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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뿔테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으며 눈매 끝이 곱다랗게 휘었다. 그가 라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생긋 미소 담은 입술이 내려와 굳게 다문 입술 위로 순식간에 포개졌다.
".....!"
귓바퀴 뒤쪽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손은 못 박힌 듯 가만 서 있는 라희의 턱을 감싸 위로 조금 들어 올렸다. 맞닿은 부드러운 입술이 살살 비벼지더니 일자로 다문 입술 틈 사이로 촉촉한 혀끝이 벌리고 파고들어와 안의 뜨끈한 속살을 날름 핥아냈다.
"여, 여기는!"
급히 뻗은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얼굴을 떼내자, 뿔테는 좁힌 눈매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아쉬운 듯 제 입술을 혀끝으로 느릿하게 핥아냈다.
"알아, 자기 집인 거. 이제 부모님께 인사도 마저 드렸으니 허락도 받은 셈이고."
위로 쏘아보는 라희를 향해 그가 손을 내밀어 좁은 턱을 손끝으로 느리게 쓸어내렸다. 마치, 살결의 부드러운 감촉을 손끝에 담으려는 듯.
"그간 멀리 떨어져 있다가 이렇게 자기가 지척에 있으니까 참을 수가 없는 걸. 진짜 인내심의 한계야."
그가 앞에 서 있는 빳빳한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아 라희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았다.잔뜩 굳은 정수리 위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작은 한숨을 닮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우리, 한지도 꽤 되었는데 키스도 못 한다면. 아마 미쳐버릴걸. 지금 이렇게 가까이서 자기의 달콤한 향기를 맡는 거 자체가 거의 고문 수준이라고."
뿔테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힘껏 등을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품 안은 늘 그랬듯 넓고 따뜻했다. 이내 여린 목덜미 살갗 위로 내려앉은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들이 마시며, 내쉬는 애타는 숨결에, 어쩐지 심장 안쪽이 꽉 조이는 것 같았다.
빈틈 없이 마주 닿은 가슴 너머로 규칙적이고 둔중하게 살갗 위를 울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그는 라희의 목등에 코를 묻고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좋다. 자기 냄새."
간질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 하지 마요."
마음이 먹먹해진 라희가 입술을 작게 달싹여 말하자, 그는 가슴에 한껏 담은 숨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알아. 그래도 조금만, 자기야. 조금만..."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뿔테의 낮은 음성에 라희는 긴 숨을 내쉬며 눈을 아래로 내리감았다가 떴다. 등을 감싸오며 죄는 단단한 팔과 몸을 감싸 안는 따스한 체온에 거부할 수 없는 안락감 스민다. 라희는 짧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
그의 품에 잡혀있던 라희는 천천히 두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감았던 팔을 끌어내려 풀어 그의 품 안을 빠져나왔다. 떨어지는 손끝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가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가만 내려다보는 가운데, 떨떠름한 표정의 라희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저벅, 등 뒤 열린 문틈으로 거실로 돌아오는 엄마의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방안을 향해 부르는 말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라희야, 나와서 과일 먹으렴. 선우 군도 나와서 좀 먹어요. 아까 가져온 거 중에 몇 개 꺼내봤어요."
라희 앞에 서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려 그는 문틈 너머 거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라희의 팔목을 잡고서 어색한 미소를 담은 입술이 열렸다.
"....가자. 자기네 집이 과수원인 줄은 몰라서, 올 때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왔거든."
*
"지금 갈 거니?"
"네."
"내일 간다면서."
아쉬움이 담긴 엄마의 말에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옆을 향한 라희의 시야에 길 앞에 서 있는 뿔테의 하얀색 중형 세단 자동차가 가득 들어왔다.
떠날 채비를 하느라 차에 시동을 걸어 둔 뿔테가 운전석에서 나왔다. 그는 얼굴 가득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라희가 서 있는 대문 앞까지 다가와 곰살궂은 말투로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일주일 만에 떠나보내려니 많이 아쉬우신가 봅니다. 고운 따님, 제가 책임지고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리겠으니 걱정 마십시오. 장모님."
엄마는 뿔테를 향해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그래요. 버스보다야 아무래도 자가용이 먼 길 가는 데는 훨씬 편하겠죠. 잘 부탁해요."
"......갈게."
돌아서려는 라희의 팔에 엄마의 따스한 손이 감겼다. 조금 앞서 걸어가는 뿔테의 등이 보이는데, 뒤에서 엄마가 낮게 속삭였다.
"돈은 오늘 중으로 통장으로 부치마. 항상 미안하고 늘 생각하고 있는 거 알지. 딸."
"어, 응. 아빠에게는 먼저 간다 전해드려줘."
