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61화 (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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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라희는 잠에서 깨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창가 앞 의자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을 통해 퍼져 들어온 쌀쌀한 외기가 피부에 닿자 몸이 떨렸다. 추위를 느끼자 얼른 창문을 닫고 포근한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보고 있으면 감상에 젖는 듯해 기분이 차분해졌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기온이 뚝 떨어져 춥다.

보일러라도 틀어야 할까? 라희는 누워서 방문 옆벽에 달린 보일러 리모콘을 노려 보고 있다가 일어나서 다가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추위에 떠는 것 보다는 따뜻해서 땀이 나는 편이 낫겠지. 배가 고파서 더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맨날 배고픈 상태냐는 농섞인 뿔테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상적으로 식사를 해야 할 텐데 그러기가 귀찮았다. 원룸 자취 방안에 먹을 거라고는 전혀 없어서 오늘은 인터넷으로 장을 보던가, 외출해서 마트에 가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보일러를 틀고 다시 창가로 다가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내민 라희의 눈에 집 앞 사거리의 편의점이 보였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삼각김밥과 라면, 샌드위치가 있어서 간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먹고 나면 제대로 된 영양 섭취가 아닌 것 같았다. 첨가물이 잔뜩 묻어있어 몸에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대학 도서관 어디선가 편의점 음식의 유해성에 관한 책을 본 기억도 났다. 괜히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장을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하지?

라희가 살고 있는 신논현역 근처 큰 마트라고는 신세계 백화점 맞은편의 킴스클럽에 가던가, 저 밑 양재에 있는 이마트 혹은 그 앞 코스트코가 전부다. 킴스클럽은 택시 기본요금이니 걸어서 갔다가 올 때는 택시 타고 오면 되고, 양재 쪽으로 가려면 녹색 버스를 타야 했다.

밖으로 나가려면 일단 씻어야겠지. 라희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씻기 위해 욕실로 가려는데, 창문 옆 침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라희는 침대로 다가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검은 화면 위에는 문자 메시지 알림 팝업이 떠 있었다.

010-5001-xxxx (8)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8개나 와있다니. 비록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라희는 눈을 들어 휴대폰 화면 위 상태 바에 적힌 현재 시간을 살폈다. 오후 1시.

오늘 새벽, 한강에서 뿔테와 헤어져 3시쯤 택시 타고 집에 도착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으니 10시간가량 잔 건가? 그정도면 수면양이 차고 넘쳤지만 어쩐지 몸은 개운하지 않고 찌뿌드드했다.

라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눌러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보낸 사람은 뿔테였다. 별 내용은 없었다. 출근했다는 문자와, 비 온다는 문자, 쌀쌀한 기온 이야기, 그리고 '난 지금 커피 마시고 있는데 뭐 해?' 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의 문자였다. 문자 내역을 확인한 라희는 액정을 껐다.

오늘 마트 두 군데중 어딜 갈까. 킴스로 간다면 가는 길에 강남 신세계 지하 영풍문고를 갔다가 볼만한 책을 한 두 권 사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면 오늘 하루가 다 갈 것 같았다.

식단을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떠오른 재료는, 일단 쌀은 있고, 냉장고에 엄마가 보내준 김치도 있으니 햄이나 참치 두부 그리고 나물 몇 가지 사서 오고 간편식 몇 봉지를 사면 일주일 넘게 어쩌면, 열흘 가량 지낼 수 있을 듯했다.

흠, 한식은 역시 밥에다 반찬을 해서 먹어야 하기에 번거로운가? 구색을 갖추려면 국도 있어야 하고. 차라리 마트가 아닌, 반찬 가게를 가는 편이 나으려나.

라희는 욕실 앞쪽 냉장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쌀쌀해진 날씨에 된장 국이라도 끓이려면 기본 재료인 마늘, 양파, 파, 육수용 멸치 등이 필요했는데 냉장고 안에 든 것은 김치와 생수가 전부였다. 물론 한번 사 놓으면 오래 먹는 다지만 그걸 모두 사 놓고도 정작 요리를 하지 않으면 썩거나 상해 버린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기에 음식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올해 초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 먹는 것은 정말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그동안 간간이 끼니를 해결해 주던 엄마표 밑반찬도 떨어졌고. 그걸 만들어 먹자니 정말 번거로웠다.

