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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2층. 도시의 조명이 너울지는 통유리창 너머 자동차들로 꽉 막힌 강남대로가 보였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의 테이블은 거의 꽉 차 있었고 조금 전 단체손님이 나간 창가 쪽 테이블만 몇 개 비어있었다. 그 가운데 앉은 라희 앞에 뿔테가 머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집 앞에서부터 시작된 침묵은 두 사람 사이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미 없는 잔잔한 음악 소리만 낮게 흐르는 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인 새하얀 머그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 향이 그윽하게 피어올랐다.
" 할 이야기 있으면 해요."
맞은편에 앉은 뿔테를 향해 라희가 건조하게 착 가라앉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뿔테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커피잔을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세워 안경테를 추켜 올렸다. 그리고 라희의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비틀어 통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리창 너머 밤거리를 건너다 보는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라희를 바라보았다. 뿔테의 어깨가 위로 살짝 들리더니 안경 아래 오똑한 코에서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저녁은 먹었어?"
그가 나직이 물었다.
"네."
"그래. 난 아직인데. 오늘 내내 커피 말고 먹은 게 없어."
그의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에 라희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약간 지쳐 보이는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한 간절한 눈빛이 잡아채기 전에, 라희는 시선을 비꼈다.
대체, 일하는 사람이 밥도 안먹고 이 시간 까지....
스스로 생각해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라희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밥, 먹으러 같이 가줄래?"
그가 지쳐 풀 죽은 눈으로 바라보며 힘없이 물었다.
"아니요."
질문이 끝나자 마자 이어지는 대답은 빨랐다. 뿔테는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을 펼쳐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연신 쓸어올렸다. 아래로 향한 속눈썹 위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졌다.
한참이나, 말없이 지쳐 보이는 뺨과 눈가를 비벼 마른세수를 하던 그는 아래 커피잔을 향하던 눈을 위로 들어 올려 라희를 가만 응시했다. 감정을 지운 채 무표정함을 가장한 라희의 얼굴을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고르던 그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난, 자기가 확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어."
확신? 라희는 아래로 내리뜬 눈을 깜빡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무슨 확신?
뿔테는 미동 없이 눈을 아래로 내려 커피잔만 바라보는 라희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관계. 그저 가볍게 즐기는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거든. 매번, 말하는 것 같지만, 난 자기가 좋아. 진심으로."
좋아, 라는 말에 나직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라희는 잠자코 가만있었다. 오늘 입을 다물고 그냥 그의 말을 들어주려는 것이 유일한 만남의 목적이라는 듯 그대로 눈만 느리게 깜빡이며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내 친한 친구들도 소개시켜 주고 싶었고. 자기 가족도 만나고 싶었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설명이었다. 그간 그가 했던 일방적인 행동에 대한 나름의 설명. 라희는 귀에 들리는 그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알아보니까,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사귀려면 여자 쪽 집에 먼저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하더라고."
결혼? 그의 말에 섞여 흘러나온 한 단어로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라희는 깜짝 놀라 눈을 들어 뿔테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침내 시선이 마주친 것이 기쁜 듯한 표정으로 라희를 가만 응시했다. 오고 가는 시선 속에서 버티던 라희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진지한 그의 눈빛은 지금 이 상태에서는 충분히 부담스럽다.
무릎 위에 올려진 라희의 손가락이 꾸깃, 옷자락을 힘주어 움켜 쥐었다.
무모하고 경솔하다. 대체 뭘 믿고. 만난 지 고작 두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입에 올린다는 말인가. 거기다 그간 만남이라고 해봤자, 고작....
육체관계.
".........."
라희는 손을 들어 목 뒤를 매만졌다. 피곤한 머릿속이 방금 뿔테의 말로 둔기를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하다 못해 목까지 뻣뻣해질 정도였다. 뿔테의 말을 듣자, 오늘 오후의 상황이 이제 이해가 갔다. 뿔테가 집안에 진지하다는 태도를 심각하게 비춘듯 했다. 그래서, 오늘 나영이 굳이 보자고 불러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뿔테 부모님을 한번 뵈었다고 해서 앞으로 엮이거나 동서 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닌데 나영이 파르르 떨며 발끈한 것이 오버라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그래서, 솔직히 어제 우리 가족 만나고 나서, 자기가 적어도 불쾌해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어.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렸으니, 깊은 관계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떳떳한 교제니까. 음, 그게.."
그는 적당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고르느라 고심했다.
"그러니까, 지난번 여행.... 갔다 와서 자기가 고민하는 것이 눈에 보였거든. 뭔가 주저하며 망설이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내가 자기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던 거야. 내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시켜 보여주고 싶고. 무엇보다도."
그는 말을 멈추고 가만 라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리뜬 눈두덩이 위에 따갑게 쏟아졌다.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 속에 그의 눈빛을 받아내는 라희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앞으로 이어질 말이 무슨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더 긴 말이 이어지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선우씨."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라희가 이름을 불렀는데도 그는 듣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을 꺼내 이었다.
