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69화 (6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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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 생일에 라희 씨가 청담동으로 왔었거든요."

"그래? 근데 왜 난 기억에 없지?"

잠자코 있던 그의 형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영은 입꼬리만 간단히 올려 답했다.

"따지고 보면,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도련님을 내내 붙잡고 있는 바람에 라희 씨가 머쓱해져 일찍 자리를 떠났잖아요."

"맞아. 순전히 형 때문이야. 그날 거기 들렀다가 라희 씨를 대충 소개하고 마저 데이트하려고 했었는데. 형이 늘어지는 바람에 망쳤거든."

"음."

나영의 말에 뿔테의 말이 더해지자 그의 형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뿔테 어머니를 고스란히 닮은 듯한 인상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가 못마땅한 듯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는 눈을 들어 라희 쪽을 쓱 살폈다. 그러고서는 뭔가 말하려는 기색이 보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입을 닫았다. 아마도 가족 내의 대화 주제 거 같았다. 외부인인 라희가 있어서 섣불리 화제를 꺼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묘한 어색함을 가르고 미닫이문이 스륵 열렸다. 차례로 들어온 한복 입은 직원 몇이 오가고 이내, 하얀 그릇 안에 정갈하게 플레이팅 된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날라져 각자의 자리에 가지런히 놓였다.

맨 먼저 색색이 놓인 깔끔한 나물 반찬과 보쌈김치가 새하얀 테이블 중앙에 위치했다.

그리고 각자의 테이블 매트 앞쪽으로 나란히 오목한 종지가 놓였다. 그 안에는 간장과 초장, 그리고 동치미가 담겼다. 이어서 알록달록 화사함 빛깔의 신선해 보이는 샐러드 접시와 향긋한 송이 버섯 향이 풍기는 전복죽이 담청색 매트 위로 놓였다.

"다들 먹자꾸나. 라희 씨도 저녁 시간이라 시장했을 텐데 어서 들어요."

풍채 좋고 인자한 인상의 뿥테 아버님이 울림이 깊은 굵은 목소리로 음식을 권했다. 아버지를 시작으로 이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라희는 앞에 놓인 식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아버님의 살피는 시선이 얼굴 위로 머물자 체념하듯 느릿하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단단한 놋쇠붙이가 손가락 사이에 들렸다.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어느 대학이지요?"

식사 도중 그의 어머니가 느닷없이 물었다. 급작스러운 질문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머뭇거리는 라희를 대신해 옆에 앉은 뿔테가 바로 대답했다.

"Q대에요. 경영이고요."

"그래? 그런데 얘야. Q대는 어디에 있니?"

그의 어머니가 나영을 향해 나른하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나영은 턱을 살짝 들고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K대 옆에 있어요. 강북이고요."

"아, 거기."

그제야 어딘 줄 알겠다는 그의 어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얌전하게 고개 숙이고 있던 라희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록 Q대가 이름난 명문대는 아니지만, 나름 유서 깊은 서울 시내 대학이라 생각했는데. 방금 그 말투는 명백한 무시였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불유쾌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먼 입술을 안쪽만 잘게 짓씹었다.

"미안해요. 난 의대가 없는 대학은 잘 알지 못 해서."

가라앉은 안색을 힐끗 본 그의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아, 예.."

라희는 나직하게 답했다. 씁쓸했다. 그래도 학창시절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소리를 별로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못 한다는 말은 듣지 않고 컸는데. 입안이 모래를 머금은 듯 썼다. 라희가 입을 꾹 닫고 젓가락을 깨작거리는 모습이 옆에서 거슬렸는지, 그동안 잠자코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뿔테 아버님이 고개를 들어 어머님을 흘겨보며 말했다.

"이 사람아, 금이야 옥이야 어화둥둥 기른 막내아들이 데려온 예쁜 아이를 보니 시어머니 용심이 솟구쳐 올라 심술이 났나. 뭘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사람 앞에 두고 무안하게."