“음...”

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식은 역시, 힘들다. 차라리 지난번 오피스텔에서 바흐가 만들어 주었던 베이글 샌드위치처럼, 베이글과 치즈 종류를 몇 개 사다가 냉동실에 얼려 놓고 그때그때 달걀을 하나를 깨서 프라이를 한 후 샌드위치에 끼워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재료는 냉동도 되고 편해 보였다. 영양상으로 문제라면, 과일 가게에서 사과나 몇 개 사서 간식으로 곁들여 먹으면 충분해 보였다. 어차피 먹고는 살아야 하지만, 고작 혼자서 먹으려고 한 시간 두 시간 음식 준비하는 것은 낭비 같았다.

베이글 샌드위치 재료를 사려면, 역시 코스트코에 가야 하나? 거기는 회원제라던데. 회원비가 얼마라고 했더라. 라희는 휴대폰 액정을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웹으로 찾아보니 회원 가입비가 35000원. 자취생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코스트코가 나을까? 이주에 한번 정도 장을 본다고 치면....

그때,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벨이 띠딩, 하고 울렸다.

「점심 먹었어? 저녁에 뭐 먹을까?」

휴대폰 액정 한가운데 팝업처럼 떠 있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

라희는 액정 화면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래서 번호를 알려주기 싫은 거였는데. 다행히 SNS가 아니라서 이쪽에서 문자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뿔테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계속 답을 안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아니, 답문이 없으면 지쳐서 문자를 보내지 않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라희는 서 있던 몸을 돌려 다시 침대로 향했다.

온기가 남아있어 아직 포근한 침대 이불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전원 켜진 보일러가 방바닥을 데우는 시간은 아마도 삼십분 정도 걸릴 것이다.

방바닥이 따뜻하면, 사람의 체온이 그립다거나, 살아움직이는 생명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하지 않을 테지.

라희가 이불 속에서 어깨를 감싸 쥐어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또다시 띠딩, 문자 알림벨이 울렸다.

「뭐 먹으러 갈래?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아니면 뷔페 갈래?」

다 읽을 새도 없이 띠링,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어디로 가고 싶어? 가고 싶은 호텔 뷔페로 골라봐.」

팝업의 깜빡이는 문자를 보며 라희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안돼요.』

그러자 재깍 답이 왔다.

「왜?」

뭐라고 하지? 장 본다고 해? 그럼 분명 같이 가자고 할 텐데. 라희는 물끄러미 액정화면을 바라보다가, 입력 버튼을 눌렀다.

『집에 갈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다. 어차피 오빠의 문자를 받고 집에 한번 가보려던 참이었으니까. 하필 그날이 오늘인 거지.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후련했다. 오늘 신세계로 가서 서점에 들러 장을 볼 것이 아니라, 씻고 짐을 챙겨서 센트럴 터미널로 가야겠다. 터미널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서점에서 읽을 책도 사고 부모님이 계시는 충주로 가야지. 가을이라 사과 수확이 한창일 터였다. 가서 며칠 머물며 생각도 정리하고 과수원 일도 도와드리면 좋지 않을까.

「부모님 뵈러? 그래. 알았어. 잘 다녀와.」

지난번 술 취한 채로 집에 찾아와 어디론가 사라지지 말라던 말과 다르게, 뿔테는 선선히 다녀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뿔테를 보고 있으면, 당연하게도 마음이 심란했다.

이제 10개월 반. 남은 계약 기간동안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어도, 충분히 복잡한 인생 더 꼬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비록, 뿔테 일은 우연과 이상한 충동이 겹쳐서 저지른 일이긴 했어도 라희에게 바흐는 고마운 사람임은 분명했으니까, 바흐가 싫어하는 일은 하기가 꺼려졌다. 그가 물 쓰듯 돈을 써도 전혀 줄지 않을 정도의 재력을 갖췄고 당장 돈이 썩어 난다고 해도, 오천만 원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큰 액수다.

