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76화 (7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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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의외네요."

딸깍, 유진은 소파에 앉은 라희 앞에 냉장고에서 꺼낸 투명한 붉은색 유리병을 내려놓고서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차게 식은 프렌치 베리 로리나 두 개를 비틀어 열어 지난번처럼, 아찔한 샴페인 글라스에 조르르 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귀국하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마침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번거롭지 않아서 좋네요. 시간 절약도 되고."

유진은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를 명료하게 발음했다. 지난번, 그때처럼 매력적인 음색으로 교양있게 꾸민 말투였다.

라희는 꽉 다문 입술을 지그시 눌러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때, 유진이 한 달 예정으로 뉴욕으로 간다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이번 귀국은, 예정보다 조금 일정을 앞당긴 것으로 보였다.

낭패였다. 아까, 하프시코드를 만지지 말고 그냥 이곳을 벗어났다면 유진과 이렇게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이렇게 일이 꼬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여기서 이유진을 만나다니.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그런데, 바흐는?

유진과 함께 귀국한 걸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을 털어내려 라희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 굳게 다물린 입술 끝은 유진을 앞에 두고 잔뜩 곤두선 긴장으로 잘게 떨렸다.

"들어요."

유진은 여유로운 태도로 샴페인 글라스 건네며 권했다. 집주인인 양, 안방마님다운 관록이 몸에 밴 모양새였다.

라희가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낮게 젓자, 그녀는 라희 앞에 아찔한 자태의 가느다란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탁, 대리석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 바닥이 부딪히는 단단한 소리가 어색하게 흐르는 적막을 깼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동시에 저만치 미뤄 두고 싶었던 궁금한 속이 바짝 탔다.

"진욱씨는..."

라희가 입술을 작게 달싹여 말을 꺼내다가 이내 주저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벌렸던 입은 꾹 다물렸다. 뭐라고 묻는단 말인가. 같이 귀국했느냐고? 아니면 언제 돌아오느냐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이유진에게?

"....중태세요. 고모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수술 후 며칠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 회복하시는가 싶더니 갑자기 의식이 없으셔서요. 앞으로 어찌 되실 지는 신만이 아시겠죠.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유진은 미끈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기울이며 눈썹을 살짝 올려 라희를 건너다보았다. 짐짓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가운데 선하게 날이 서 있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갸름한 얼굴 안 조금 치켜 올라간 눈매 끝 때문에 그리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네.."

지난번 술자리에서 고모에 대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초창기 바흐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신 분이라고 했지. 술자리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렴풋이 예측했던 내용이 맞았다. 뉴욕의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고모였다. 아마도, 부모님을 잃은 바흐에게 친부모 같은 존재일 터.

그는 이유진과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 이로써 답답했던 궁금증은 풀렸지만, 괜스레 꺼낸 말로 인한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투명한 글라스에서 조금씩 비워져 가는 음료와 함께 진득한 침묵이 흘렀다. 유진와 마주한 긴장으로 팽팽하게 조여진 신경이 관자놀이를 지끈거리며 찔러 왔다. 눈두덩과 뺨이 따갑다. 라희는 가라앉은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깔았다.

유진은 미동 없는 싸늘한 눈으로 맞은편 잔뜩 위축된 라희의 얼굴을 살피다가 이내, 손에 들렸던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서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늘씬한 긴 다리를 매혹적으로 꼬았다. 자세를 풀자, 그녀의 얼굴에도 느긋함이 떠올랐다.

"선우와 잘 되고 있다 들었는데요."

유진이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슬며시 좁혀진 미간은 마치 친한 여동생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속뜻은 왜 바흐의 오피스텔에 있느냐겠지. 라희의 낮게 가라앉은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소파 테이블 아래로 내리박혔다.

"집안 반대야 만만치 않겠지만, 설마, 그 정도 배포도 없이 시작한 건 아니리라 믿어요."

