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63화 (63/214)

63

두툼한 삼겹살이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고기 밑 자락의 백색 지방은 딱딱하게 굳어서 노릇하게 변했고, 연분홍색 살코기는 이미 먹음직스러운 베이지에서 갈색으로 익었다.

작은 면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식육식당에서 사온 삼겹살은 면사무소, 경찰서, 농협이 모여있는 삼거리에 위치해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만큼 지방과 고기가 비율 적절하게 잘 배열되어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고기질은 굉장히 좋았다.

너무 기름지지도, 퍽퍽하지도 않은 모양새로 달구어진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기름을 가득 머금고 바삭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근사한 냄새와 함께 자글거리는 삼겹살이 올려진 불판 위에는 엄마의 고기 집게만 오갈 뿐 누구의 젓가락도 가까이 오가지 않았다.

탁, 탁, 익은 고기 가장자리에 잔뜩 고인 기름이 튀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 한가운데 정적을 갈랐다. 반찬이 가득 차려진 커다란 상 위로는 어색한 눈빛들이 방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음,”

앞에 앉은 아빠가 불판 위 고기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라희는 눈을 들어 아버지를 힐끔 살폈다. 원래가 과묵한 분이다. 오늘은 특히, 더.

성인이 된 딸과 관련된, 거기다 학업 때문에 타지에 혼자 살고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본가까지 불쑥 들어온 낯선 남자를 점심 상에서 마주한 아빠의 입매는 유난히 힘이 들어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불판 위에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는 엄마의 희미한 웃음 어린 눈빛만이 뿔테를 향할 뿐, 상을 마주 보고 앉은 아빠와 라희는 눈을 내리깔고 서로의 기색을 살피며 애먼 반찬 그릇과 그 옆에 놓인 막걸리 병을 배회했다.

어색했다. 갑자기 집까지 다짜고짜 찾아들어온 뿔테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라희는 목구멍을 타고 자연스레 올라오는 한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딸 가진 아버지가 그러하듯, 아빠는 일요일 오후 갑작스레 집에 찾아온 딸과 관련된 낯선 젊은 남자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이성의 존재에 대한 낌새를 풍기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곧잘 성실하게 학업을 지속 해온 라희에게는 아직 남자친구가 없을 거라 굳게 믿었던 아빠였다.

라희가 조심스러운 눈으로 아빠의 얼굴을 살피자, 아빠가 난감한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역시, 남자가 여자 집까지 찾아올 정도면 가벼운 사이는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성을 두고 아빠를 마주하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어색함을 느낀 라희는 급히 눈을 내렸다.

이 숨 막힐 듯 답답하고 갑갑한 분위기의 원인은 순전히 뿔테. 라희는 내리깐 눈매로 뿔테를 흘겼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인 뿔테는 긴장된 기색 없이 상 한 면을 차지하고 앉아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뭐가 좋은지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이름이 정선우랬나. 선우 자네, 학생은 아니라 했고. 그럼 현재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한참이나 상을 내려다보며 침묵하던 아빠가 어색함을 깨려는지 눈을 들고 뿔테를 향해 신상을 물었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뿔테는 예의 바른 어투로 바로 대답했다. 순간, 불판 위를 오가던 엄마의 손이 멈칫했다.

"병원?"

아빠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딸아이와 깊게 관련된 남자인 만큼, 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초리였다.

"네. J대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강남의 여성병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가끔, 경상북도 U군의 정형외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구요. 여성병원은 큰 형이, 정형외과는 작은 형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아빠는 조금 놀란 듯 다시 입매를 내리며 침묵했다. 반면 좀 전부터 뿔테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매는 노골적인 호감으로 부드럽게 휘었다. 엄마는 상냥한 미소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럼 형제가 전부 의사 신가요?”

“아, 예. 위로 두 형이 있고 제가 막내입니다.”

“어쩜. 형제가 모두. 그러기 정말 쉽지 않은데. 어머님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아, 예. 그러기엔 저의 어머니도 의사십니다.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계시지만요.”

뿔테의 덤덤한 대답에 엄마의 눈이 놀람으로 바뀌었다.

“그래요? 그럼 아버님께서는..”

“아버지는 사업하십니다.”

뿔테의 대답을 들은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의사 집안, 그리고 사업가 아버지. 의사인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있는 집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리라.

라희와 눈이 마주친 그는 득이양양하게 빙긋 웃었다. 마치, 라희 부모님이 자신을 반길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듯이. 당당했던 여유의 이유였을까.