대부업을 업으로 삼는 사채업자조차 무담보로 빌려줄 수 없는 금액인데 그는 라희의 몸과 기간 외에 까다로운 조건을 걸지 않고 선뜻 돈을 건넸다.

계약기간, 1년.‘계약 당사자인 을은 계약 기간 동안 갑의 요구에 응한다.’라희는 복잡한 법률용어가 가득 쓰여 있던 계약서 내용 중 일부를 떠올렸다.

정작 바흐는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지만, 계약 이후 첫 사흘을 내내 그와 함께 보낸 라희는 그가 어느 때고 만남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만남 이후 생긴 몸 안의 은밀한 흔적들을 밖에 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당연히 다니던 보습 학원 아르바이트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대학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당장 이번 학기는 휴학 중이었다.

라희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을 때 정작, 계약 당사자는 홀가분하게 뉴욕으로 가버렸지. 그가 없는 동안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로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스스로 납득했다.

『네.』

문자 전송 버튼을 눌러 뿔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저절로 깊은 한숨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뿔테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뿔테와는 차차 연락을 끊어야 했다. 그와 만나기 전까지는 단호하게 대해야지라고 결심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면 매번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뿔테를 제쳐두고라도 지금은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니 정신 차리고 충주로 가자. 뉴욕에 있는 바흐는 연락 한통 없지만, 언제든 그가 부르면 서울로 와야 할 테니까.

바깥으로 나와 얼굴 위에 닿는 바람은 싸늘했다. 라희는 건물 입구의 가장자리에 서서 손바닥을 위로 들어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살폈다. 다행히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잠시 멈춘 상태였다.

발걸음을 떼기 전, 라희는 위에 입은 후드점퍼를 여몄다. 바깥 바람은 생각 보다 찼다. 오늘 옷차림은 여성스러운 원피스나 치마가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티셔츠에 후드 점퍼, 청바지, 운동화였다. 등에는 백팩을 멨다. 백팩 안에는 충주 집에서 입고 지낼 옷가지와 지갑,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파우치가 전부였다.

라희가 사는 곳에서 20여 분 걸으면 바로 센트럴 고속 터미널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창구에서 충주행 버스표를 끊은 라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 출발 시간까지 30여 분의 여유가 있었기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센트럴 터미널 지하 1층에 있는 영풍 문고로 갔다.

서점 안에서 신간과 베스트 코너를 뒤적이다가 평소 애정하던 여류작가의 신간을 샀다. 그리고 잡지 코너에 들러 버스안에서 가볍게 읽을 패션 잡지 한 권을 손에 들었다. 잡지책은 화보가 대부분이라 지루하지 않겠다 싶었다. 계산을 마치고 서점을 나와 1층 커피숍에 올라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하니 얼추 버스 시간이 다 되어 갔다.

버스가 들어와 대기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게이트 앞 간이 의자에 앉아 잡지를 넘기며 훑어보았다. 화려한 패션 화보와 칼럼에 쓰인 에디터의 글 솜씨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잡지를 읽다 보니 승차가 시작되었다. 라희는 커피를 챙겨들고 충주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앉아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을 보고 있다가 스르륵 졸음이 몰려와서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덧 휴게소였다. 딱히 나갈 일이 없었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컵홀더에 끼워둔 커피를 마셨다. 식어버려 차가운 커피는 쓴맛이 강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남은 커피를 마자 마시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아까 읽다 만 잡지를 뒤적이며 꼼꼼히 읽어나갔다.

*

충주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어느덧 날은 어두웠다. 라희는 휴대폰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어머? 라희니?”

휴대폰 너머 엄마가 반가운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 지금 충주에 왔어. 터미널에서 버스 갈아타고 들어갈게.”

“어머, 그래. 저녁은? 먹었니?”

