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74화 (7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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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순간적으로 느슨해진 뿔테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있는 힘을 다해 뛰쳐나갔다. 그 상태로 뿔테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장 내보이기 싫은 밑바닥까지 다 드러낸 채 내쳐진 치욕이 몰려왔다.

돈? 그깟, 돈이라고 했나.

돈을 주겠다고?

라희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뿔테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외면하고 뛰다시피 카페를 빠져나와 바로 앞 대로의 가장자리에서 팔을 길게 뻗어 조급하게 흔들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교통 체증으로 막힌 도로를 느리게 운행 중이던 빈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재빨리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타 택시 문을 닫았다. 택시 유리창 너머로 카페 문을 열고 급히 뛰어 나오는 뿔테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 출발해주세요."

라희가 다급하게 말하자 기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직진 방향으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얼마지 않아, 적색등이었던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정체로 막혀 있던 대로가 거짓말처럼 뚫렸다. 택시가 카페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동안, 라희는 창가를 외면하고 앞만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기사가 룸미러로 라희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택시는 강남역을 지나 양재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할까. 라희는 불안한 눈동자를 움직여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노량진역으로 가주세요."

막연한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의 사단인 오빠를 꼭 만나야 했다. 만나서, 대체, 뿔테와 만나서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물어야 했다.

라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바탕 욕이라도 실컷 퍼붓고 싶었다. 갑자기 닥친 타의에 의한 불운에 대해 길길이 날뛰며 한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울고, 악다구니를 쓰며 마음껏 원망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격한 대상이 필요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자 원흉인 오빠. 당사자인 오빠가 딱이었다.

바흐, 이유진, 김나영, 그리고 뿔테. 평온하게 살아온 스무해 남짓한 인생에서 엮이거나 마주치지 않아야 할 그들에게서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분노로 폭발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노량진역에서 택시에서 내려 휴대폰 액정화면을 켰다. 휴대폰 문자내역을 뒤져 엄마가 보낸 문자들을 확인했다. 전에 분명, 오빠 집 주소가 적혀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조금 위로 올리니 주소가 찍힌 문자가 보였다. 엄마가 오빠가 노량진으로 이사했다고 종종 들러서 챙기라며 알려 주었던 문자였다.

라희는 휴대폰 지도 앱을 켜고 주소를 꾹꾹 눌러 찍었다. GPS기능으로 도보 기준으로 길을 찾으니 역에서 15분 거리였다. 노량진역 훤한 조명이 켜진 대로를 지나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상점으로 밝았던 도로 안쪽은 주변이 온통 원룸인 조용한 주택가였다. 제법 심야 시간대라서 다들 취침 중이거나 외출 중인지 거리는 어둡고 한산했다. 침침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꼬불꼬불 좁은 길을 지나 오빠가 살고 있다 표시된 건물 앞에 섰다.

라희는 휴대폰 액정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컴컴한 밤하늘 아래 다세대 주택을 개조한 3층 건물이 보였다. 오빠가 머물고 있는 방은 4F. 옥탑이었다. 라희는 좁은 출입구에 눈길을 던졌다. 낡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공용현관의 도어락은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라희는 비틀려져 어긋난 출입문을 열고 위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지 계단을 밝히는 센서 등도 드문 드문 고장나 있어 어떤 층은 켜졌고 어떤 층은 지나서 올라갈 때까지 반응 없이 컴컴했다. 3층을 지나 4층으로 오르니 아파트 현관문 같은 쇠문이 보였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문 역시 고장 났는지 완전히 닫히지 않아 낡은 문틀과 녹슨 문의 틈이 흉하게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틈새로 찬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왔다.

라희는 조금 열린 문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그러자 올라왔던 건물 내부와는 확연히 다른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라희는 싸늘한 외기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컴컴한 옥상 위 출입문에서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거리에 오빠가 사는 옥탑방이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옥상 위는 온통 캄캄했다. 창문 안쪽 조명은 모두 꺼져있었다.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 없는 걸까. 설마 이 시간까지 학원에?

임용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막판 스퍼트를 한다고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일을 학원 수업을 위해 일찍 자고 있을지도.

막상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오빠를 떠올리자, 카페에서 뛰쳐나오며 치밀어 올랐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오빠가 실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걸면 바로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혹시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 문 앞으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조립식 가건물 방문 앞이라면 지독히도 큰 오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릴지도 몰랐다.

라희가 옥탑방 문 앞으로 한발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

"......아응."

