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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70화 (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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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이었다. 귓가를 찌르듯 자극하며 요란히 울리는 휴대 전화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살을 찌푸리며 액정 위에 더듬더듬 손을 얹었다. 당연히 자기 전 맞춰 놓은 알람인 줄 알았다.

어젯밤, 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공허한 마음과 같이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텅 빈 냉장고를 보면서 오늘은 꼭 마트에 들러 장을 보리라 결심했었기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면 당연히 잠잠해 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높고 낯선 이질적인 목소리가 방안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여보세요?"

순간 크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가 잠결에 흐릿했던 정신을 화들짝 불러 깨웠다.

스피커폰? 알람 해제가 아니었어?

라희는 가늘게 뜬 눈을 재차 깜빡이며 휴대폰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목소리. 잠에 취해 몽롱한 호기심에,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세요?"

정말로. 그 말을 내뱉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라희는 앞을 향해 시선을 흘깃 던지고 나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늦은 오후 청담동의 금칠 번쩍한 TWG 2층에 앉아 나영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처음 와본 TWG 청담 매장은 핫플레이스답게, 한껏 차려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불안한 마음을 내리 누르며 1층의 알록달록한 틴케이스 디스플레이된 전시 매장을 지나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계단 위로 올라온 라희는 이내 창가에 앉아있는 나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나영 쪽에서 먼저 눈짓을 했기 때문이지만.

"반가워요. 어제 보고 또 뵙네요."

맞은 편에 착석한 라희를 향해, 나영은 건조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눈 바로 밑의 광대 위를 덮은 날카로운 선의 커트 머리는 세련되어 보였지만, 싸늘한 눈초리와 함께 매서운 기운을 풍겼다.

"점심시간은 지났지만 식사도 되고 오후니까 애프터눈 티도 되네요. 뭐든 시켜요. 내가 보자고 했으니까."

라희는 쏘아지는 나영의 시선을 피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장 내 절반가량의 테이블은 금칠한 3단 트레이를 위에 두고 그 옆에 놓인 탐스러운 황금빛 티팟에서 차를 따라 마시며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기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라희는 고개를 숙여 놓인 두꺼운 메뉴판을 펼쳐서 힐끗 내려다보았다. 빼곡히 나열된 작은 글자들이 지면을 번잡스럽게 채웠다. 복잡했다. TWG 자체 블렌딩 티 종류가 600개가 넘었다.

"여기, 에프터눈 티 괜찮다던데. 어때요?"

나영의 탐색하는 시선 속에서 라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쑥 전화한 나영과 마주한 껄끄러운 자리리다. 한가하게 애프터눈 티세트를 주문해 층층이 놓인 음식들을 집어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없이 눈으로 메뉴를 훑다가 가장 무난한 종류를 골랐다.

얼 그레이.

메뉴판에는 프렌치 얼 그레이라고 쓰여있었다. 어쨌든 얼 그레이니까.

"주문하시겠습니까?"

다가온 직원에게 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골든 로즈요."

"프렌치 얼 그레이로 주세요."

주문을 마친 나영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나른하게 추켜올린 속눈썹 밑 눈동자를 아래로 향해 거만하게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화장기가 없네요. 어제와는 분위기가 좀 달라 보여요. 조금 독기가 빠진 느낌이랄까."

독기? 화장한 얼굴은 독기가 차 있다는 뜻인가. 만남의 자리에서 초입부터 적의가 가득 담긴 말을 들은 라희는 속에서 치밀어 오는 실소를 내리눌렀다.

무슨 독? 어젯밤 이별을 고한 그쪽 도련님 뿔테를 어떻게 해보려는 독기로 보였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얼떨결에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내내 궁금했던 라희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나영은 바로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짙은 가을과 어울리는 버건디 색상의 입술이 가로로 길게 늘어졌다.

라희는 턱을 살짝 기울여 갸웃했다. 전화번호 입수 경로를 묻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웃기는 질문이 아닐 텐데.

정말 재미있다는 듯 눈가에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은 나영의 눈매 끝이 의아한 표정의 라희를 똑바로 향했다.

"아, 별 뜻은 아니고. 전에 라희씨가 제 친구에게 했다던 말이 문득 떠올라서요."

친구? 이유진? 라희의 기억 속에서는, 이유진과 전화에 대해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었다.

옅은 의혹을 담은 시선이 가늘게 쏘아지자, 나영은 다시 입매를 길게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과는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이라고 했었다면서요. 라희씨 번호는 당연히 도련님께 여쭈어 받았어요."

아.

-선우와는 무슨 사이에요, 애인?

-폰 번호도 모르는 관계요.

기억 속 싸한 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듯했다. 그 때도 햇살이 부서지는 오후의 창가 자리였다. 비록 장소는 오피스텔과, 티하우스로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투의 비웃음을 가볍게 흘리는 세련된 차림의 차가운 인상의 여성을 앞에 두자, 익숙한 자리 같은 기시감 마저 들었다.