끌끌 혀를 차는 질책에 어머님은 마뜩잖게 재빨리 말을 붙였다.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그만. 초면에 실례했어요."

"아닙니다."

어르신의 말에 라희는 작게 중얼거려 답했다. 그 뒤 어머님은 불편한 기색이 비치는 얼굴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테이블 위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형님 내외도 입을 다 물고 있어서 한동안 식기가 부딪히는 자잘한 소리 외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아버님이 뿔테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라희 양을 가만 보고 있으려니, 자태가 참 곱구나 고와. 우리 선우가 여자 보는 눈이 제법 높구나."

"제가 좀 그런 편이죠."

뿔테가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리자,

".....확실히 눈에 띄는 미인은 미인인가 보더라구요."

나영이 차가운 눈길을 라희에게 던지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희미하지만, 나영의 말투에는 명백한 적의가 배어있었다.

이유진의 친구라서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법한 건조한 말 속 나영의 뾰족하게 날 선 어투는 라희의 귓가에 거슬렸다. 라희는 미미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손끝으로 펴면서 얼굴을 굳혔다.

"왜? 누가 뭐래?"

큰형이 궁금한 듯 물었다. 나영은 라희를 향해 던졌던 눈길 거두고서 남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유진이, 알죠? 당신."

"어. 접때 봤잖아. 뉴욕에서 활동 중인 아트 딜러 말이지? 당신 대학 친구."

"유진이가 생일 파티에서 라희 씨를 보고 드문 자연 미인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거든요."

"허어, 그렇다면 인정해야지. 세계적인 안목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는 황금비율이신가 봅니다. 라희씨."

큰형이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말에 라희는 대꾸 없이 예의상의 딱딱한 미소를 끌어올려 입가에 걸었다. 나영이 유진을 걸고넘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바흐와의 관계를 대강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하긴, 바쁜 국내 체류 일정을 쪼개 생일 파티에 올 정도로 절친한 친구니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눴을 테고 라희에 대해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할 정도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라희는 지난 오피스텔에서 만났던 이유진과의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녀도 라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흐가 발설하지 않은 이상, 둘 사이 계약에 관한 내용은 꿈에도 모르리라. 시종일관 과묵한 바흐의 성격상 결코 먼저 입을 열지 않겠지.

기껏해야, 바흐의 새롭고 어린 연인으로 생각하려나? 하지만 바흐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영이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무겁고 체증이라도 걸린 듯 답답했다. 라희는 눈을 낮게 깔고서 먹먹한 가슴을 달래려 테이블 위를 멍하니 응시했다.

"신선로입니다."

직원이 맑간 국물이 끓고 있는 신선로 단지를 테이블 옆으로 옮겨 놓았다. 이어서 조금씩 덜어 담은 신선로 국물과 소를 개인 접시에 일일이 옮겨 내서 건네주었다.

"국물 한번 떠먹어봐. 맛이 시원하니 괜찮아."

뿔테의 말에 라희는 내키지는 않은 수저를 움직였다. 쓰디쓴 속으로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라희는 몇 번 더 떠서 먹었다. 비낀 시선 사이로 라희를 바라보는 뿔테의 흡족한 표정이 보였다.

샐러드와 전복죽으로 시작된 한정식 코스는 생각보다 길었다. 평채, 숙회, 칠전판, 각종 전류, 떡갈비, 닭고기 산적, 한우 육회, 소고기 볶음, 자연산 송이, 대하찜, 장어구이, 한우 갈비와 더덕구이, 생선찜 등 다양한 메뉴가 식사에 앞서 쉴 새 없이 이어져 나왔으나 멋들어진 외관에 비해 코스별로 제공되는 음식 개개의 맛은 그저 그랬다.

앞에 놓인 음식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라희의 낮아진 눈길은 미묘하게 경직된 분위기 속 어색함으로 가늘게 좁혀졌다.

"그런데, 라희 씨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지요."

큰형이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올리며 물었다. 라희가 대답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뿔테가 먼저 답했다.