멈칫. 라희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자, 은근히 귀를 잡아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앙, 으흣."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소리. 라희는 굳어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여자의 신음소리다.

"아흣, 아, 좀 더 흐읏, 더, 으응."

끈적한 본능이 담긴 신음에 이어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찰싹찰싹 맞부딪히는 살의 마찰음에 섞여 들려왔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거친 결합 소리. 동시에 여자의 재촉하는 듯한 높은 신음 소리가 이제는 똑똑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읏, 아, 흣. 아앙. 더, 세게, 하윽.."

"...으, 으윽!"

짧고 낮은 신음과 함께 맹렬히 움직이는 소리가 별안간 멈췄다. 그러다 갑자기, 드르륵. 옥탑방의 창문 중 하나가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쿵 하고 바닥에 뭔가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앞에 멈춰 서 있는 라희는 돌발적인 상황에 놀라 굳어있었다. 말없이 데굴 굴리는 눈동자로 한 뼘가량 열린 창문의 모습이 비쳤다.

"아잉, 자기야, 창문 열면 추워."

조금 전 신음의 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여자가 투정하듯 말했다.

"그래서 조금만 열었잖아. 더워. 난 지금 진짜 덥다고."

오빠의 목소리다. 라희는 창문을 주시했다. 조명이 꺼진 안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마도, 일을 치른 두 남녀는 바닥에 누워있을 거 같았다. 아까 들린 소리는 침대에 몸을 뉘이는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열린 창틈으로 오빠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렸었다.

"좋았어? 자기."

사근사근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창틈으로 흘러나왔다. 오빠의 대답 대신 키킥, 뭐가 좋은지 여자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기분 좋은 비음을 흘렸다.

"오늘 공부 하나도 못했네."

오빠가 작게 중얼거렸다.

"자기, 코앞이 시험이지 않아? 이번에 시험 볼 수나 있겠어?"

여자가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만나서 매일 밤 힘을 뺐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냐. 내가 무슨 다재다능한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그건 능력 밖이야."

"아잉, 또 내 탓이래. 자기네 집 과수원 한다며. 힘들게 공부할 필요 없이 물려받으면 되지 않아?"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묻자, 오빠는 잠시 침묵했다. 입은 닫고 있어도 손은 움직이는지 연신 하지마앙, 이라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키득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수원 그거 힘들고 돈도 안 돼. 계속 하다가는 빚만 지겠더라. 이번에 안되면, 뭐 일반 회사 취직해야지. 집에 손 벌리기도 이제 그렇고. 나이도 있으니 올해까지만 하고 접어야겠어."

"자기, 영어과라서 취직은 걱정 없겠다."

"뭐, 그렇지. 굳이 교사 아니어도 할건 많으니까. 엄마가 그동안 안정적인 직장을 원해서 임용 준비한 거지, 딱히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래도 자기가 여기 와서 공부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거잖아.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어머님이 이어주신 건가?"

여자의 말에 둘은 같이 웃었다. 창문 밖에서 대화를 듣고 서 있던 라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공부한답시고 없는 살림에 방까지 얻어주고 학원비야 교재비야 대주었던 엄마가 들으면 기절할 일이었다. 노량진에서 공부는커녕, 엄마에게 효도한다며 손주를 보여줄 참이었다.

라희는 기가 막혀 고개를 들어 컴컴한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했다. 그동안 오빠가 중등 임용 시험에 붙을 거라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상상했던 모든 일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입안이 썼다.

모든 게 너무도 허무했다. 동동거리며 생각했던 것이 먼지처럼 바스러져 흩어졌다. 이젠 정말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가능성 하나 없이 김칫국부터 마시는 쓸데없는 생각들에 바친 시간들이 무척이나 공허했다.

오빠가 임용 시험 합격하고 교직원 대출로 바흐에게 빚을 갚아? 꿈도 못 꿀 소리였다.

멈춰 굳어 서 있는 라희의 몸이 옥상 위 부는 차가운 밤바람에 가늘게 떨렸다. 이제야 차가운 현실을 마주했다. 언제가 읽었던 실존주의 명언처럼 출구는 없다.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 싸늘하게 식은 혈관이 올올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비참하다. 참담하다. 끔찍하다.

그리고 지금 이 옥탑의 어두컴컴한 풍경처럼 암담하다. 라희의 지친 머릿속에는 익숙한 절망과 좌절이 똬리를 틀었다.