황금색 티팟에 담긴 차가 서브 되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이내, 우려낸 차가 담긴 티팟을 직원이 조용히 들어 올려 하얀색 전용 찻잔에 쪼르르, 차를 따라 주었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로즈골드 빛 물줄기를 타고 은은하고 다채로운 섬세한 향기가 테이블 주위로 그윽하게 퍼져나갔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직원이 자리를 피하자, 나영은 붉은빛이 도는 샴페인 색상의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로 기울였다. 라희는 입을 다물고 프렌치 얼 그레이가 적당히 우러나 담긴 찻잔을 내려다 보았다.

붉게 물든 진한 오렌지 빛 수면 위로 미끄러운 거울처럼 오후 티하우스의 풍경이 가득 담겼다.

잔잔한 찻잔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오늘 대체 이 자리에 왜 나왔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영인 줄 알았던 그때, 그냥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나영이 유진과 관련되어있고, 유진이 바흐의 그녀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 한 구석 드리워진 앙큼한 호기심?

"그런데, 요즘 아가씨들은 정말 행동이 빠르네요."

".....네?"

차를 마시던 나영이 힐끗, 라희를 보며 비꼬듯 던진 말에 라희는 찻잔을 향하던 눈을 들어 올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라희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땐 라희씨가 별 감정 없이 냉담해 보였거든요. 그 이유가 누구 때문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불쾌감이 고인 눈동자가 나영을 향했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나도 불과 며칠 전에야 알게 된 결혼 소식이 그쪽에도 전해졌었나 봐요? 발 빠르게 도련님을 움직여 시부모님을 뵈러 온 것을 보면요."

"...결혼요?"

라희의 의아함이 담긴 물음에 나영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친구 유진과 진욱 씨요. 지금 뉴욕에서 결혼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어제 알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런 거? 갑작스레 뿔테 부모님을 맞닥뜨린 거?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생각이 우뚝 멈췄다. 바흐가 결혼한다.

"그간 만나 왔던 진욱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선책으로 마음이 도련님께 기운 거 아니었어요? 단정한 옷차림 하며, 깔끔한 화장 하며, 어른들 앞에서 몸가짐 바른 것처럼 다소곳이 행동하는 거 보고서 라희씨가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죠?"

"....."

어이가 없으면, 티비 드라마 주인공처럼 눈물이 차오르거나, 더듬더듬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말문이 탁 막혀버린다는 것을 지금 막상 겪어보니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하, 멍하게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헛헛한 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멸감으로 속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나영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테이블 아래에 시선을 던진 라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날 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말해드리려고요."

"뭘요?"

라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을 불쾌함이 담긴 서늘한 눈동자로 받아내며 짧게 물었다.

"라희씨 머릿속 계획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도련님과 한 식구인 내가 먼저 입장을 밝혀야 할 것 같아서요."

"입장요?"

"그래요. 입장, 난 개인적으로 라희씨 같이 한때의 젊음과 별거 아닌 외모로 어리숙한 남자 잡아 남은 인생 어찌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여자들, 마음속 깊이 경멸해요."

경멸?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을 앞에 두고, 그것도 연장자가 한참 손아랫사람에게 내뱉을 소린가.

처음에는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확 불쾌감이 치솟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자, 차츰 답답한 한숨이 아닌,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입가에 번졌다.

눈앞에 마주한 상대는 오해를 풀어 긴밀한 이해와 설득을 시켜야 할 대상 조차 아니다.

그저 아무 관계도 아닌 낯선 여자.

길거리 스쳐 지나가 3초면 잊혀질 완벽한 타인. 김나영.

어제 이별을 고하고, 바로 휴대폰 수신 거부로 모든 연락을 차단시킨 뿔테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혼자서 머릿속으로 쓴 막장 드라마의 플롯이 대체 얼마나 뻗어 나갔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어디까지 완성된 썰을 풀어보나,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러자 아득할 정도의 불쾌함이 순식간에 차게 가라앉았다. 마치, 의미 없는 허무개그를 라이브로 관람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희의 일그러졌던 얼굴 위로 여유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요?"

라희는 손을 뻗어 내내 테이블 위에 두고만 있었던 홍차 잔을 들어 기울였다. 기존 얼 그레와는 미묘하게 다른, 섬세한 꽃향기가 가향된 은은하고 향긋한 향기가 콧속에 스몄다. 이름이 프렌치 얼그레이라 했지. 처음 마셔보는 블랭딘된 홍차의 끝 맛은 미미하게 달짝지근했다.

차맛을 보며 요리조리 품평할 정도라니.

정말, 그동안 현실 도피하느라 쏙 빠졌던 혼을 또렷이 깨울 정도로 나영이 지껄인 말이 어이 상실이었나 보다.

"계속 말씀해 보시죠."

라희의 삐딱한 도발적인 물음에 나영은 코웃음 쳤다.

"이제 노선이 확실히 드러나자, 낯바닥을 바꿔 뻔뻔해지기로 한 건가요. 분명히 말해두죠."

