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71화 (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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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처 없이 걸었다. 폭풍 휘몰아치듯, 정신없이 보낸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계절이 바뀐 가을의 거리는 눈 부신 햇살 가득 내리쬐어 따사로워 보였지만, 겉보기에만 그랬을 뿐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때때로 추운 돌풍 불어오는 싸늘한 날씨였다.

길모퉁이를 돌다가 맞닥뜨리는,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 같은 찬바람은 특히 매서웠다. 탁 트인 대로와 이어진 좁은 거리를 지날 때는 건물 건물의 좁은 틈 사이로 싸한 건물 풍이 맹렬히 불어와 몸을 제대로 가늘 수조차 없었다.

라희는 허리께로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옷깃을 손으로 움켜잡아 여몄다. 힘들게 한 발 한 발 내딛자, 속마음처럼 버석버석 말라버려 쩍쩍 갈라진 것 같은 건조한 뺨 위로 찬 바람이 스쳤다. 위에 걸친 니트 스웨터의 성긴 구멍 사이로 시린 기운이 헛헛한 마음에 싸늘히 스몄다.

라희는 바람에 맞서며 양팔로 감싸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세찬 바람 불던 골목 모퉁이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다. 라희는 돌풍 때문에 얼굴 위 뒤덮인 머리카락을 손으로 연신 쓸어 올렸다. 아래로 내리뜬 시야에 가득 가로수 아래 수북이 한 무더기로 쌓인 낙엽들이 보였다. 깔끔한 도시 미관을 위해 저녁에 수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쌓아둔 것이다.

라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다가가서 발끝으로 괜히 낙엽 더미를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 크게 뻥 차보았다. 발끝에 차여 힘없이 흩어진 낙엽 더미들은 주변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막상 차고 나자, 치울 분들이 생각나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죄 없는 낙엽을 차고 나자, 어쩐지 가슴 속 응어리진 것들이 조금 풀어져 마음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정성스레 모아둔 것을 차버린 것이 못내 걸려, 주위를 슬쩍 살펴보았다. 혹시나 벽에 기댄 커다란 빗자루가 있으면 도로 쓸어 놓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눈에 띄는 청소용구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모르는 척 지나는 수밖에.

범인이 범죄 현장에서 줄행랑을 치듯, 고개를 숙이고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갑자기 주위가 어두운 게 이상해서 지면을 향했던 얼굴을 들었다. 주변은 하늘 높이까지 우뚝 솟은 대형 오피스 건물이 가득한 번화가 주변이었다. 도심 하늘에 노을이 깔려 주위에 어두운 음영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 시간까지 심란한 상태로 정처 없이 걸었던 모양이다. 오후의 노을조차 들지 않는 건물 그늘은 몹시 시렸다.

조금 더 걸어가자, 제법 사람이 지나는 거리가 나왔다. 인도 위를 오가는 사람은 대부분 화이트칼라로, 남녀 모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무표정 하지만, 평온한 얼굴. 익숙한 도시인들 모습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들의 평온함이 부러웠다. 라희도 반년 전까지만,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난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까. 학업과 병행하여 일하는 도중에는 하루하루 바삐 사느라 별 고민이 없었다.

라희가 부질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걷던 그때, 그녀 옆으로 가을 느낌 물씬 풍기는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야기하는 여자들이 지나갔다.

라희는 상념에서 깨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이는 스무 살 중반 정도. 아마도 갓 직장인이 된 사회 초년생. 그들보다 조금 어린 라희가 보기에도 단정하고 여성스럽게 차려입은 그들은 예뻤다. 활짝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서로를 향해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라희는 시선으로 그들을 쫓았다. 그 끝에는 D브랜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보였다. 최근 생겼지만, 묘하게 럭셔리한 분위기로 꾸며진 외관을 보니 잔뜩 위축된 마음이 주눅 들었다. 그러다, 아가씨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커피숍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오늘은 내내 벼르고 있었던 대로 장을 보기 위해 기필코 마트로 가야했지만, 지금은 춥고, 지치고, 발도 아팠다. 따뜻하고 달콤한 것을 먹고 나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조금만, 아주 잠시라도, 저기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섞여 쉬고 싶었다.

커피숍 카운터에서 따뜻한 핫초코를 주문해 받아 아가씨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지나쳐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귓가에 웅웅대며 들려오는 말소리, 음악소리가 한데 섞인 커피숍 실내 소음 소리에 묻혀서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그저 멍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지난번 한강 강변에서 뿔테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당장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바스러진 절망을 가득 담고 있어 지나다니는 차에 뛰어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게 되는 그런 표정이었어.