뿔테의 형제가 모두 의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의 어머님까지 의사인 줄은 몰랐다. 아버님을 빼고 집안 전체가 의사라니. 새삼 대단하다 생각되었다. 거기다 아버지는 강남의 커다란 오피스텔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사업가. 아마 그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지금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반짝이는 엄마의 눈빛은 더욱 빛나려나.

라희는 눈을 들어 잠시 엄마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집안의 의사. 키 크고 깔끔한 외모.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

만약,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일요일 아침나절을 달려서 연고도 없는 충주 시골의 과수원에서 낯선 타인들과 점심 상을 마주하고 있는 그가 마냥 당황스럽고 부담스럽지만은 않았겠지. 되려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되려나. 라희는 바닥을 향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나이가 어찌 되는가?”

침묵을 깨고 아빠가 다시 물었다.

“올해로 스물여덟입니다. 초등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군대는 다녀왔는가? 의사들은 늦게 간다는 말을 들어서 말일세.”

“예. 원래대로라면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로 복무해야 되는데 저는 그냥 학기 중 현역으로 다녀왔습니다. 현역이 공중보건의 3년 보다 복무 기간이 짧아서요.”

“드문 일이군. 복무 지역은 어디였는가?”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육군........”

낯선 남자에 대한 정체 파악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인 것처럼 호구조사 질문을 하던 아빠는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이내 군대로 화제를 넘겼다. 뿔테가 복무했던 부대는 아빠와 같은 부대는 아니었지만, 동일 지역이라서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군대 이야기가 오갔다.

남자 둘이 군대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라희는 앞에 놓인 상 위의 노릇한 애호박 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이 바삭하게 갈색으로 잘 부쳐진 애호박전은 정갈하게 정방형으로 썰려 하얀 접시 위에 놓였다. 아침에 뒤 뜰에서 딴 잘게 채썬 애호박과 푸릇한 풋고추 그리고 통통하게 썬 당근을 한데 부침가루에 버무려 넉넉하게 기름을 둘러 달군 후라이팬에 부쳐낸 것으로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달달한 맛이 일품인 엄마표 음식. 이 시골 집에서 라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자 반찬이다.

라희가 부침개를 가만 보고 있자, 갑자기 상위에 젓가락을 든 손이 불쑥 나타나 애호박 전을 한 점 들어 라희의 밥공기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였다.

“좋아하는 건데 식기 전에 먹으렴.”

엄마의 애호박 전은 뿔테의 밥 위에도 얹어졌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먼 길 오느라 시장했을 텐데. 차린 것은 없지만 어서 들어요. 삼겹살도 이제 다 구워져서 먹기만 하면 돼요.”

엄마의 말에 뿔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시원스러운 웃음을 띠고 답했다.

“라희 씨가 좋아하는 거라죠. 맛이 기대되는데요. 잘 먹겠습니다. 장모님.”

“어머?! 장, 장모는..”

불쑥 불린 장모라는 말에, 엄마가 깜짝 놀라며 눈가에 가득 웃음을 띠우자, 뿔테가 덧붙였다.

“아직 어색하신가요? 저는 마음속으로 내내 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여기 오기 전부터 라희씨 어머님을 만나면 꼭 장모님이라 불러 보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엄마의 두 뺨이 발그레 해졌다. 뿔테는 짐짓 라희를 보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아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만 한 잔 꼭 따라 드리고 싶습니다. 장인어른,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

건강을 위해 유산균을 마신다는 핑계로 상위에 점심 반주로 올라가 있던 막걸리 병은 어느새 뿔테의 손에 들려있었다. 뿔테가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빠는 빈 잔이 들린 손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뿔테가 따라주는 막걸리 잔을 들고 한참 보고 있다가 옆에 앉은 엄마가 눈짓하니, 라희를 한번 힐끗 보고서 그대로 들이켰다.

"음. 따라줘서인지 맛이 더 좋군."

“그러십니까. 다음에는 필히 차를 두고 와야겠습니다.”

뿔테가 경쾌하게 말하자, 아빠는 입가의 물기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지. 술은 혼자 마시는 것보다야 둘이 마시는 게 더 맛있으니 말일세. 어서 들게나. 여기 놓인 나물이며 반찬은 전부 집사람이 텃밭에서 손수 기른 거라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의 아빠가 그에게 눈짓하며 식사를 권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말을 마친 뿔테는 분주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 공기를 비운 그는 한 그릇 더 먹을 거냐는 질문에 당연히 먹어야죠, 라고 답했다.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뿔테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은 흐뭇한 미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음식이 아주 맛있는데요. 미모도 출중하신데 솜씨 또한 남다르신가 봅니다.”