낯바닥이라, 참 단어 수준하고는. 라희는 턱을 가로 저으며 혀를 낮게 찼다.

어차피 타인인 불쾌한 상대. 어제 이별로 앞으로 엮이지 않으리라 확신한 홀가분한 기분 탓일까. 라희는 입꼬리를 잔뜩 끌어 올려 약 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영을 응시했다.

앞에서 마주한 나영은 순간, 입가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정 혐오스럽다는 듯이 라희를 바라보며 딱딱하게 덧붙였다.

"우리 도련님과, 그쪽, 앞으로 엮이는 일 없었으면 해요. 이는 어머님께서도 원하시지 않고요. 아무리 둘째 서방님께서 변변찮은 동서와 결혼했다고 해도, 적어도 동서는 E대 출신이었어요. 거기가 어머님 기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하 라인이구요. 이건 물론, 앞서 나가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말이지만, 더는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 낮은 동서, 원치 않으세요. 그리고....."

"네에."

라희는 정색을 하며 말하는 나영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나영의 눈빛이 차게 굳었다.

"그리고요?"

라희가 속눈썹을 치켜 올려 뜨며 나른한 음색으로 묻자, 나영은 라희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이 남자, 저 남자와 몸 섞으며 만나며 미끈한 몸뚱어리로 조건 저울질하는 그런 한심한 여자. 내 주위에 제발 가까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해요. 상스럽고 저급하고 천박한 꼴을 피해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즐기다 가려 해도 짧은 인생이라서요."

"그러시군요."

도를 지나친 참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고고하고 우아하게 꽃길만 즈려 밟으며 걸으시던가요. 라희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말을 짧은 말로 일축했다.

"더는 할 말 없으신가요?"

"의사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군요. 귀가 뚫려 있고, 오늘 한 말을 제대로 들었으면 앞으로 볼일 없겠죠? 송라희씨."

그쪽처럼, 이쪽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순순히 대답해주기는 싫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어제 들었던 말처럼, 나중 일이 어찌 될 줄 알고요."

노골적인 조소를 담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린 라희의 말에, 나영은 다시 뭔가 말하려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얇은 클러치를 쥐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이상 대화는 무의미할 것 같군요."

나영은 클러치를 옆구리에 끼고서, 홱, 돌아서려다 우뚝 멈춰서서 테이블 위의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라희를 싸늘히 내려다보며 말을 뱉었다.

"차마, 이렇게까지 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라희씨 사생활이라 생각해 그동안 입 다물고 있던 거, 어머님께 오늘 일과 함께 전부 말씀드리겠어요. 행여나 도련님과 잘해볼 생각 하지 말라는 요지로요."

"친절하시네요."

라희는 찻잔에 손가락을 끼워 들어 올리며 느긋하게 답했다. 나영은 한동안 멈춰 서서 독기 품은 눈으로 찻잔을 향해 담담히 내리깔린 눈매를 내려다보았다. 혐오에 찬 시선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희는 찻잔을 입가에 대고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하,"

기가 차다는 듯, 짧은 바람 소리를 내뱉은 나영은 홱 뒤돌아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딸깍, 라희는 찻잔을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위를 향해 들어 올린 속눈썹 아래 눈동자 위로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가 비쳤다.

"..."

겉으로는 내내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바짝 옥 죄여 오던 긴장감이 일순 풀리자, 온몸에 확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허탈한 느낌이었다.

찻잔 손잡이를 떠난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라희는 떨리는 손을 맞잡아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쩌면 계속되는 나영의 도발에 시덥잖은 듯 태연히 응했던 이면에는 한 단어에 쏠린 당혹감이 있던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혼.

오늘. 말도 안 되게 지껄이는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굳이 나왔던 이유를 굳이 대자면, 유진과 연이 닿아 있는 나영에게서 도통 알수도 들을 수도 없는 바흐 소식을 접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결혼, 하는구나.

아마도 뉴욕에서?

라희는 눈을 내려 물끄러미 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옆에 놓인 황금빛 찬란한 둥근 티팟을 기울여 조르르 차를 따랐다. 짙은 투명한 갈색이 찻잔에 담겼다. 그 위로 낮아진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계약은?

어찌 되는 걸까.

행여, 남은 기간 동안 결혼한 그와 관계라도 맺는다면.

라희는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단어.

간통.

하아, 정말.

아득한 환멸감이 눈앞을 채웠다. 지독히도 처참했다.

그간 진창에 빠졌다 생각한 삶이 이제는 막장의 나락으로 곤두박 치는 기분이었다. 라희는 앞에 놓인 멋스러운 홍차 잔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렇듯 향긋하고 우아한 홍차를 마주한 역겹고 악취 나는 현실이라니.

찬란하게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 아래, 따뜻한 수색의 홍차를 앞에 두고 입가로 차츰 번져나가는 냉소는 마음을 후벼파 지독히도 시리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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