방안에서 둘은 연신 뭐라 말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방음이 허술한 옥탑방의 벽과 열린 창문은 모든 소리를 여과 없이 전해주었다. 라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 있다가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러 되돌아 왔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습다. 이 상태에서 문을 두드려서 뭐라 할 것인가. 안에서 둘 다 벌거벗고 있을 텐데. 순간, 자신의 처지가 어이가 없어서 모든 전의가 상실되었다. 오빠 때문에 빚에 묶여 동동거리며 시달리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돌파구인 시험에 합격할 생각도 없이 여자와 희희낙락하고 있다니. 이젠 화조차 나지 않는다. 온몸의 힘이 쫙 빠질 뿐. 부질없이 허황된 기대를 했던 스스로에게 실망한 후회만 몰려왔다.

라희는 힘없이 열린 시커먼 창틈을 바라보았다. 현실은 이런 거였다. 여자가 있는 데서 불러 내 푸닥거리하다 쪽팔리게 한다며 오빠에게 한 대 맞지나 않으면 다행.

터벅, 터벅,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는 어깨가 무겁게 처졌다. 여기까지 파르르 떨며, 씩씩거리며 한바탕 쏟아부으리라 걸어왔던 모든 상황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오빠가 사는 건물을 빠져나와서 라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켜고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손님와서, 라는 오빠의 문자. 결국 손님은 저 여자였구나. 오빠는 오빠대로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데, 라희는 올무처럼 조여오는 진창에 갇혀있다. 기댈 곳도 도망칠 출구조차 없는.

돈을 주겠다고?

라희는 시커먼 땅바닥에 시선을 내리 꽂으며 조소했다.

바흐가 준 돈은 인생의 젊음이라는 시간을 판 삯이다.

기한은 1년. 시간이 흘러가면 계약서 대로 부채는 소멸된다.

지금 이렇게 발버둥 치는 것은, 남은 시간 속박된 몸과 정신의 부자유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이다.

이렇게, 10개월 남짓 남은 전속 창녀 취급이 싫어서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뿔테가 주는 돈을 받으면 대가는 뭐지?

당연히 대가 따윈 없다고 하겠지. 호감으로, 호의로 주는 돈이라 주장할테니까. 하지만, 친구 사이 쉽게 빌려줄 수 있는 소액인 일, 이 만원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자산이라 간주될 수 있는 큰돈이다. 대가가 없을 리가.

...감정?

라희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렇다면 기한은 언제인데.

언제까지의 감정을 담보로 한 걸까.

뿔테의 관심이 사그라질 때까지?

과학자들이 밝혔다는 사랑의 유효기간 3년이라는 마법 같은 시간이 소멸시효인가.

그 뒤로는?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라희는 입술을 짓이기며 앞을 향해 걸었다.

당장 괴롭다고 뿔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10개월이 아니라, 더 오랜 시간 모멸감에 고통받을 테니까. 산산이 부서진 마음이 너덜너덜 만신창이 넝마가 된 기분이었다.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주택가를 가로질러 환히 불 켜진 대로로 나왔다. 인도의 끝에 선 라희는 손을 뻗어 택시를 잡으려다 이내, 들었던 손을 내렸다.

주머니 속 현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코트를 껴입고 집에서 나올 때, 바로 앞 카페에 가는 거라 가볍게 현금 2만 원만 달랑 들고 나왔는데, 여기까지 도착한 택시비로 만 원 이상 지출했기에 현재 소지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은 돈은 6천 원 남짓. 밤이 늦었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돌아 가야 했다.

라희는 노량진역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지하철 입구가 눈에 들어오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집?

집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뿔테.

그가 지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고, 집 안에 있으면 아까처럼 불쑥 찾아와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릴지도 몰랐다.

라희는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집에 갈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당분간은. 라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앞일은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집에 갈 수 없다.

차가운 밤공기로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던 라희는 걸음을 멈췄다. 피곤했다. 녹초가 된 몸이 휴식을 요구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수중에 돈도 없는데.

먹먹한 마음으로 지하철 입구 앞 계단 위에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이 끝나고 차분한 멘트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라디오 같았다. 라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을 환하게 켠 한 평 남짓한 테이크 아웃 커피점이었다. 역 앞에 있는 모양새가 막차 시간 때 까지 늦은 영업하는 것 같았다. 조명을 훤히 밝힌 점포 안 스탠드 매대 안쪽 선반 위 스피커가 보였다. 저기서 라디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머리도, 몸도 습기를 머금은 모래마냥 무겁게 지쳐 있는 상태라 라희는 커피숍으로 걸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뇌가 뻗어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카페인이 절실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하루는 가게에서 파는 음료와 함께했다. 오후에는 나영과, 그 뒤에는 혼자, 저녁에는 뿔테, 그리고 심야인 지금, 다시 홀로.