"나는, 자기를 놓칠 생각 없어. 진심이야. 그리고 자기도 그렇다고 생각해. 이제까지 자기와 함께 있을 때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엄마가 예뻐하는 우리 집 애완견 로미도 내가 그녀석 좋아하는 거 알아. 말 못하는 미물도 그 정도는 아는데, 나라고 모를까. 단지.."
라희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은 그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아니요. 어제 말했다시피, 난 더 만날 생각 없어요.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온 이유는, 지금처럼 집으로 찾아오거나 연락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직접 받고 싶어서 에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오늘 있었던 나영과의 일로 조금 날이 서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라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정적으로 날선 말투가 아닌, 뿔테가 진지하게 받아들 일수 있도록 간결하고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선우씨와 난 처음부터 정상적인 만남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그동안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어온 것은 제 잘못이 커요. 그 사실은 충분히 반성하고 있어요. 좀 더 일찍, 단호하게 그만 만나자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말을 하는 거니까요."
라희의 말에 뿔테는 미간을 찌푸렸다.
"육체적인 부분을 말하는 거라면, 난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젊은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거 자연스러운 본능이잖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평범했잖아. 처음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야? 나이트나 클럽에서 만남을 계기로 사귀다가 결혼하는 커플도 흔해.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심심찮게 그런 이야기 하잖아."
그의 말을 듣던 라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미련스럽게도 달리 해석하는 뿔테였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고 있는 듯한 막막함이 몰려왔다.
그때, 라희의 코트 쪽에서 휴대폰 문자 알림벨이 띠링, 하고 울렸다. 낮게 깔린 소음을 가르는 이질적인 문자 알림벨 소리에, 그가 말을 멈추고 소리가 울렸던 라희의 코트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했다. 입이 천천히 다물리고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명백히 노려보고 있었다.
"문자 온 거 같은데."
라희는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분명, 오빠일 거다. 아까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문자를 끝냈으니까. 검은 액정 화면을 켜니, 팝업으로 떠 있는 문자 내용이 바로 보였다.
「야, 손님이 와서. 하여튼, 네 남자친구 꽤 괜찮은 사람이더라.」
문자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라희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남자친구?
머릿속이 어질하고 아득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엊그제 시골집을 떠나기 전, 라희가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을 때 대문 앞에서 뿔테와 엄마가 말을 주고받았던 장면이 질끈 감은 두 눈에 스쳐 지났다. 그날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굳게 감은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무슨 문자인데 그래."
뿔테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까지 알았을까.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흐와 계약에 관한 것은 절대 모를 거였다. 라희와 바흐. 당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먼저 발설하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라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털어내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뿔테가 무엇을 알아냈든, 알고 있든 그 사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다신 만나지 않으면 되니까.
"선우씨.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그쪽 짐작과 다르게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앞으로 얼굴 마주 보고 싶지도 않아요."
뿔테는 자리에 앉은 상태로 고개를 들어 서 있는 라희를 응시했다. 좋은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그가 쉬이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라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 이후,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마세요. 이런 말 까지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은 필요한 것 같네요. 상대방이 싫어하는데, 귀찮게 하는 거 그거 범죄에요. 술에 취해서 집에 찾아와 난동 부리는 것도 민폐구요. 지난번은 넘어갔고, 오늘 이렇게 경고했으니 우리 공권력이 행사되는 장소에서 얼굴 볼 일 만들지 말죠."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차갑게 말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은 떨려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라희는 말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테이블에서 몸을 홱 돌려 올라왔던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의자가 바닥에 급히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이어서 그의 짧은 외침과 함께 라희의 팔목을 낚아채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순간,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안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라희는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손을 비틀었다. 카페 안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놔요."
잇새로 낮게 말하며 몇번이나 손을 빼내려 비트는데도 단단하게 잡힌 팔목을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라희가 재차 놓으라며 말하자, 뿔테가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돈."
단 한마디의 말이었지만, 순간 라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돈? 돈이라고?
순간 고개를 든 라희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뿔테의 눈매가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예상이 맞았다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의 입이 다시 천천히 벌어지면서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돈."
다시 똑똑히 들려오는 말에 라희는 팔을 비트는 움직임을 멈췄다.
"맞지. 돈 때문인 거."
"........."
"그랬구나. 역시. 그래서였어."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순간 발가벗겨진 것 같은 수치심이 혈관을 타고 뻗어와 얼굴로 피가 몰렸다. 라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푹 수그린 라희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손목을 더 강하게 잡아 쥐었다.
"그것 때문에 그와 엮인 거라면, 그거, 내가 줄게. 그깟 돈, 지금 당장에라도 줄 수 있어. 그러니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속 흔들리는 라희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뿔테가 말을 이었다.
"그만 보자는, 잔인한 말. 하지 마."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