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늦은 오후, 자욱한 김 서린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라희는 커다란 바스 타월로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서 방으로 향했다.
라희는 침대 옆 화장대로 다가가 털썩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힘이 풀린 푸석푸석한 얼굴이 보인다. 죽은 듯 긴 잠에 취해있다가 느지막하게 눈 뜨고 일어나 씻었음에도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고 피부는 꺼칠해 보였다.
무기력한 작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라희는 손을 앞으로 뻗어 화장대 선반 위 스킨과 로션을 무심코 집어 들려다 순간, 멈칫했다. 지금까지 기초로 쓰고 있던 익숙한 스킨과 로션 병을 한동안 바라보던 라희는 눈을 들어 올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든 풀처럼 생기 없고 버석해 보이는 피부.
.....조금 변화를 줘 볼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 구석에 놓인 여행가방으로 향했다. 손잡이에 하얀색 긴 종이가 매달려 있는 채, 아직 항공사 태그도 떼지 않은 여행가방을 보며 멀거니 서 있다가, 몸을 수그려 가방 안에 들어있던 화장품 두 꾸러미를 꺼냈다.
꾸러미들은 어메니티로 하나는 비행기에서 받은 것, 다른 하나는 버즈 알 아랍의 에르메스를 챙겨온 것이다. 마치 백화점에서 막 구입한 새것 같은 포장 박스에 각각 담겨 있는 에르메스는 두 가지 색으로 갈색은 남성용, 와인빛은 여성용이다.
갈색 상자 쓰인 떼르 데르메스 (TERRE D`HERMES)라는 글자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던 라희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한 흔적. 증거. 사실.
......바흐.
어쩌자고, 남성용 화장품 까지 죄다 챙겨왔을까. 라희는 수그린 시야 속 몰려드는 어지러운 생각을 치우려 고개를 작게 저어 흔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꺼낸 와인빛 박스를 제외한 것들을 다시 여행가방 안으로 우겨넣었다. 라희는 손에 쥔 켈리 깔레쉬라고 쓰인 와인빛 박스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개봉했다.
거추장스러운 포장을 벗겨낸 사각 케이스의 하얀색 로션과, 투명한 장미빛의 스킨을 손에 들고 다시 화장대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거울을 보며 물기 어린 손바닥으로 토닥이는 피부 위로 은은하고 여성스러운 향기 속에 살짝 배어있는 머스크 향이 스몄다.
피부 결을 정돈하려 매만지는 라희의 시선이 앞에 놓인 거울을 비껴 내려 화장대 선반 위로 향했다. 단출한 화장대 위를 배회하던 시선의 끝은 자연스레 나란히 놓인 새것 같은 스킨과 로션으로 향했다.
에르메스. 속칭 명품. 그것도 명품 중의 명품이라 이름난 브랜드. 그저 그런 형편의 평범한 대학생으로서의 흔한 일상 속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비일상의 물건이 마치 존재를 과시하려는 듯 매끈한 외곽선을 빛내며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저런 사치스러운 물건이 응당 자리를 지키고 있을 법한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드레스룸의 파우더 부스가 아닌, 작은 분리형 원룸의 초라한 화장대 위에. 기묘하리만치 생경하고 이질적이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에 난입한 말 없는 누군가처럼.
어울리지 않아. 똑똑히 알고 있다. 오늘 개봉한 이상, 매일 같이 사용해 남은 용량을 전부 소진하고 나면 개당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기초화장품 단품을 구입할 능력도, 여력도 없을 거라는 것쯤은. 그리고 그 사이, 부자연스러운 비일상을 경험하게 해준 그와의 시한이 끝날 거라는 것도.
그렇게 되면, 가슴속 무겁고 답답하게 드리워진 먹먹한 기분이 사라질까.
라희는 아래로 향한 속눈썹을 들어 올려 힐끗, 벽에 걸린 시계를 흘겼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어젯밤, 뿔테는 그 와중에 기어이 저녁을 함께 먹자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병원 진료시간이 마감되는 6시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집으로 찾아올 터였다.
