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75화 (7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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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위로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라희는 눈매를 찡그리며 실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평소와 낯선 광경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커다란 침대, 대리석 바닥, 그리고 드레스룸으로 통하는 문. 그 외 아무것도 없는 침실을 둘러보자 여기가 바흐의 오피스텔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통유리로 막힘 없이 환하게 트인 침실 안에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라희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쁜 도시가 한눈에 보였다. 아마도, 한낮. 대체 몇 시일까.

침대 옆 바닥에 어젯밤 벗어둔 베이지색 모직 코트가 보였다. 라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코트로 다가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정말, 피곤하긴 피곤했었나 보다. 한낮이 되도록 잠을 자다니. 라희는 기지개를 길게 폈다. 푹 자고 나자 몸 상태는 한결 개운했다. 그리고, 이곳 특유의 정적과 탁 트인 경관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허락도 없이 오피스텔에 들어와 잠을 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흐는 어떻게 반응할까. 불쾌해 하려나, 아니면 개의치 않으려나. 어차피 그에게는 본가가 있으니까? 라희는 어깨를 으쓱 가볍게 올렸다. 이곳은 생활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곳이다. 단지 잠을 자고 옷을 갈아입는 곳. 굳이 존재 이유를 따지자면, 도심의 숙소. 적어도 라희가 보기에는 그랬다.

또 다른, 하루.

라희는 창가로 다가갔다. 탁 트인 창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이 들어왔다. 햇살이 밝은 한낮, 쭉쭉 뻗은 강남의 대로는 느리게 운행하는 자동차들로 붐볐다.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거나 일행과 이야기 나누며 길을 걷고 있다. 도보 한가운데 혼자서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걸음을 걷는 이도 보였다.

그는 이런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좁은 원룸의 밀폐된 공간이 아닌, 탁 트인 도심 한복판의 꼭대기의 이곳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며 군림하는듯한, 약간 과장하자면 그랬다, 혹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속에 몰입해 그 안에 살고 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라희는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너머 도시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길가에 움직이는 사람 한 명, 한 명들 모두 각자 자신만의 사연이 있고, 삶이 있다. 저들 중 누군가는 현재가 즐거울 테고, 누군가는 만족스럽고, 누군가는 괴롭겠지. 나처럼?

라희는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이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자신과 같이 출구 없는 나락에서 헤매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묘한 위안이 되었다. 세상에서 홀로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

비틀렸구나.

심사가 꼬이고, 뒤틀렸다.

라희는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울컥, 눈가에 열기가 모였다. 라희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잔뜩 힘을 준 턱 끝이 잘게 떨렸다.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위로받지 않으면 한없이 슬퍼지니까.

힘없이 뒤돌아서 방안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옷장 가득한 복도를 지나 파우더 공간의 세면대로 다가갔다. 쏴아, 물 꼭지에서 쏟아지는 하얀 포말 같은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손끝을 담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부어오른 눈가와 얼굴을 적시니 시원했다. 라희는 몇 번이고 맹물로 세수하다가, 손을 더듬어 비누 거품을 내 얼굴을 씻어냈다. 타월로 꼼꼼히 얼굴을 닦고 나서 거울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개운했다. 푹 자고 나서인지 정신은 더없이 맑았다.

무표정했던 얼굴은 이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당면한 문제가 뇌리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뿔테.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실상, 바흐와 계약을 하면서 생긴 문제들은 계약서가 명시하고 있듯이 조용히 정해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었다. 그는 한 달에 몇 번 부르지도 않았고, 이렇듯 훌쩍 떠나 연락 한 번 없는 무심한 사람이니까.

그 사이 그가 준 돈으로 생활하면서 휴학한 동안 공부를 하거나 자격증시험을 준비하면서 보냈다면 아무런 문제 없을 터였다. 단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 자존감이 위축되고 스스로가 비참해져 우울해지는 심리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거야, 집안에서 웅크리고 지금처럼 친구도, 가족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내면은 지긋지긋한 자조와 모멸감으로 가득 찼을지라도 주위에 드러낼 대상이 없으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을 거다. 적어도 머릿속 부질없는 가정 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사고처럼 맞부닥친 뿔테는 혼란스럽고, 우울하고, 공허하고, 불안하고, 절망적인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손을 이끄는 그를 향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하아.."