라희의 입가에 싸늘한 자조가 스쳤다. 신경을 갉아먹는 소모적인 생각을 멈추기 위해 한잔에 2000원이라 쓰인 메뉴판을 보며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테이크 아웃 커피로는 적당한 가격이었다. 보통 커피 전문점 아메리카노가 3500원쯤 되니, 한 시간씩 테이블을 차지하는 자릿값을 뺀다면 절반 이하가 합리적이었다.

굳이 경영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가게를 보면 매출과 단가를 생각하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까. 라희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라디오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차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클래식이다.

KBS FM인가 보다. 고교 자율학습 시간에 종종 라디오를 들었었기에 대충의 채널은 알고 있다. 라희는 점원이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고 하얀색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 올라오는 뜨거운 커피를 입가에 기울이고 있는데, 교향곡 같던 클래식 음악이 끝나고 바로 피아노곡으로 바뀌었다.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멜로디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라희는 커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피아노 선율에 집중했다.

머릿속에 특이한 검은 건반 위를 유려하게 움직이던 긴 손가락이 그려졌다. 그리고 새하얀 티셔츠를 걸친 넓은 어깨도.

바흐.

그가 연주했던 선율이다. 음색은 달랐지만, 멜로디는 같았다. 비 오는 날, 오늘처럼 몸이 가라앉는 날 듣고 있으면 묘한 위안이 되는 아련하고 따스한 선율. 라희는 숨 쉬는 것도 잊은채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클래식 채널에서 음악이 끝나면, 아나운서가 무슨 곡이었는지 멘트를 날려주니까.

-네. 방금 들은 신 곡은 너무도 유명한 곡이지요. 많은 분들이 요청해 주셨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작품 넘버 BWV 988, 아리아입니다.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로 들으셨습니다. 정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지요. 하루를 마감하는 깊은 밤, 우리의 몸과 영혼을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바흐는 돌아왔을까.

그날 이후 몸은 괜찮았을까.

괜한 걱정이겠지. 이유진 씨가 지금 곁에 있을텐데.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라희는 복잡한 사념들을 반추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하철을 타고, 내려 이리저리 걷다가 발을 멈추었다. 눈을 들어보니 어슴푸레한 조명의 스타벅스 앞이었다. 라희는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바흐의 오피스텔. 그리고, 당연하게도 뿔테가 살고 있는 건물.

건물의 맨 꼭대기 펜트층에 시선을 올렸다. 건물의 특수 창과 높은 층고 때문에 불이 꺼져 있는지, 켜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에 피식, 힘없는 냉소가 입가에 서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뿔테는 결코 바흐의 집에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

잠시 망설이던 라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대로 집에 들러 돈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현재 가진 돈으로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주머니 속 현금은 하룻밤 찜질방 신세 질 금액으로도 부족했다. 염치없었지만, 그의 오피스텔 도어락 번호가 바뀐 것이 아니라면, 그가 부재한 동안 하룻밤 정도는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띡 따릭 띡띠딕.

끼리릭, 현관 도어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라희는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현관 센서 등의 불빛 너머로 텅 빈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인기척도, 생활의 흔적도 없는 모델 하우스 같은 무미건조한 공간.

조금만,

이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쥐 죽은 듯 웅크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숨 죽이고 있어야겠다.

라희는 어두운 거실을 지나 맨 끝의 방문을 열었다. 그의 침실. 파노라마 유리창 너머 도시의 조명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가운데 희미한 어둠 속에 구김 없이 새하얀 시트가 펼쳐진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침대 끝으로 다가가 이불 틈으로 몸을 뉘이자 귓가에 빳빳한 베갯잇이 구겨져 사락거리는 푹신한 감촉을 느껴졌다. 일상의 흔적이 없는 공간답게, 그의 체취가 아닌 깨끗하고 청량한 새 침구의 향이 코끝에 스몄다. 결국, 돌고 돌아 벗어나고자 했던 여기. 웅크려 체념하듯 눈을 감은 라희는 푹신한 이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네요.

오타 수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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