어제 일을 떠올린 라희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참 긴 하루였다. 예정도 없이 시골집에 불쑥 찾아온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피로를 누적시켰다. 지쳐서 세상을 등진 시체마냥 죽은 듯 잠에 취해 일어나도 변함없이 맞닥뜨려야하는 차가운 현실에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아래를 향한 초점 없는 눈동자는 멍하니 화장대 위를 배회했다.
저녁, 약속했으니 나가서 같이 먹어야겠지.
한정식이라 했던가.
라희는 부모님과 함께 가 보았던 한정식집을 떠올렸다. 칸칸히 룸으로 분리되어 있어 주변의 방해 없이 그저 조용했던 공간에 미닫이문이 열리면, 멋스러운 접시 위에 정갈하게 놓인 음식들이 차례로 상위로 날라져 들어왔었다.
아마도 뿔테가 예약할 거라던 한정식 집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고요한 밀실. 마주 보며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 좋은 장소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작은 한숨이 화장대 위로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오늘, 저녁 뿔테에게 못내 하지 못 했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흐와 계약이 완전히 끝난 뒤라면 몰라도, 지금 이 상태로서는 뿔테와 만남을 지속해 보았자 라희에게는 혼란과 불안이, 뿔테에게는 내내 보답받지 못할 감정의 낭비적 소모만 지속될 테니.
그런 껄끄러운 말을 꺼낼 자리니까. 라희는 눈을 똑바로 들어 거울에 비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만남에 대한 예의로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나가야겠지. 만약,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 자리가 된다면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라희의 입가에 헛헛한 실소가 번졌다.
뿔테를 마주한 상태에서 정작 해야 할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한없이 나약한 변명을 뇌까리거나, 핑계 대며 회피하지 말아야겠지.
마음을 다 잡으며 힘 없이 내려뜬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투명 사각 정리함 안에 각각 들어있는 메이크업 화장품이 보인다. 라희가 가지고 있는 메이크업 용품이라 해봤자 베이스인 입자 고운 파우더 팩트와 색조 화장품인 스틱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틴트 립스틱이 전부다.
라희는 손을 내밀어 케이스 안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놓여있던 파우더를 집어 들었다. 로션으로 마무리한 얼굴 위에 파우더 퍼프를 톡톡 찍어 발라 피부 결을 가볍게 정돈했다.
눈을 든 거울에 비친 핑크 아이보리 톤의 파우더가 옅게 내려앉은 얼굴색은 로션만 발랐을 때보다는 한결 화사했다. 이어서 정리함에서 차곡차곡 화장품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 아이라인을 그리고 그 위에 그레이 카키색의 은은한 펄이 들어간 셰도우 스틱을 덧발랐다. 정돈된 눈매를 마스카라로 마무리를 하고, 연분홍 색의 틴트 립스틱을 입술 위에 덧발랐다. 얼굴 화장이 끝났다.
화장을 마친 라희는 거울 속의 스스로를 향해 설핏 미소 지어 보이고 난 후,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안 구석에 놓인 옷장으로 걸어갔다. 옷장 문을 연 라희는 허탈하게 눈을 내리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본의 아닌 사정 때문이었지만,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고급스럽고 단정한 옷들이 옷장 한가득이다.
옷장 안, 켜켜이 쌓인 옷상자 중 하나를 개봉해 열었다. 꺼내 들어 펼치니 단정해 보이는 은은한 베이지색의 원피스였다. 아무 장식 없이 심플한 라인으로 떨어지는 원피스는 어느 장소에나 무리 없이 어울릴 모양새였다.
라희는 원피스를 몸에 걸쳤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피스를 입었으니, 남은 것은.
구두.
구두 역시 마음을 무겁게 침잠시키며 부재중인 누군가가 떠민 것들 중에 골라 신어야 하겠지.
맥이 풀려 아래로 내리 깔린 라희의 시선의 끝이 현관 문을 향했다. 구두까지 정했으니 이제, 저 문이 열리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현관을 응시하던 라희는 고개를 들어 힐끗 시계를 쳐다보고는 침대로 향했다. 침대 모서리에 이르자 그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머지않을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는 고요한 정적 속 방안에는 일정한 간격의 시계 초침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낮게 울렸다.
