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62화 (62/214)

62

라희는 오늘도 아침 식사 후 어김없이 사과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골집 뒤편, 노란 해바라기 꽃이 줄지어 활짝 피어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탐스러운 붉은 사과가 가느다란 가지마다 무겁게 영근 과수원이 나왔다.

과수원 풀밭의 절반가량, 녹색 초원 위 바닥에는 반짝거리는 은박이 깔려 있어 색이 잘 물들게 빛을 반사시켰다. 과수원에서 재배하고 있는 사과 품종은 양광과 부사다.

아직 본격적인 수확철이 아닌 부사와 달리, 골고루 붉은빛이 돌아야 상품성을 인정받는 양광은 수확이 한창이어서, 바닥에는 온통 은박 매트 투성이었다. 번쩍거리는 은박 필름으로 햇빛의 반사율을 높여 사과 생육을 촉진하고, 직접 볕이 닿지 않는 아래까지 붉은빛을 골고루 물들여야 판매용 상품가치가 있다.

지금 라희가 산책하려 걸어가는 앞쪽,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사과 품종은 부사라서, 10월 중순 이후에야 비로소 수확을 시작하니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인공적으로 햇빛을 쪼여주는 양광 쪽과는 달리,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사과 나무 사이사이 바닥은 푸릇푸릇한 들풀들이 촘촘히 잔디처럼 돋아 있었다.

충동적으로 내려와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머문지도 어느덧 여러 날. 시골집에서 라희의 일과는 단순했다.

요즘 한창인 양광 수확 날에는 부모님과 함께 커다란 사과를 행여 흠집 날까 싶어 조심스레 따서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쌓고, 밭에서 점심 먹고 일하며 하루를 보냈다.

사과 수확 날이 아닌 날에는 이른 아침밥을 먹고 나서 씻고 빈둥거리다 밖에 나와 집 뒤편 과수원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산책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면 엄마의 밭일을 돕거나, 창고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했다. 사과 박스를 정리하거나, 사과 포장용 그물망과 충전재를 1상자당 필요 개수를 맞춰 분류를 해 두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시간은 잘만 흘렀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저녁 식사를 하고 티비를 보면서 엄마가 후식으로 구워 준 새콤한 시나몬 애플파이를 먹거나 차를 마셨다.

엄마는 귀농 하기전 도시에서 즐겨 했던 능숙한 베이킹 실력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을 사로잡아 두터운 친분을 나누고 있다며 웃음 지었다. 어차피 교인인 엄마였기에 어딜 가나 교회를 다니면 아는 사람들이 생길 터였는데 베이킹으로 인해 이곳 아주머니들의 호감을 사 무리 없이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농 후 한동안 서먹한 아웃사이더 같았던 아빠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현지에 완전히 적응해서 이곳 친구들이 제법 많았다. 저녁 먹고 나서 밤이 깊어지면 마을 아저씨들과 친목 화투를 치기 위해 외출했다.

며칠 전, 저녁 아빠가 밖에 나간 뒤, 라희와 엄마는 소파 앞 테이블에 앉아 갓 구워 뜨끈한 사과파이를 먹었다. 거실에 놓인 티브이에는 일일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화면을 흘려 보며 엄마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했다.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늘 그렇듯, 막장 스토리 가운데 러브라인이 한창이어서 젊은 남녀 주인공들의 진부한 사랑 고백이 방영 중이었다.

"한창 좋을 때다. 쟤네들은."

티브이를 보며 엄마가 말했다. 라희는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드라마에 시선을 던졌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고백에 당황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우리 딸. 쟤처럼 좋다고 고백한 남자는 없는 거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을 포크 끝으로 가리킨 엄마를 향해 라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우리 딸은 돈 버느라 바쁘니. 그래도 대학 다닐 때 같은 대학교 남자친구 사귀어야 좋은데. 사회 나오면 아무래도 엄만, 좀 그렇더라. 예전처럼 아빠가 직장 다녀서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고."

엄마는 라희를 바라보며 밝게 말을 건넸다.

