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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68화 (6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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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린 라희는 어깨 뒤로 불어오는 쌀랑한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잔뜩 오그라든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안는 커다란 팔이 그녀를 묵직하게 눌러왔다.

"추운가 보네. 하긴, 요즘 일교차가 심해서. 해 떨어지고나면 꽤 쌀쌀하더라."

그는 앞을 향해 턱짓했다.

"어서 들어가자. 안은 온돌 바닥이라 따뜻할 거야."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린 라희는 앞에 펼쳐진 으리으리한 한옥을 마주하고서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사극에 나올법한, 수학여행 때 가본 한국 민속촌의 고래 등 같은 기와 가옥이 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견실해 보이는 나무 기둥 사이사이 환하게 불을 밝힌 한옥 가옥은 시간을 거슬러 당도한 듯한 조선 시대 양반집 같은 고고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위풍당당한 솟을대문의 기와가 너울진 입구 현판 아래로,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직원이 마중 나왔다.

"가자."

멍하니 서 있는 라희의 손을 잡은 뿔테가 눈짓하며 대문 안을 가리켰다. 라희는 그에게 이끌려 입구의 묵직한 돌계단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솟을대문을 지나 높다란 담벼락 안으로 들어서자 티비에서 종종 나오던 종갓집 고택 같은 분위기의 기와집들이 숙련된 정원사가 솜씨 내 멋지게 다듬은 덤불과 높은 소나무 조경수를 사이에 두고 산개해 떨어져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반듯하게 깔린 돌길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현대적인 밝은 조명들 사이로 환히 불을 밝힌 기와들이 조명에 번뜩여 고급스러운 검은색 톤으로 반질반질 윤이 났다.

단정한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풍채 좋은 소나무가 마치 집안 어른 신인 대감마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반겼다. 우아하게 뻗어내린 검은색 기와 처마 끝자락 밑에는 구석으로 커다란 항아리들이 나란히 놓여 있어서 한옥 특유의 풍취를 더했다.

조금 더 지나자, 너른 석조 마당 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노천카페 같은 야외 테이블이 쭉 늘어서 있었다.

"어, 저기. 밥 먹고 나서 앉아있다 가야겠는걸."

뿔테는 야외 테이블을 가리켰다. 따뜻하고 아늑한 주홍빛과 노란 빛의 불꽃들이 춤을 추듯 위로 타오르는 모닥불의 가운데 씨뻘건 불길을 품고 타닥타닥 통나무가 타고 있어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분위기 있는 가을밤의 향취가 물씬 풍겼다.

"이쪽입니다."

직원이 정중히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기와집 기둥 사이사이 앞서 가는 한복 치마 뒷자락을 따라가다 보니 사극 드라마 속 풍경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라희는 잠시 우울했던 기분을 잊은 채 경탄 어린 눈으로 색다른 주위 풍광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뿔테가 빙그레 미소를 피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어?"

"네. 이런 곳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니 놀라워요. 게다가 박물관이나 문화재도 아니고 식당이네요."

"원래는 문화재였는데, 십여 년 전부터 궁중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어. 본디 조선시대 왕가의 고택이라나 봐. 음식뿐 아니라 한옥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인기가 많아. 외국인들이 특히 좋아한다더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앞서 가던 직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담한 기와집 독채의 미닫이문 앞이었다.

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앞에 닫힌 문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고택의 고즈넉한 풍광에 취해 잊고 있었던 찜찜한 기분이 되살아 났다.

그저 저녁 한 끼 가볍게 같이 먹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고풍스럽고 격조 있는 고택의 한정식집 이라니.

그간 부모님과 함께 가보았던 도심 속에 일식당처럼 그저 룸으로 분리 되어있어 한정식을 파는 음식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곳은, 아무래도 편하게 들러 식사하는 장소는 아닌 듯했다. 무슨 공식 모임이나, 비지니스 미팅, 가족끼리 특별한 날 식사하는 장소 같달까.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드물게 보이던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 역시 모두들 한껏 차려입고 격식를 차린 분위기라서 심중의 생각이 더 짙어졌다.

라희는 눈을 들어 앞에 닫혀있는 미닫이문을 응시했다. 한지로 마감된 고풍스러운 미닫이 띠살문의 세월의 흔적을 담은 정갈한 모양이 어쩐지 불길했다.

설마.....?

라희는 뿔테를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매를 곱게 휘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아니겠지. 설마.