"사과 과수원이야. 형."

"사과? 사과면 선재가 좋아하겠는걸. 킬러잖아."

"아, 맞다. 그렇지."

"둘째가 사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이제 두 살 된 조카 녀석도 벌써 그렇고요. 라희 씨께 나중에 신세 좀 지겠는걸요?"

완고한 표정이었던 큰형이 입가에 웃음을 가득 담고 싱글거리며 말을 건넸다. 라희는 사교적으로 입가를 희미하게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참. 나중 일이 어찌 될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나영이 농담인 듯 진담처럼 나무라는 어투로 작게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라희는 속으로 낮은 실소를 흘렸다. 따지고 보면, 나영의 지적은 정곡이었다. 오늘 저녁 뿔테를 만나 하고자 했던 말은, 결국 이별의 말이니까.

"떡갈비 맛이 괜찮은데? 당신도 먹어봐."

"그래요?"

"소스 맛이 강하지 않고 부드럽구나."

음식이 계속 서빙되어 나오면서 그와 함께 이런저런 잡담이 테이블 위를 오가며 이어졌다. 가만있는 라희를 향해 옆에서 뿔테가 재차 먹어보라며 권해주는 음식들은 목구멍으로 쉬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이목을 생각해 무던히 식사를 하는 척 보이려 노력했다.

뿔테는 큰형의 이름이 선준이고 작은 형이 선재라고 넌지시 귀띔을 했다. 뿔테 이름이 선우인 것을 보면 이번 대는 선자 항렬 돌림자로 보였다.

이곳 메뉴는 전반적으로 보기에 좋은 정갈한 플레이팅과 다르게 기억에 남는 음식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루함의 간극 사이로 한 젓가락씩 집어 맛보다보니 배는 불렀다. 마지막으로 나온 밥과 국으로 식사를 마치자, 담당 직원이 물었다.

"후식은 과일과 떡 그리고 따뜻한 수정과입니다. 혹시 차가운 것을 원하시면 식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밖에서 드시겠습니까?"

어머님은 날씨가 쌀쌀하다며 안에서 먹겠다고 답했다. 아까 오는 길에 보이던 야외 테라스의 용도는 식사 마치고 후식을 먹는 곳이었다.

"오늘 가족끼리 모인 김에 선재네도 같이 자리했으면 좋았을뻔했군."

큰형이 중얼거리자 나영이 무심히 답했다.

"평일에 오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라서요. 일 없이 오시라 하기에는 좀 그래요. 고속도로를 타고 오는데만 3시간 넘게 걸리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모처럼의 자린데."

"자리야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만들어지겠지요."

나영은 턱을 치켜들며 거만하게 답했다. 그녀의 내리뜬 눈동자는 라희를 탐색했다. 의도적인 시선이었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불쾌한 시선을 외면했다.

그 뒤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직원이 내온 후식까지 끝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내내 어수선한 분위기를 살피던 뿔테가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운을 뗐다. 가족들은 그러라고 흔쾌히 답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라희 양. 조심히 들어가 봐요. 선우, 가는 길 운전 조심하고."

별 감정 없이 건네는 어머님의 말에 라희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려 답했다. 헤어지는 마당이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속눈썹 내리뜬 라희의 눈동자 속에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늘 저녁, 뿔테의 가족과 한정식집에서 맞닥뜨리는 바람에 정작, 하루 종일 마음속으로 준비했었던 말은 꺼내보지도 못 했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 마지막까지 흠 잡히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훈훈한 온기가 맴돌았던 실내를 벗어났다.

구두를 신고 바깥으로 발걸음을 떼자마자 이내 차가운 밤공기가 온몸에 스몄다. 라희는 순간적인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뿔테가 슬며시 가까이 다가와 손을 잡으려 내밀었다. 라희는 탁, 그의 손길을 차갑게 쳐냈다.

"아야, 왜 그래 우리 자기?"