"딸, 이제 연애 좀 해봐. 아빠가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엄만 남자친구 사귀는 거 찬성이야. 네 오빠처럼 이성이 공부하는데 방해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렇게 예쁜데. 한창 예쁠 나이에 남자친구에게서 사랑도 받고, 얼마나 좋니? 데이트하면 지금처럼 매일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아니라 티비에 나오는 아가씨들처럼 하늘하늘 원피스도 입고 상큼하게 꾸미고 다니고 해야지. 지나고 보니 정말 한때더라 여자로서 예쁠 때는."

"........."

남자라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벅차다. 연애라... 이성을 만나 데이트하고 시간을 보내는 거라면 이미 하고 있다. 정상적인 연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더군다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예쁘다는 한때, 젊음의 시간 한토막을 이미 값을 넉넉히 받고 팔기도 했다.

옅은 웃음을 띠고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외면하고 티비 화면에 눈을 고정한 라희는 사과파이를 뒤적이던 포크를 내려놓을까 하다가, 단것을 충분히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떠올리고 묵묵히 남아 있는 것까지 마저 다 먹었다.

서울에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일하느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틈틈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니 하루하루가 바삐 지났다.

라희는 오솔길을 걷던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활짝 피어있어 눈을 즐겁게 해주던 노란 해바라기 길이 끝나자 하얀 구절초가 활짝 피어있는 과수원 가장자리가 나왔다.

구절초 덤불 너머 과수원 갓길과 맞닿아 있는 가장자리 뒤편으로는 마을까지 이어지는 1차선 지방도가 쭈욱 뻗어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사과나무 빽빽하게 우거진 곳이라서, 이 가장자리에 서면 과수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다..."

라희는 털썩, 길가에 놓인 널따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말을 중얼거렸다.

새하얀 구절초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가을의 높은 푸른 하늘 아래, 줄 맞춰서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를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좋았다.

시골집에 머무는 동안, 라희는 푹 덮어쓴 밀짚모자 외에는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고 이렇게 사과나무 사이 볕 좋은 곳 아무 데나 앉아서 마냥 주변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조바심 내며 가지고 다니던 휴대폰도 방안 선반에 놓아둔지 오래였다. 어차피 휴대폰의 본래 주인으로부터 연락은 전무했고 기껏해야 뿔테가 보내는 일상적인 안부 문자뿐이라서, 즉각 즉각 확인하고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벌써, 일요일.

주초에 내려와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이대로 시골에서 바흐가 돌아올 때까지 편안히 먹고 자고 마시고 마냥 머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라희는 집안 내에서 현재 학원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지인의 학원에서 편안하게 일하고 있다며 핑계를 둘러댔다고는 하나, 정해진 기일 없이 오랜 시간 서울을 벗어나 있으면 응당 의혹을 살 터였기에, 내일쯤 서울로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일이야,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교한 오후 나절이 되서야 시작하니, 그에 맞춰서 아침 차를 타고 떠나면 될 거 같았다.

서울.

두 글자를 떠올리자, 한동안 편안했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전혀 예정에 없던 휴학 그리고 강남으로 옮긴 자취방.

아무도 없고, 냉장고까지 텅 빈 원룸을 떠올리던 라희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 일 이후 드문드문 연락하고 지내던 대학 친구들마저 연락이 끊기니 외로웠던 걸까. 옆에 부모님도 계시고 매일매일 따사로운 햇살 속에 거닐 수 있는 안온함이 좋아서, 지금 당장은 서울로 돌아가기 싫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까지 한 마당에, 서울에 머물 유일한 이유는 그.

하지만, 지금 그는 부재중이다. 아직까지 뉴욕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바이 공항에서 이후 연락은 전혀 없었다.

바흐도 없는 서울에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라희는 혼탁하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물음표들을 날려버리려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겠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

그냥. 생각을 비우자.