지금도? 그런 표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은 특히 힘들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영의 모든 말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라희는 조금 풀린 눈으로 창밖에 시선을 던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뿔테는 왜, 그런 표정에 끌렸던 걸까. 이렇게 땅이 꺼질 듯 한숨이나 쉬어대는 미래도 꿈도 희망도 없는 여잔데. 만약, 나라면.

라희는 창 너머 던졌던 시선을 거두고 실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테이블 너머, 카운터 근처에 아까 길에서 보았던 예쁜 아가씨들이 앉아서 즐겁게 수다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희는 그쪽 테이블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나라면. 저렇게 예쁘고 싱그러운 밝은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거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도, 어둠도, 고민도 없이 마냥,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게 몰입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잔잔한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같아 보이니까.

........하아.

라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딱딱한 커피숍 테이블이 볼에 닿았다. 여름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한숨만 늘었다. 테이블 위에 손도 대지 않은 핫초코 잔이 보였다.

달디단 거. 그런 거 먹으면 착 가라앉았던 기분 좋아진다고 들었다. 과학적으로는 설탕을 먹으면 혈당이 높아져 기분을 좋게 하는 세로토닌이 뇌에서 나온다고. 거기다 초콜릿까지 들어간 거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라희는 앞에 덩그러니 놓인 핫초코를 들고 기울여 마셨다. 따스한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달달하고 진한 단맛이 느껴지면서 속까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느릿하게 핫초코를 마시는 눈동자는 다시 창밖을 향했다. 늦은 오후의 석양이 노을 지는 거리는 적색, 황색, 주황색이 한데 모인 웜톤의 빛 속에 녹아들고 있어서, 풍경이 아닌 어느 미술관 액자 속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보던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실제 날씨가 추워서 그런다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름에도 한기를 느꼈었다. 그래서 온기에 집착했던 거고. 아마도 잘 챙겨 먹지 않아서 속이 비어 헛헛해서 그랬을 거다. 배고프면 몸의 욕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니까.

.........만약, 온기가 필요한 거였다면.

라희는 시선을 내려 바로 앞에 놓인 핫초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뜻한 것을 먹거나 음식을 제대로 챙겨서 먹었어야 했다. 온기가 그리워 무작정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라희는 스스로 차갑게 자조했다.

어리석다. 헛헛하고, 외롭고, 공허함으로 얼룩진 정서적 허기를 타인에게 기대 해소하려 했기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 거였다. 아까 금칠한 티하우스에서 나영에게 들었던 말들이 마음을 생채기 내 할퀴고 후벼 팠다.

그래. 처음부터 뿔테와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틈을, 아주 노골적으로 쉬워 보이는 틈을 보였던 거다. 팔뚝에 임플라논을 심고 바흐의 오피스텔 드나드는 목적이야 뻔하니, 뿔테는 그저 가볍게 한번 건드려 보자고 작정했던 거고.

물건 달린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찔러 보는 동네 창녀가 된 기분이랄까. 라희의 표정이 무너졌다. 비참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헤집힌 마음을 추스르려 가까스로 억누른 입술 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영의 말처럼, 상스럽고 저급하고 천박하다. 그저 미끈한 몸뚱어리와 한때의 젊음을 팔아 바흐와 거래했다.

라희의 기늘게 내려뜬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 속, 한 귀퉁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자신에게 물었다.

그럼, 빚은?

전화받고 달려간 그 사무실의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오빠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마치 잔인한 영화 속 장면처럼, 낯빛이 무시무시했던 큰 덩치의 남자들은 피범벅이 된 오빠의 손가락을 커다란 검정 구두 밑창으로 지그시 눌러 비벼 짓이겼고, 한 손에는 시퍼런 사시미 칼을 들고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로 구역질 나게 물었었다.

뱃가죽에 칼빵 맛을 봐야, 돈을 내놓겠느냐고.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학기 중에 채무와 금전 거래에 관한 레포트를 쓰기 위해 조사했던 모든 합법적인 변제 절차와 과정은 현실과 하등 상관없었다. 누가 봐도 확실히 정상적이고 적법한 채무 추심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론과 괴리된 현실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끔찍했고, 처참했다.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부모님께 먼저 알렸어야 했을까? 그랬더라면, 주위 친인척들에게서 사사로이 빌리든, 과수원을 팔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갚아 주었을 거였나.

그래.