그가 과장되게 아픈척을 했다. 라희는 대꾸 없이 묵묵하게 걸음을 재촉해 솟을대문 입구까지 걸어갔다. 뒤따라오던 뿔테의 발걸음도 라희에 맞춰 덩달아 빨라졌다.

"자기야."

대문을 막 벗어나 주차장이 아닌 앞을 향해 걷어가는 라희의 어깨너머로 뿔테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자기야, 어디 가."

뿔테가 놀란 목소리로 재차 불렀다. 라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 속도를 더 높였다.

"라희야, 송라희!"

뒤에서 뛰어오다시피 한 뿔테가 라희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라희는 몸을 돌려 어깨를 그러잡은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왜? 갑자기 왜 그래."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

그의 가족들과 보낸 자리에서 과도하게 신경 소모를 했는지 말을 꺼내기조차 싫었다. 라희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느닷 없이 왜 그러는데. 이유를 말해봐."

"......몰라서 물어요?"

라희가 똑바로 쏘아보며 차갑게 말하자, 뿔테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 괜찮었잖아. 우리 가족도 만나고. 나, 줄곧 자기를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거든. 특히, 부모님께."

"........"

라희는 순간할 말을 잃었다. 아니, 더 이상 그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한 라희가 창백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다시 몸을 팩, 돌려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커다란 손이 뻗어져 나와 가는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왜 그러는데."

그가 짜증 섞인 말투로 짧게 내뱉었다. 라희는 깊은 숨을 몰아쉬고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남은 한 손으로 앞머리를 연신 쓸어올렸다.

"하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낮은 한숨이 옅게 흘러나와 차가운 밤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뿔테는 못 박은 듯 우뚝 서서 그런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뿔테, 아니, 정선우 씨."

성까지 풀네임으로 짓씹듯 불린 뿔테가 심각한 표정으로 라희를 응시했다. 라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마주했다. 가슴속 치밀어 오르는 체증을 겨우 꾹꾹 눌러 가라앉힌 짙디짙은 눈동자를 위로 향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던 라희는 이윽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우리 그만 만나요."

"뭐?"

라희를 내려다보는 뿔테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져 처참히 일그러졌다. 갑작스러운 곤혹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흔들리며 라희를 향해 내리 꽂혔다. 라희는 굳어진 입술 끝을 끌어올려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흩트렸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냉소를 머금은 싸늘히 굳은 입을 벌려 의도했던 차가운 이별을 고했다.

"우리라고 부를 만한 일도, 실제, 만남이라고 할 것도 없었죠. 뭐가 되었든, 어떻게 불렸든, 하여튼. 이제 그만 봐요. 실은 오늘 저녁 이 말을 하기 위해 같이 식사하자 한 거예요."

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손목이 단단히 잡혀 있던 라희는 멀거니 서 있는 그를 향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라희야."

그의 처연한 눈매가 애잔한 목소리와 함께 귓가에 스쳤다. 그를 향하던 시선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희미한 조명이 차게 비추는 밤하늘 아래 무표정한 낯빛으로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정선우씨.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이에요. 앞으로 들을 말도 할 말도 더는 없어요. 있다 해도 듣고 싶지 않고, 말하기도 싫고요."

라희는 차분하게 가라앉힌 감정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명료하게 말했다.

"집까지는 택시 타고 갈 거예요. 그럼. 이만."

처음 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망연히 서 있는 그를 향해 라희는 담담히 말하고 잡힌 손목을 비틀어 풀었다. 힘없이 스르르 풀린 손목을 끌어안아 그대로 돌아섰다.

또각또각, 차가운 돌바닥 위에 울려펴지는 구두굽 소리가 텅 빈 거리의 정적을 갈랐다.

다행히, 뒤에서 따라잡는 다급한 발걸음도, 내밀어 뻗어진 손길도,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도 더는 없었다. 라희는 앞을 향해 똑바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어스름에 녹아든 구두굽 소리는 우뚝 멈춰 서 있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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