힘 없이 내려뜬 시야에 바닥의 풀들이 보였다. 햇살 아래 생기가 넘치는 초록빛 푸릇푸릇한 풀을 보고 있던 라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내 보았던 탁 트인 초원 위의 녹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가 어우러진 색채의 조화와, 자연이 주는 선물 같은 가을의 풍성함이, 나무 사이로 이마를 간질이는 미풍이 살랑거리며 불어올 때마다 코끝에 스치는 달콤한 사과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가만, 지금 시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른 느낌이었다. 벌써 정오일까? 그럼 점심시간일 텐데. 식사 준비가 다 되면 엄마가 과수원 쪽으로 부르러 나오시겠지만, 정해진 시간에 먹어버릇하니 슬슬 배도 고파져 집으로 이만 돌아갈까 싶어서, 라희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고개를 돌리다 저 건너편 양광 쪽 사과 밭에 이르자, 바닥에 깔린 은박 매트가 빛을 산란 시켜 눈을 부시게 했다. 라희가 그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빵.

뒤에서 커다란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렸다. 이런 한적한 시골길에서, 대체 왜 크락션을 울리고 난리람. 라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쪽 구절초 흐드러진 길가에 하얀색 중형 세단이 도로 위에 떡하니 멈춰 있었다.

"라희야."

차에서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닫혀있던 자동차 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라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뿔테였다.

어떻게? 서울에 있어야 할 뿔테가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거기다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자기 어머님께서 점심 먹자고 불러 오라셨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라희의 눈이 더 커졌다.

엄마? 벌써 집에 갔었다고? 어떻게 알고? 거기다 나를 불러오라고 했어?

“엄마 가요? 어떻게...”

라희가 경황이 없어 말 꼬리를 흐리자, 뿔테는 입가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아침에 전화했더니 어머님이 받으시던데. 친구라고 말씀드리고 급히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하니 친절하게 주소도 알려주시고 말이야.”

그가 말하며 발걸음을 옮겨 라희가 서 있는 과수원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청바지 사이로 새하얀 구절초 덤불이 그의 발길에 헤쳐지고, 무릎에 감겼다. 라희가 멍하게 서 있는 사이, 뿔테는 순식간에 라희 곁으로 다가왔다.

라희는 바로 가까이 다가온 뿔테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멈칫거렸다. 아침 먹고 나서,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온 고작 서너 시간 만에 서울에 있던 그가 이곳, 충주에 왔다.

“가자, 밥 먹으러. 어머님께서 기다리셔. 과수원이 꽤 넓어서 차 타고 주변 도로를 한 바퀴 돌아보며 자기를 찾으려 했는데 바로 보여서 다행이야. 모자, 잘 어울리는데? 사과 과수원 집 아가씨라.....”

뿔테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라희를 가만 보고 있다가 다시 입매를 가볍게 올렸다.

“어릴 때 형 책장에서 봤던 루시 몽고메리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목가적인 걸.”

가만 서 있는 라희의 팔목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빨간 머리 앤은 절대 아니고 음, 무슨 과수원의 세레나데인가 뭔가 그런 게 있었는데. 제목만 기억나고 줄거리는 모르겠어. 오래돼서. 그나마 기억나는 여자들 중에서는, 다이애나인가? 앤의 친구. 자기랑 비슷한데? 하얀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 마침 과수원 집 딸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동차 앞에 서자, 그가 조수석 차 문을 열면서 라희를 내려다보며 찡긋했다.

“우리 둘째 형, 큰형과 다르게 감수성 풍부한 문학 소년이었거든. 심심할 때마다 형방으로 놀러 가 책장을 뒤적거린 덕분에 내가 이렇게 과수원 한가운데 서 있는 자기를 보고 떠올릴 로망도 있고. 좋네.”

과수원에서 집까지는, 그의 말대로 가깝다. 걸어서 몇 분거리 차타고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

난감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침묵하고 있는 라희를 힐끗 보며 뿔테는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머님, 미인에다 인상 좋으시던걸. 분위기가 자기와 닮기도 했고. 점심은 자기가 좋아하는 애호박 전에 된장찌개였는데, 내가 왔다고 삼겹살 구워주신다며 자기 데려오는 동안 요 앞 식육식당 가서 고기 사오신다고 급히 나가시셨어.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님인가봐. 그치?”

============================ 작품 후기 ============================

으힉.. 늦어서 죄송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