라희는 스스로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황이 아주 급박해졌다면, 본가까지 찾아와 협박했더라면 결국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니까. 그래. 그날 바로 부모님께 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오빠가 부모님께 어떤 존재인지 아니까.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내내 생각하고 반추해 보았자, 그래 봤자, 결국 이미 지난 일이다.

다 부질없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라희는 반쯤 남아있는 핫초코를 미련없이 손에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운터 앞 쓰레기통에 넣었다. 카페를 나오니 바깥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들어가기 전보다 더 쌀쌀했다.

거리상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를 향해 걷는데 문득, 허기가 졌다. 혀끝만 조금 따뜻하고 달디단 것이 아닌, 뱃속까지 묵직하게 채워주는 뜨끈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원래 가려고 목적했던 대형마트가 아닌, 집 근처 가까운 소형 마트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보았다. 브로콜리, 닭가슴살, 버터, 모짜렐라 치즈, 우유, 감자 2알, 소포장된 양파와 마늘을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손에 들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왔다. 싱크대 옆 간이 식탁 위에 재료들을 늘어놓고 나서, 기억을 떠올렸다.

어떻게 만드는 거였더라?

기숙사에서 친한 선배 언니가 가르쳐준 레시피가 입맛에 맞아 추운 날 종종 해먹었었는데, 몇 개월 만에 만들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다가, 대충 방법이 생각난 라희는 평소 라면만 끓이던 냄비에다 찬물을 붓고 닭가슴살을 담가 팔팔 끓여 육수를 냈다. 뽀얀 닭고기 국물이 우러나자, 하얗게 된 고기만 건져서 깍두기처럼 토막 썰기를 했다. 그리고 다른 냄비를 준비해서, 버터와 마늘과 양파 그리고 밀가루를 한 큰술 듬뿍 넣고 달달 볶았다.

정확히 요리 종류는 모르겠지만, 대충 걸쭉한 스프와 건더기 풍부한 스튜, 그 중간쯤에 위치한 요리였다. 노랗게 녹은 버터에 재료가 익혀지자, 깍뚝 썰기 한 감자를 집어넣고 브로콜리를 추가해 넣었다. 다시 조금 볶다가 닭고기와 우유와 육수를 냄비에 한데 넣어 바글바글 끓였다. 농도는 옆에 따로 우려낸 육수로 조절했다. 제법 걸쭉하게 쫄아들자 마지막으로 분쇄된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뿌려서 라면용 넓은 그릇에 옮겨 담아 간이 식탁으로 옮겼다.

요리를 마치고 나니, 식탁 뒤쪽 닫힌 부엌 창문에 뽀얀 김이 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저것 끓이고 볶은, 수분기 있는 요리가 남긴 생활의 흔적. 소소한 평온의 자취. 평소 외식하거나, 집안에서는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제대로 요리한 흔적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라희는 뽀얀 김 서린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우두커니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떠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적당히 간간하고, 크림소스에 카레처럼 깍둑썰기한 큼직한 재료가 듬뿍 들어가 있어서 되직한 스프의 느낌에다가 씹히는 식감까지 있었다. 차 종류만 마셨던 빈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살 거 같았다. 핫초코의 단맛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온갖 영양이 한데 어우러진 묵직한 음식이 기꺼웠다. 라희는 숫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음식을 입으로 떠 넣다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문득 핫초코를 떠올린 머릿속에, 커피숍 창가에 흐릿하게 윤곽만 비추던 건너편 테이블 여자들의 잔상이 스쳤다.

왜. 나는,

......카페에서 봤던 싱그러운 아가씨들처럼 밝게 웃고 떠들며 지내지 못하는 걸까.

이내, 라희의 뿌연 눈동자 위에 걷어차여 산산아 흩어져 바닥에 느리게 떨어져 내리 던 낙엽 더미가 떠올랐다.

왜. 나는,

......말라비틀어져 떨어진 낙엽마냥, 절망 속에 바스락거리며 이렇게 엉망인 채로 사는 걸까.

라희의 얼굴 위로 쓰디쓴 냉소가 번져나갔다. 3초면 잊혀질 거라 자위했던 나영의 경멸에 찬 싸늘한 시선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취급이나 받으면서.

입안에 담겨있던 부드러운 알맹이들이 서걱거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두 눈가에 열이 몰렸다가,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습기가 잔뜩 머금어져 시야가 흐렸다.

툭,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렀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입가가 가늘게 떨려왔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

라희는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엉엉 소리 내 울어버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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