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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66화 (6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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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아래를 적셔오는 부드러운 자극이 열기를 피워올려 머릿속이 흐려질수록 이율배반적으로 이성은 차게 식어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피부 위에 전해 주는 느낌, 입술 위로 남기는 뜨거운 키스, 부드러운 터치 그리고 부끄러운 곳은 간질이는 야릇한 느낌. 이 모든 것은 어찌 정의해야 할지 아직 미정이다. 라희는 손을 내밀어 배꼽 아래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스친다.

확실히 뿔테가 싫지는 않다. 하지만, 마냥 정신을 잃을 만큼 좋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홀린 듯 심취해 홀딱 빠져든 상태도 아니다.

시골집까지 찾아온 그는 어느 정도 진심으로 보이는데, 현재로서는 그 진심에 보답해줄 그 어떤 여력도 능력도 없다.

처음은 어땠을지 몰라도 이런 상태에서 그와 몸을 섞는다면, 너무 스스로가 비참해 지지 않을까? 단순한 욕구로 육체관계만을 원한다면, 몸이 동하는 상태에서는 순순히 응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라희는 뿔테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가슴속에 시커먼 자괴감이 스민다.

계약. 아직, 10개월 남았다.

계약서 대로라면 내년 여름에야 끝나니까.

남은 10개월 동안, 몸은 바흐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원하면 달려가고

그가 원하면 안긴다.

그 사실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분명, 객관적으로 훌륭하고 다정한 뿔테지만, 지금 라희에게는 그 모든 조건과 스펙이 필요 없었다. 가끔, 따뜻한 그가 좋았지만 이렇듯 사사로운 깊은 공간까지 성큼 다가오는 뿔테는 낯설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를 냉정히 내치지 못하는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이 넌더리가 났다.

차갑게 식은 머리 아래, 달구어진 몸이 호흡하는 가슴이 얕게 오르내렸다. 허망한 눈길이 그에게 드리워졌다.

"......선우씨."

라희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음절 음절 힘을 주어 불러 보았다. 갑자기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싸한 목소리에, 뿔테는 움직임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깨 위로 아직 거친 숨결이 뜨겁게 뿜어져 나왔다.

"왜?"

라희는 미간을 찡그리다, 짙은 한숨을 토해내며 그를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만지던 손을 뗐다. 눅진하게 녹아들었던 열기가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만요."

이렇듯 바라보고 있는 뿔테는 결코 모르겠지만, 어차피 라희가 원해도, 그가 원해도 바흐가 돌아오면 계약기간 동안은 그저 몰래 육체만 나눌 사이다. 바흐가 만남을 용인했다고 해도, 불쾌해 보이는 것은 사실. 라희의 낮아진 눈동자 속에는 지난번 반얀트리에서의 바닥에 엎드려 기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때처럼. 그런 일이 또 생기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끝이라고, 물러서라고 따끔하게 말해야 하는데 막상 그를 마주하면 뿔테를 내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리석고 미련하다. 아마도, 이렇듯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 안 따스한 온기와 뜨거운 열망 때문이겠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라희의 모습에, 뿔테는 수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똑바로 라희 앞에 섰다. 그는 벽에 팔을 짚고서 고개를 라희를 향해 기울였다. 라희는 키가 큰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똑바로 마주 보는 눈빛이 진득하게 엉겨 붙었다.

서로 노려 보듯 마주 하는 중에 그가 내뿜는 열기와 그가 불러 일으킨 열기가 공기 중에 짙게 흩뿌려져 살갗 위로 느껴졌다. 눅눅한 열락의 흔적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한참 라희를 내려다보다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힘든 한 숨을 다스리며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후. 알았어. 아직도 그 상태구나."

그는 눈을 잘게 깜빡이고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살며시 귓가에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라는 거 알지? 이 상태에서 참는 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들다고."