넉살 좋은 뿔테의 말에 엄마는 한 손을 들어 뺨을 감싸며 대답했다.

“어머.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반찬은 넉넉히 해 두었으니 마음껏 들어요. 벌써 겉절이가 떨어졌네. 가만 보자, 양푼을 어디다 뒀더라...”

엄마는 속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내색하지 않으려 주방으로 향했다.

라희는 젓가락을 움직이며 눈을 들어 뿔테를 가만 살펴보았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막내라서 대인관계에 능숙한 건지, 식사를 하는 도중 뿔테는 간간이 아빠의 막걸리 잔에 술을 따르기도 하고, 건강관리 대해 물어보는 엄마의 질문에 상세히 답을 하기도 하면서 상위에 놓인 반찬을 싹쓸이 하다시피 먹성 좋게 밥을 먹었다.

어른들이 음식을 잘 먹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그 말이 맞는지는 여태 몰랐으나, 오늘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다. 초반에 무뚝뚝하게 그를 대했던 아빠도 식사 자리가 끝나자 뿔테를 향해 부드러운 표정을 보였다.

"자, 들어요. 이번에 직접 수확해 담근 거예요."

"감사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엄마가 타온 따끈한 유자차를 부모님과 함께 마시는 그는 행동에 전혀 어색함이나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뚜렷이 구분되는 외모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이 집안 식구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던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남세. 편히 쉬다 가게나.”

유자차를 먼저 후룩 마셔버린 아빠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뿔테는 아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아빠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근데 선우군은....”

그러자, 뿔테가 엄마의 말을 가로막았다.

“선우군이라니요. 장모님 이거, 섭섭합니다. 선우군이 아니라 정서방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니, 아직 남자친구 같은데 벌써부터 정서방이라는 호칭은...”

엄마는 당황하다가, 식사 자리 내내 굳어있던 라희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선 말했다.

“음, 그나저나 우리 라희가 서울에서 혼자 일하느라 바빠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런데, 우리 라희와는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나요? 학교도 다른데.”

“라희 씨가 제가 일하는 병원에 온 적 있거든요. 병원에서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어쩜. 로맨틱해라.”

엄마가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 라희는 복도 많네.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얘는 통 말이 없어 궁금해서 그래요."

"이번 여름에 만났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여름이라면 라희가 한참 오빠일 때문에 마음 고생할 때였을 텐데. 옆에 이런 듬직한 남자친구가 있어줘서."

"....오빠 일 말인가요?"

순간, 뿔테의 목소리에 은근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아, 우리 애가 이야기 안 하던가요?.."

엄마가 그 일에 대해 말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유자차를 상 위에 내려놓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엄마,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만 방으로 가볼게.”

“어?, 어어. 응. 알았다.”

라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뿔테를 향해 눈짓하자, 그가 엄마를 향해 싱긋 미소 짓고는 라희를 따랐다.

시골 집에서 내내 머물고 있던 작은방에 들어선 라희는 방문을 한 뼘 정도 틈을 남기고 닫았다. 열린 방문 너머로 거실에 앉아있던 엄마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라희가 향한 방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곧 주방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라희는 고개를 돌렸다. 방문 앞에 서서 방안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러보고 있던 뿔테는 라희가 고개를 돌리자, 가만 내려다 보았다.

“...왜, 왔어요. 그것도 갑작스럽게.”

뿔테는 굳은 얼굴의 라희를 향해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당연히, 보고 싶어왔지.”

그가 태연히 손을 들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라희를 향해, 뿔테는 곱게 휘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그의 손은 천천히 위로 올라와 라희의 턱을 향하는가 싶더니 옆으로 미끄러지듯 비껴갔다. 그는 라희의 턱 주위에 비죽 튀어나와 걸려있던 머리카락을 한올을 잡아 귀 뒤로 넘겼다.

귀 뒤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매만지던 손끝을 주시하던 곧은 시선은 이내, 그의 얼굴을 향했다.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면 정식으로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고. 안 그래? 자기.”

진지하게, 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발음한 뿔테는 그윽한 눈으로 라희를 내려다보며 동의를 구하듯 눈썹을 살며시 들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