"..........."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나영과 유진은 말하는 화법이 비슷했다. 넌지시 비꼬아 아닌 척하며 상대방의 속을 가차 없이 벅벅 긁어낸다. 라희는 굳게 다물린 입과 턱 끝에 힘을 잔뜩 주었다. 뭐라 대꾸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진은 아무런 반응 없는 라희를 가만 건너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배우고 싶을 정도예요.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매혹의 기술을요. 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그런 유혹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미국에서도 꽤 화제였죠. 닐 스트라우스. 베스트 셀러였던 더 게임(The Game)의 저자. 자칭 픽업 아티스트라던가, 뭐, 그런 이름의 직업이었어요."

유진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래도 입을 벌리지 않겠느냐는.

"쉽겠죠? 라희씨 같은 외모라면. 순수한 듯, 가냘프고 청초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도발적인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 때문에 아슬아슬 위태로워서 흥미롭게 보이나 봐요. 물론, 어리다는 가장 큰 강점 있으니까요."

선망으로 교묘히 포장된 노골적인 경멸의 말투에, 라희는 부글부글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도 여자는 진실한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 봐요. 나 역시 이제는 남자들 모두가 갖고 싶어 안달 내며 탐내는 어린 나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떠밀려 안았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흐르니 한 줌 모래처럼 부질없게 느껴지더라구요. 정작, 중요한 건 올곧은 마음이었는데 말이죠. 지나고 보니 그러네요."

말을 마친 유진은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려 조용히 미소 지었다.

라희의 아래로 내리뜬 속눈썹이 잘게 흔들렸다. 비록 표현은 달랐지만, 의미는 같았다. 나영과 어제 만나 질리도록 들었던 지리멸렬한 그 이야기였다.

미끈한 몸뚱어리로 조건 저울질하는 여자라는 소리.

다른 점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나영이 혐오와 경멸로 내뱉은 말 위에 유진만의 고백이 덧씌워졌다는 거?

그 고해 성사 같은 독백에서, 왜 이토록 오만하고 도도한 이유진이 바흐의 내연녀인 자신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는지 어렴풋이 짐작 갔다. 과거에 잘못한 것이 있으니, 죄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굳은 입가에 피식, 냉소가 번졌다.

눈을 내리깔고서 조용히 일그러진 냉소 짓던 라희는 턱을 낮게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세련된 언어로 꽃뱀이라 에둘러 조롱하는 유진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왜 여기 가만 앉아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의문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유진과 라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지금 당장 바흐와 결혼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잘못을 들켜 꾸지람 받는 학생처럼, 대감집을 몰래 드나들다 안방마님께 들킨 첩처럼, 유진의 말을 얌전히 앉아서 경청하고 있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막말로 간통으로 고소한다 어쩐다 위협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흰소리를 참고 들을 이유가 없었다.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놀란 유진은 멋들어지게 다듬은 눈썹을 한쪽 추켜올리며 라희를 쳐다보았다. 라희는 그런 그녀를 차분한 얼굴로 싸늘히 내려다보고서, 말없이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서요."

뒤에서 유진이 불렀지만, 라희는 깨끗이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다가온 유진이 라희의 팔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놓으시죠."

라희가 굳게 닫았던 입을 열어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러자 유진은 팔목을 붙잡았던 손을 풀어주며 손바닥이 훤히 보이도록 두 손을 펼쳐 어깨 위로 들었다.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던,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는 동작이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그 모습을 보며 짧은 숨을 내쉰 라희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발을 내딛으려 할 때였다. 유진이 뒤에서 싸늘히 불렀다.

"라희씨."

귀를 잡아끄는 거들먹거리는 특유의 톤에 라희의 걸음은 땅에 박힌 듯 멈춰 섰다. 신경이 몹시 거슬렸다.

대체 무슨 더 할 말이 남아있기에?

처음 소파에 앉았을 때 먼저 연락하려고 했었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본론인 건가? 라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서 있는 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네."

라희가 차갑게 대꾸하자, 유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유진은 살짝 치켜 올라간 눈을 아래로 내려떴다. 이내 붉은 입술이 실룩거리다가 마지못한 듯, 천천히 열렸다.

"얼마에요?"

"........네?"

놀란 반문이 입에서 즉각 튀어나왔다. 라희의 눈이 크게 뜨여 위로 들렸다.