불안과 긴장. 닫힌 문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하는 사이, 직원이 손을 뻗어 옛스런 분위기의 미닫이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옆으로 옮겨가는 문틈 사이로 방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하얀 테이블보가 단정하게 깔린 넓은 식탁의 모서리가 문틈으로 눈에 비친 순간, 설마설마했던 마음 한 구석의 똬리를 튼 의심은 또렷해졌다. 활짝 열린 방안 광경에 라희는 멈칫 놀라 굳었다.

"도련님 오셨네요."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안의 널찍한 테이블 주위로 낯선 사람 네 명이 고풍스러운 의자에 각각 앉아 라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낭패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긴가민가 우려했던 걱정이 현실로 드러났다.

나이 지긋한 온화한 인상의 노년의 언저리에 걸쳐있는 중년 부부와 삼십대 후반의 고집 있어 보이는 보이는 남자, 그리고 삼십 대 초반의 여자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라희를 향해 고정되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라희의 눈동자가 그중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멈췄다. 짧은 커트머리에 눈매가 매서운 여자. 김나영. 뿔테의 형수.

팽팽하게 쏘아보는 나영과 시선이 마주칠뻔하자 라희는 재빨리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라희의 시선이 바닥에 내리 꽂혔다.

방안 사람들이 뿜어낸 눈길이 이마 위로 가득 쏟아진다. 긴장으로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기운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선우, 늦을 줄 알았는데 시간 맞춰 왔구나. 오는 동안 차가 막히지는 않았니?"

힘 없이 바닥으로 떨군 귓가에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머니."

라희 옆에 서 있던 뿔테가 대답했다.

어머니? 그렇다면, 그 맞은편 남성은 아버지. 어느 정도 희미한 예상을 했었지만 사실로 확인되니 순간, 너무 놀라 정신이 아득했다. 긴장과 당혹스러움으로 눈가에 열기가 확확 치밀고 정신은 어지러워 이성을 차릴 수가 없다.

"밖이 쌀쌀한데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멀뚱히 서있는 두 사람을 향해 채근하듯 말했다. 겉보기 인상과 다르게 말을 시작하자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그의 어머니는 여느 주부처럼 푸근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내려뜨는 차가운 시선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뿔테는 슬쩍 라희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창백한 고개를 아래로 비키고 있는 라희에게 어색한 시선이 떨어져내렸다. 어르신들의 고요한 주시 속에서, 그는 잡고 있던 손에 가득 힘을 주어 라희를 방안으로 이끌었다.

맙소사. 그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다니. 숨이 턱 막혀왔다. 답답한 가슴이 옥죄듯 조여들어 숨을 쉴 수가 없다. 두 발 역시 땅에 꺼져 묻혀버린 듯 미동치 않는다.

라희는 앞을 향해 잡아끄는 손길에 딱딱하게 힘주어 버텼다. 이에 뿔테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라희를 내려다 보았다. 시선을 느낀 라희는 눈을 위로 들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애원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보였다. 라희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힘 없이 내렸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 당장은 어르신들 앞이었다. 은근히 노려보는 듯한 나영의 시선도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이 상태로 어디론가 내뺄 수도 없다.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갇힌 기분이었다. 아까 가게 이름을 물을 때 그가 망설이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낮게 내려 깐 눈두덩이 위로 그의 재촉하는 눈짓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생생히 느껴진다.

오지 않았더라면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다.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 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속으로 삼킨 작은 한숨과 함께 버티던 경직된 몸은 이내 풀렸다.

라희가 그의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뒤편에 서 있던 직원이 공손하게 묻는 말이 들려왔다.

"일행 분들이 모두 오셨으니 음식을 내 올까요?"

"그렇게 해요."

그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직원은 미닫이문을 다소곳하게 닫고 자리를 떠났다.

"이 아가씨냐?"

모두의 시선이 라희에게 집중된 가운데, 체격과 풍채가 좋아 보이는 그의 아버지가 뿔테를 향해 물었다.

"네. 말씀드렸던 송라희 씨에요. 라희 씨, 여긴 우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 형수."

뿔테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라희에게 눈짓했다. 라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말로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좋네요. 반가워요."

그의 어머니가 차분히 말을 건넸다. 고개를 숙인 채 질끈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뜬 라희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아 작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송라희라고 합니다."

"지난번과 분위기가 좀 달라졌네요."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나영의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장 때문에요. 형수님."

"아."

뿔테의 말에 나영이 알겠다는 듯 나직한 탄성을 흘리더니 덧붙였다.

"인상이 변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어쩐지 희미한 적의가 풍기는 날선 말투였다. 라희가 당황스러워하며 머뭇거리자, 뿔테가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를 권했다. 이어서 그는 라희 옆에 앉았다.

"그런데, 지난번이라니?"

그의 어머니가 나영을 향해 물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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