜬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 이유진은 송라희 씨에게 금 1억 원을 건네겠어요. 한진욱 씨와 모든 연락을 단절하는 조건이죠. 우리 금전 거래 내역은 계좌에 남아있을 테구요. 만약, 우리가 약정한 내용이 지켜지지 않으면 통상의 계약파기 위약금으로 물도록 하죠. 두 배. 어때요? 물어 찾아보니 정확한 법률적 문장은 이렇게 되더군요. 계약을 정당한 이유 없이 파기할 경우 그로 인한 손해액은 계약금의 두 배로 한다."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배? 위약금이 이 억이라고?
"만약, 제 의도와 상관없이 그와 연락이 된다면요. 그건 조금 억울할거 같은데요. 위약금 2배는 제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거 아닌가요. 이유진씨."
녹취를 의식해서 라희는 그녀의 성과 이름을 함께 불렀다. 유진은 한동안 테이블 정 중앙의 휴대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더니, 다시 눈을 들어 올려 라희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말은, 한진욱 씨가 송라희 씨를 찾아 연락할 거란 말이에요?"
유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송라희 씨만 잘 처신 한다면, 한진욱 씨가 먼저 연락할 일 없을 거에요. 라희씨가 이번 계약에서 지킬 내용은 간단해요. 정리해보자면, 첫째, 소재를 감춘다. 즉. 주소지를 바꾸는 것이 되겠죠. 둘째, 연락 수단을 없앤다. 대표적으로 휴대폰 해지가 있겠죠. 셋째, 몇 달 정도 해외에 나가 있는다. 미국과 일본, 중국은 안 돼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넷째, 한진욱 씨로부터 오는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 만약, 진욱이가 연락을 취해 오더라도, 라희씨 쪽에서 응하지 않으면 되겠죠?"
잠시 말을 멈추고 맞은편 라희의 굳은 표정을 살피던 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 객관적으로 위 사항을 위반했다 판단될 경우 위약금으로 이유진에게 2억을 지급하면 돼요. 가령, 한진욱에게 먼저 어떠한 형태로든 연락한다거나, 진욱이가 만남을 요청했을 때 응한다던가 하는 정황이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죠. 어쩌다 우연히 길가다 한 번 스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두 번 이상의 지속적인 만남은 라희씨가 계약을 위반했다는 뜻이 돼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잖아요?"
라희는 잠시 망설였다. 계약금 1억은 받기로 했을 때는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막상 계약 파기 위약금 2억이라는 말에는 겁이 덜컥 났다. 라희에게는 1억도 간 떨리게 큰 금액이었다. 만약, 바흐에게 연락하거나 그와 반복적인 만남을 가진다면 이유진에게 2억을 지불 해야 하다니.
라희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고정하고서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위약금 2억이라는 말에 몹시 망설여졌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지레 겁먹을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 일은 모르는 거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으니까. 라희가 먼저 바흐에게 연락할 일은 없다는 것.
"위 모든 사항에 동의한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앞서 말한 대로 난 계좌이체 버튼을 누를 거에요. 동의하나요?"
유진은 자신의 팔에 걸린 보석 박힌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실지, 라희씨만 똑바로 처신한다면 지금 녹음되고 있는 녹취를 공적으로 사용할 일도 위약금을 지불 할 일도 없겠죠."
말을 마친 유진은 차갑게 라희를 노려보았다. 라희는 쏘아지는 그녀의 시선을 비켜 시선을 낮췄다. 테이블 위에 붉은 등을 빛내며 녹음 중인 휴대폰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 라희는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었다. 한쪽 길은, 그동안처럼 앞으로 남은 10개월 동안 한진욱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서 그가 하자는 대로 그의 뜻대로 행동하는 거다.
그리고 다른 한쪽 길은, 자유였다. 다만 한진욱과 일절 연락하지 않는다는 제약 조건이 있었다.
자유와 속박. 바흐에게 쥐여있느냐, 바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느냐. 두 가지 갈림길.
앞으로, 바흐와 연락을 끊으면 된다. 모든 악몽을 잊고,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는 거다. 만약 지금 이 동아줄 같은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바흐에게 5천만 원을 갚아야 하거나, 갚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유진에게 간통으로 고소당하겠지.
간통에 생각이 미친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간통죄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그간 모텔에 틀어박혀 인터넷을 뒤져 최근 법률 시류를 들여다보니, 요즘 추세는 이혼이 필수인 간통으로 고소하지 않고, 내연녀만을 대상으로 상간녀 위자료 청구소송을 한다고 했다. 그것도 교묘히, 남편이 상대에게 흥미가 사그라질 무렵에 타이밍 맞춰서 소송이 들어온다지.
형사가 아니더라도, 법적으로 민사 재판 기록이 남고 몇 천만 원에 해당하는 위자료도 지급해야하는 이중고가 된다 했다. 관계 끝에 상대 남자로부터 버림 받고, 위자료와 불명예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셈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가치도 없었다. 머릿속에 결론이 나자 라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진욱 씨와 모든 연락을 끊겠어요."
"알겠어요. 이제 이체 버튼을 누르죠."
유진은 테이블 가운데로 팔을 뻗었다. 몇 번의 조작 끝에 긴 손가락 끝으로 이체라고 쓰인 네모 버튼을 눌러 터치했다. 동시에 띠링, 라희의 코트 안쪽 휴대폰의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희는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입금 알림 문자였다. 그대로 은행 앱을 실행시키자, 이유진이 입금한 1억이 계좌에 들어와 있었다.
유진은 라희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다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유진 입금 1억, 수취인 송라희. 이체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했나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녹취를 종료할게요."
유진은 휴드폰의 녹음 정지 버튼을 눌렀다. 결과물을 눌러 음성 파일이 제대로 저장되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나서, 라희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제, 우리 앞으로 볼일 없었으면 하네요. 그렇게 기대해도 되겠죠?"
녹취가 끝났으니 굳이 소리 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라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손목시계를 힐끔 살피더니 다시 포크를 손에 들었다.
"일 하느라 시간이 촉박해서 식사하고 바로 들어가 봐야 해요. 그럼."
말을 마친 유진은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고 묵직한 포크 끝으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마치 맞은 편 앉아있는 라희는 처음 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럼."
라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벗어나 출구로 향했다. 처음 들어 왔던 것처럼 하얀색 원형의 계단을 올라 지하 카페를 벗어났다.
에르메스 매장 밖으로 나오자,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다시 은행 앱을 확인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처럼 멍해서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라희의 눈에 숫자가 보였다.
100,000,000
틀림없는 1억. 동그라미가 8개인 1억이 계좌에 보란 듯 찍혀있었다. 그것을 본 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쳤다.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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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