"알고 있어요. 별 관계 아니라는 것. 그저 지난여름 아끼던 차를 폐차한 뒤 허전함을 메울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목을 빳빳이 세운 오만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차요?"

라희가 높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되묻자, 유진은 설마, 몰랐느냐는 듯이 묻는 듯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득의양양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네. P사 자동차요. 새로 뽑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나서 폐차했거든요. 진욱이, 스포츠카 마니아인 건 알고 있죠?"

외제차. 사고. 폐차. 이번 여름. 유진의 말을 들은 라희의 두뇌가 팽팽 돌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릿속 생각이 거듭될수록, 눈앞에 현기증이 일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P사 외제차. 오빠가 사고 낸 차? 설마. 설마.

라희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

실타래처럼 얽힌 일들을 되짚어 풀어내던 뇌리에, 바흐의 차를 처음 얻어 탔던 날. 미라를 따라 처음 그를 만났던 그 날. 바흐가 집 근처 역까지 바래다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때에 연락해.」

그리고, 피투성이 된 오빠를 만나러 간 그 다음 날,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라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그와 만남, 그리고 가입된 자동차 보험의 한도를 넘어섰던 차 사고, 오빠, 그리고 자행된 무지막지한 채권 추심. 하필, 오빠를 가둔 그 폭력배들이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한 대상은, 돈을 지불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부모님이 아닌, 금전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는 라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교로웠고, 작위적이었다. 음성적이고 불법적인 채권 추심의 당면한 최우선 목표가 채무의 변제라면, 라희를 지목해 연락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목돈을 쥐고 있을 확률이 높은 엄마에게 연락해서 돈을 받아냈어야 함이 옳았다.

라희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제껏 그 점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을까. 라희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려 주먹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하얗게 변한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지난여름 시작된 악몽은 순식간에 몰아닥친 일이라 의문을 가질 겨를도 없었다. 앞에 서 있는 유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라희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저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난여름의 모든 일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렸다.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본능에 가까운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들이 한데 몰려 내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단 사람을 지목했다.

바흐. 아니, 한진욱.

팽팽 돌던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마침내,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린 라희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에요. 새로 산 장난감이 갑작스레 사라지고 나니, 한동안 마음이 공허했을 테니까요."

이어지는 유진의 말에 라희는 매섭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유진은 아직까지도 계약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바흐가 말을 안 했던가? 아니,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겠지. 한평생을 같이 할 소중한 사람이기에 남부끄러운 치부를 감히 드러낼 수가 없었을 거다.

"그동안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어요. 곧,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도 있고 해서 불미스럽고 꺼림칙할 수 있는 빌미는 사전에 정리하고 싶어요."

유진이 자랑스럽게 언급한 개인적인 행사는 보나 마나 결혼일 것이다. 이미 나영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손수 행차하신 건가. 바흐 곁을 맴도는 날파리 같은 내연녀를 내치려고?

"다시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유진이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리 봐도 절절한 사랑 때문은 아닌 거 같으니 솔직히 말해봐요. 얼마가 필요해요?"

라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멍했다. 티비 드라마 속 어이없는 신파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유진은 거만하게 팔장을 끼고 허리를 편채 도도한 자세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올렸다.

".......네?"

라희가 되묻자 유진은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말했다.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음영이 깊게 졌다.

"돈이요. 결국, 그게 목적 아닌가요? 힘들게 공들여 작업해서 받아낼 필요 없이 그냥 줄게요. 돈."

돈? 라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뿔테, 그리고 유진. 약속이나 한 듯, 어제오늘 사이 연달아 돈을 주겠다고 제의해왔다.

돈. 라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돈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돈이었으니까. 뿔테의 돈은 감정이라는 대가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유진의 돈은?

라희의 뇌리 속에 그의 본가 주차장, 비어 있던 한 자리 주차 슬롯이 스쳤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 있었던 흔적.

유진은 어서 말해보라는 듯, 붉은 입술의 끝을 올리며 라희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곧 결혼한다면, 어차피 바흐의 돈이 그녀의 돈일 터였다. 그가 정교하게 발목 잡으려 만든 금전의 함정을 그의 돈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나름대로 정의 구현의 한 장면이 될 거 같아서 라희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더군다나, 대가라는 게 바흐의 곁에서 사라져 주는 거라잖은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얼마? 얼마가 적당할까.