라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만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뿔테도 정신이 돌아오고 차가운 이성을 차릴 수 있을 거다. 그와 내가 가당키나 한가.

침실에 도착하자 흐트러진 침대가 보였다. 자신의 처지마냥 흐트러진 침대를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희는 침대로 다가가 잠자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상태처럼 구김 하나 없이 평평하게 시트를 펴고 이불의 모서리를 당겼다. 베개까지 탁탁 손바닥으로 쳐서 주름 없이 만들고 나서, 팔에 코트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하룻밤 몰래 잤으니, 주인 없는 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넓고 깨끗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이라서 모던하고 청결하고 깔끔했지만, 굉장히 인공적이고 무미건조 해보였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침실 옆에 바로 붙어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그가 즐겨 연주하는 하프시코드가 놓여있다. 어쩌면, 어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호기심? 아무도 없는 그의 집에서 나가기 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딸깍, 라희는 문고리를 돌렸다. 올록볼록한 방음재가 벽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방안 한가운데 그랜드 피아노 모양과 같지만, 조금 좁고 더 긴 하프시코드가 보였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정기적으로 청소했는지, 검은 건반 위는 그의 부재를 알 수 없도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라희는 손을 내밀어 검은 건반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때댕.

건반이 묵직하게 눌리면서 날카롭고 높은 금속성의 화음이 흘러나왔다. 피아노의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음색과는 전혀 다른 선명히 날이 서 있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특이했다. 이런 악기를 국내에서 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어떻게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게 되었을까.

라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가락으로 검은 건반들을 계속 눌렀다. 깊은 울림이 있는 금속성의 소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마치, 이 공간을 현세기 서울이 아닌, 고전 서양영화 속의 한 장면, 특히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와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샹들리에 조명 아래의 화사하고 매혹적인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옮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은발의 꼬불꼬불한 가발을 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튀어나와 연주 막 시작할 것 같은 그런 기분. 아니, 바흐려나. 이내 라희의 머릿속에는 음악책에서 보았던 심술 무뚝뚝해 보이는 J.S. 바흐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다른 바흐지만, 바흐는 바흐다. 라희는 피식 입가를 올렸다.

땡, 때대대땡.

모던하고 깔끔한 실내의 하프시코드가 만들어내는 군더더기 없는 풍성하고 깊은 울림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기묘했다. 건반을 무작위으로 두드리던 라희는 이 자리에 앉아있던 손가락이 긴 남자를 떠올렸다.

이 집의 주인.

차갑고 딱딱 끊어지는 음색은 평소 말 없고 과묵한 그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어젯밤 들었던 글렌 굴드 피아노의 둥글고 애절한 호소력 있는 음색 보다, 이 딱딱 끊어지는 날 선 금속성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더 아름답다. 마치 정교하고 세세하고 섬세하게 짜여진 레이스가 겉보기에는 부드럽고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 처럼. 적어도 라희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한참이나 이 고전적인 악기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음색에 매혹되어 건반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기는 빈집인데? 심장이 찌릿하면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라희는 건반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올 때 잠그지 않아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굴까. 설마, 그?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

라희는 건반 위의 손을 거두고 문으로 다가섰다. 그때, 갑자기 문이 뒤로 벌컥 열렸다.

"........!"

열린 문 앞에는 차가운 표정의 키 큰 여자가 서 있었다. 심플한 원피스, 쭉 뻗은 팔다리, 그리고 갸름한 얼굴, 그 안 약간 치켜 올라간 고혹적인 눈매, 붉은 입술, 고고하고 오만해 보이는 표정. 현재 이 상황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사람.

이유진.

"........"

상대방도 상당히 놀란 듯, 라희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또 보네요. 우리."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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