"그래. 네 아빠는 또 어디서 친구들과 화투 치고 있겠지. 딸내미 가는 것도 못 보고."
"내일 아침에 간다고 말해 놨으니 지금 가는 것은 모르실 만도 해. 갈게."
엄마의 팔을 벗어난 라희는 뿔테가 열어둔 채 기다리는 조수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차를 타는 것은 처음이라 문 앞에서 조금 멈칫하다가 뿔테의 눈짓을 받고 이내 탄탄한 가죽 시트 위에 등을 묻었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장모님."
"그래요. 곧 해가 지니 운전 조심하고."
조심히 운전하라는 엄마의 배웅에 빙긋 웃던 뿔테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가 건넨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나누는 소리는 닫힌 차 문에 막혀 들려오지 않았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유리 너머로 건너다 본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신경 쓰였다. 조바심에 못 이겨 안전벨트를 풀고서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막 했을 때, 대화가 끝났는지, 엄마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뿔테는 엄마를 향해 허리를 구부려 넙죽 90도 인사를 하고 난 뒤 몸을 돌려 자동차로 걸어와 운전석에 올라탔다.
"피곤하면 휴게소에 들러서 커피도 마시고. 조심히 가요."
열린 창문 너머로 엄마가 다가와 말했다. 뿔테는 안전벨트를 매면서 입을 열었다.
"네. 걱정마십시오. 저 이래봬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면허증 따서 자동차 몰기 시작해 운전 경력이 꽤 됩니다. 지금까지 무사고고요."
"진짜, 갈게. 엄마."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느라 시골집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엄마를 뒤로하고 뿔테가 운전하는 하얀색 세단은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일주일 전, 처음 도착했을 때 터벅터벅 걸어왔던 길을 자동차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오후 조금 지났는데 벌써 해가 지네. 낮이 정말 짧아졌어. 이제 정말 겨울이 가까이 오나 보다. 추운 건 싫은데."
뿔테의 말에 라희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왕복 2차선 좁은 시골 지방도 옆으로 넓게 펼쳐진 추수가 끝난 들녘 위로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노랑, 주홍, 적색의 따사롭고 다채로운 빛의 향연이 저녁노을로 펼쳐져 시야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서울까지 가다 보면 어두워지겠는데요. 밤길, 위험하지 않을까요?"
라희는 들판의 끝 산자락 너머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더 안전해. 최소한 앞뒤에 차가 있는지 없는지는 바로 알 수 있으니까. 물론 가끔 조명 끄고 달리는 스텔스 같은 자동차도 있지만."
그는 운전을 하느라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 채 눈동자를 굴려 라희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 안 그의 눈꼬리가 곱게 접혀져 희미한 웃음을 담았다.
"좋다. 올 때는 혼자였는데 갈 때는 둘이니까. 이번 주에도 집에 머무를까 봐 노심초사했거든. 그렇게 되면 다시 일주일이나 못 보는 거잖아. 보고 싶었어. 지독히도."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라희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그에게 라희가 앞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고정하고서 입을 열었다.
"앞을 보고 운전해요."
뿔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 모습 오래 보려면 안전이 제일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조수석에 앉아있는 자기를 보니까 새삼,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차 조수석에 자기를 태우게 될 줄이야."
라희는 고개를 돌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엄마가 정성들여 깎아 내온 과일과 그 뒤 커피까지 마시고 난 뒤 쫓기듯 뿔테의 차를 타고 급히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뿔테 두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그 자리에서 어떤 말이 튀어 나올지 몰랐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엄마가 다니지도 않은 학원일을 꺼내자, 뿔테가 눈매를 좁혀 힐끗, 라희를 보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을 때, 라희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서야겠다고 결심했다.
라희가 굳은 얼굴로 뿔테를 향해 언제 돌아갈 거냐는 말을 꺼내자, 뿔테가 엄마의 표정을 살폈고, 눈빛을 받은 엄마가 사람 좋은 인자한 미소로 이왕 왔으니 시간만 허락한다면 저녁까지 먹고 가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을 때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라희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은방에서 급히 짐을 챙겨서 거실로 나오자, 엄마가 깜짝 놀라 했고, 라희는 잊고 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핑계로 그와 함께 돌아가야겠다고 집을 나선 참이였다.
한참을 달린 눈앞에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뿔테는 서울 방향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나타난 표지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요 앞 휴게소에 들릴까?"
"아니요. 아까 커피 마셨으니까 괜찮아요. 혹시 졸리면 들려요."
"지금은 괜찮아. 혹시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
귓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어느덧 어둑해진 길가에 서울까지 90Km라 쓰인 녹색 표지판이 스쳐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