―띵동.
이리저리 혼재한 의식의 흐름 속에 부유하던 정신을 깨우는 초인종 소리가 아스라이 귓가를 파고들자, 라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와.”
열린 현관 문 앞에 선 뿔테는 라희를 내려다보며 놀란 듯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음 지었다.
“진짜, 예뻐. 이러고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표정 없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라희를 향해, 뿔테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로 중얼거렸다.
“화장 한 모습 처음 보는데. 물론 그전에도 예뻤지만 화장하니 분위기가 약간, 다른 느낌이야. 난 자기가 하늘하늘 순하고 청초한 분위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 색달라. 마치 차가운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고 도도해 보인달까. 전엔 은근 섹시했다면, 이젠 대 놓고 섹시한데?”
“가요.”
라희는 흰소리 집어치우라는 듯, 짧게 대꾸했다. 바닥에 가지런히 모아둔 아이보리색 구두에 발을 끼워 넣어 신고서 현관을 나섰다. 가벼운 걸음으로 앞에 서 있던 그를 스쳐지나 계단으로 향하는 라희의 팔목을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천천히 가. 먼 데도 아니고 같은 강남이라 차 타고 삼십분 남짓이면 도착인데. 지금은 그냥 예쁜 우리 자기 보면서 마냥 방안에 있고 싶은데.”
“한정식집이면 예약시간 있을 거 아니에요.”
라희의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가, 라희의 말에 이제야 막 시간이 생각난 듯 미간을 설핏 좁혔다.
“음. 그렇긴 하네.”
하지만 못내 아쉬운 듯 뿔테는 라희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 깊은 눈동자가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한참 동안 라희를 들여다보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 아쉽다.”
뒤로 고개를 돌려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던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라희의 손을 깍지 껴잡았다.
“뭐, 어쩔 수 없지. 늦는 것도 질색이니. 예쁜 아가씨, 이제 갑시다.”
*
길에 세워놓은 그의 차 조수석의 시트에 몸을 묻은 라희는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짙은 가을로 물든 도시의 거리는 바닥에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이 소복이 내려앉아 쌓여있었다. 차가 지나는 길 가로 저문 어스름 속 화려한 조명에 흩날리는 낙엽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벌써,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
사계절이 지나야 그와 끝나려나. 하릴없고 부질없는 감상들이 어두운 풍경 속 낙엽을 담은 눈동자 위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 위로 헛헛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문득 창밖 풍경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가만, 이쪽 방향은 전에 그의 형수 생일파티..?
참, 강남이라고 그랬지.
뿔테가 한 말을 뇌리 속에 떠올린 라희는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그를 곧게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느낀 듯, 눈을 앞에 고정한 채로 입을 작게 벌려 물었다.
"왜?"
"우리, 어디로 가나요?"
이 말은 전에 바흐에게도 수없이 했던 물음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이라도 그 안에 담긴 어조는 달랐다. 답답한 기색 없이 가벼이 물어보는 라희를 향해 뿔테가 말했다.
"한정식집. 아까 말했잖아."
"그러니까, 거기 명칭이...."
"아."
막 입술을 달싹여 목적지를 말하려던 뿔테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바흐 흉내라도 내는 건가. 서로 만나 지도 않고, 만날 일이라고는 없는 그 둘을 비교하는 라희의 의아심을 담은 눈매가 뿔테를 훑었다. 뿔테는 무언가 생각할 말을 고르려는 듯 이마에 미미한 주름을 새긴채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라희는 고개를 고정해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곱게 접어 두었던 기억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동안 뿔테가 집요하게 식사 약속을 받아낸 경우는....
설마?
눈을 들어 찬찬히 면밀히 그를 살펴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라희를 향해 이윽고 뿔테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름을 알고 있으려나? 한정식으로는 좀 유명한 곳이라서."
역시 의뭉스러워. 라희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뾰족하게 물었다.
"어딘데요?
"그게.."
왜, 즉각 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는 걸까. 짙어진 의문이 가라앉은 눈매 끝에 닿은 그는 고개를 돌려 라희를 쓱 쳐다보며 짐짓 태연하게 답했다.
"필경재."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