유진의 집요한 시선 속에서, 라희는 보란 듯, 입매를 가늘게 늘여 끌어올렸다. 마치 백지수표를 손에 든 기분이었다.

일단, 확고히 필요한 금액은 오천만 원.

라희는 그의 사무실에서 첫날 서명한 계약서를 떠올렸다. 약정 금액을 기한에 앞서 미리 변제한다면 법정이자만큼 받는다고 적혀있었다.

법정이자.

라희의 머릿속에 대학교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생활 민법이 생각났다. 민법상의 법정이자는 연 5%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채권, 주로 부동산 임대차에서의 이자율이고 개인 간의 금전대차에서의 법정 최고 이자율은 30%. 5천만 원의 30%는 천오백. 그렇다면, 필요금액은 최대 6500만 원.

그럼, 이 재수 없고 끔찍한 경험의 대가는 얼마를 받아야 타당할까. 라희는 허공으로 눈을 들어올려 금액을 가늠해 보았다.

할 일 없던 날 집에서 빈둥빈둥 뒹굴며 티비를 보다가 채널을 돌릴 때 나오던 무료법률 상담프로그램에서 몇 년씩 결혼생활을 하다 이혼으로 위자료를 받으면 많아 봐야 삼사천이었다. 따로 재산 분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가 적정 위자료인 셈이었다. 몸과 마음고생을 한 위자료가 그에 못 미치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럼, 육천오백 더하기 삼사천. 라희는 유진을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길게 늘인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1억이요."

라희의 대답을 들은 유진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위로 들렸다.

"이번 연애로 한밑천 잡아보려 했었나 보죠? 듣기로 그쪽 여자들이 받는 금액이 커 보여도 대부분 집에 묶인 전세값이고 한 달에 오백 정도 금액을 받아 생활하는 것으로 아는데. 라희씨 공사 금액은 제법 크네요? 아, 그쪽 용어로 이런 걸 공사라고 한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그쪽 여자, 이젠 숨김없이 대놓고 몸 파는 여자 취급하는 유진을 향해 라희는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렸다.

"후훗. 이번에 크게 한탕 해야 좀 느긋하게 마음 놓고 푹 쉬지 않겠어요? 언니."

일부러, 말끝에 언니를 붙였다. 그쪽과 나이 차를 일깨우려는 의도였다. 유진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깊이 생각하는 듯, 손가락을 세워 미간을 짚어 지그시 눌러 문질렀다. 그리고 뒤로 돌아 식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 들고 와 라희 앞으로 디밀었다.

"찍어요. 계좌번호."

라희는 그녀가 건넨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반질반질한 액정 위에 숫자를 꾹꾹 힘주어 눌러 찍었다. 그의 돈이 차곡차곡 들어있는 계좌번호다. 어차피 그가 준 돈만 들어있는 계좌에 또 그의 돈이 들어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지.

"언제 주실 거죠? 언니?"

뻔뻔하고 도발적인 뾰족한 물음에, 유진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일 이백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줄 텐데, 예상했던 몇천도 아닌 억 단위라서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하지만, 어차피 쓸모없어진 장난감 치우는 비용이니 조만간 줄 거에요."

줄 거라는 말, 주어는 생략되어있어도 누구에게서 나올 돈인지는 확실히 알려주는 말이었다. 라희는 있는 힘을 끌어모아 최대한 태연하게 내뱉었다.

"K은행이에요. 언니."

잊지 말라는 듯이, 라희는 유진을 노려보며 당부했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노려보는 시선 속에서 몸을 돌려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달깍.

오피스텔 현관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서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또렷이 깨우기 위해 아까부터 바짝탔던 입술을 꽉 짓눌러 깨물었다. 찌릿한 통증을 느끼면서, 라희는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얼마지 않아 도착 알림 등이 켜졌다.

-땡.

도착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라희는 휘청이는 몸을 다 잡아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쓰러지듯,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팔을 앞으로 내밀어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몇 번이나 비켜 미끄러진 끝에, 1층 버튼이 길게 눌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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