그는 터져 나오는 숨을 억누르며 좁힌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천천히 뺨과 눈 주위를 쓰다듬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 나 아무래도 오늘부터는 절제와 인내의 화신으로 불려야 할까 봐. 오늘은 이만할게. 대신."

그는 말을 멈추고 라희를 응시했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보기라도하겠다는 듯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입가에 일그러진 듯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내일, 저녁 같이 먹기로 약속해."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마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함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이 라희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라희는 굳어진 그의 입술을 보고 있다가 미동 없던 눈을 아래로 내려서 한번 깜빡이고는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그래요."

이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원하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어차피 오늘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밥을 살 생각이었으니까.

"좋아. 약속한 거다. 내일 저녁."

다짐 받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라희의 머리 위로 차분히 내려앉았다. 라희는 입을 열어 짧게 답했다.

"네."

"음...."

그가 생각을 하려는 듯 눈을 허공 위로 잠시 들어 올렸다가 입술 끝 안쪽을 잇새로 짓씹으며 말했다.

"뭘, 먹지? 메뉴는......."

"하아.."

라희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마당에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으로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라희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생각에 지친 피로한 한숨이 다시 터져 나왔다.

"내일, 가서 정해요."

짓씹듯 차갑게 내뱉는 라희를 향해 그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냐, 지금 정해야지 그래야 식당을 예약할 거니까. 한정식. 일식. 골라."

이 와중에 메뉴 타령이라니, 생각의 전환이 빨라서 참 살기 편하고 좋겠다는 냉소가 피식 흘렀다. 대답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한 기색에 라희는 차갑게 말했다.

".....아무거나요."

희미한 비아냥이 어린 음색에 그가 입매를 굳히고 있다가 느른하게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식."

고개를 돌려 얼굴 위로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미끄러트린 라희는 팔을 앞으로 뻗어 그의 가슴께를 슬며시 힘주어 밀어냈다. 벽에 몰린 라희의 몸을 가두듯 짚고 있던 그의 팔이 벽을 떠났다.

"이제, 가요. 쉬고 싶어요."

뒤로 물러난 그를 향해 라희가 현관 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눈짓했다. 그는 의외로 선선히 물러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등 뒤에, 라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가요."

달깍, 재빨리 문을 닫고서 잠갔다. 이윽고 혼자가 된 라희는 문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딱딱한 현관문이 뒷머리에 닿았다.

"하아....."

라희는 손을 들어 이마 위로 흩뜨려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있으려니 현관 문 위 주위를 밝히던 오렌지색 센서 등이 꺼졌다.

뒤로 기대 조금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허탈한 한숨이 어두운 공기 중에 뿔뿔이 부서져 녹아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절망에 가까운 회의감에 뒤범벅된 환멸과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빈속에서 신물처럼 차올랐다. 라희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내리 눌렀다.

"후......"

라희는 입을 다문 채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무거운 머릿속으로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의 노곤함이 몰려왔다. 눈을 슬며시 위로 뜨니 어두운 방안이 보였다.

라희는 침실 쪽을 멀거니 응시했다.

침대. 그냥 가서 누워야겠다. 잠이라도 푹 자고 나면, 이 모든 게 꿈이 었을지도 모르잖아. 오빠의 사고도, 저 어둠을 닮은 새카만 눈빛의 그와의 계약도. 어쩔 수 없이 상처만 주게 되는 누군가의 진심도.

지독한 악몽.

허나, 꿈일 리가 없다.

차라리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외쳤던 마지막 대사처럼, 내일은 내일의 또 다른 태양이 뜨길 기다리는 편이 낫겠지.

피식, 입가에 삐딱하게 그려진 한숨을 삼키며 라희는 어두운 방안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꿈결에 잠겨 몽롱함에 한껏 취하고 나면, 다시 내일일 테니까.

털썩, 라희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침대 주위로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어두운 방안으로 비쳐든 산란하는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색색으로 물들였다. 라희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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