“아니.”

“알았어. 조심히 오렴.”

부모님이 사는 지역은, 충주 외곽으로 도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고 외곽에서도 더 멀리 가야 나오는 시골 마을이다. 귀농을 선택해 정착한 지역답게 주위는 과수원 농가가 대부분인 한적한 곳이라서, 충주 터미널에서 하루에 12번 다니는 버스를 타면 종점 부근인 마을 정류소에 도착한다.

라희가 버스에서 내리니, 마을 한가운데 있는 농협과 면사무소는 이미 불이 꺼져있었고, 그 중심으로 손에 꼽을 만큼의 가게가 희미한 불을 밝혔다. 그래 봤자 구멍가게 하나와 중국집 겸 치킨집이다. 좁은 지방도가 관통하는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라희는 집을 향해 터덕터덕 걸었다. 어둑어둑한 거리는 가로등만이 켜져 있고 그 사이를 부는 바람은 도시보다 더 싸늘했다.

라희가 농가 특유의 철제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엄마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대문이 열리고 엄마가 반갑게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다. 배고프지? 따뜻한 새 밥해 놓았으니 어서 밥 먹자.”

라희를 향해 손을 내미는 엄마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엄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라희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건넸다.

“뭔데?”

“아까 네 아빠랑 먹은 된장 국이 맛있어서 다시 끓였어. 근데 고기 먹을래? 요 앞 농협에서 사다 놓은 삼겹살 좀 있는데. 오겹살이라 쫄깃해서 맛있어.”

“응.”

라희가 신발을 벗는 동안 엄마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 오면 늘 머무는 작은방에 들러 백팩을 내려놓고 가방 속 챙겨온 옷가지를 꺼내 장롱에 넣었다. 일을 마치고 주방으로 가니 단출한 식탁 위에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과 상추, 쌈장, 나물 몇 가지, 된장국과 잡곡밥이 놓여있었다.

“얼른 먹어. 그런데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거니? 얼굴이 홀쭉한데.”

밥공기를 라희 앞으로 밀어주며 엄마가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이어트는 무슨. 잘 먹겠습니다.”

라희가 말하며 반찬을 향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루 종일 굶었다가 음식을 보니 갑자기 식욕이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자취가 힘든가 보구나. 차라리 기숙사에 남지.”

“아르바이트 시간 때문에 불편해서. 애들 시험 기간에는 밤 11시까지 남아있어야 하는데 기숙사는 10시에 점호잖아. 거기다 외출증 없이 3번 점호에 빠지면 퇴출이고.”

“그건 그렇지. 기숙사는 단체생활이니까. 지난번 보내준 반찬은 다 먹었니?”

“응.”

라희가 밥을 먹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엄마가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빠는 지금 마을 아저씨들과 모임이 있어서 나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올해는 사과 작황이 괜찮다는 말과 노량진에 있는 오빠는 요즘 임용고시 스트레스로 전화를 걸면 짜증일색이라고 했다. 그리고 올해는 꼭 오빠가 합격해서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오빠가 시험 치는 과목인 영어는 다른 과목과 다르게 TO가 많아서, 점수만 나쁘지 않으면 무난히 합격할 거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희의 주변 친구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국, 영, 수등의 주요 과목은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하면 커트라인 점수도 낮아진다고 했으니 아마 오빠가 수도권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올해 안에 무난히 합격할 수도 있을 거였다.

“그런데 라희야. 이번 학기는 휴학했다면서. 휴학 기간 동안 무얼 할 거니? 다른 애들처럼 베낭여행이라도 다녀올 거야? 요즘 케이블에서 배낭여행 가는 것을 방영하던데. 보니까, 재미있고 정말 인기가 많더라. 그걸 보니 나도 시간 나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던 걸.”

엄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마. 지금 일하고 있잖아. 시간 없어.”

“아, 맞다. 그렇지 참.”

집안에는 학원장 소개로 이번 학기 동안 재수생 과외와 학원 일을 동시에 한다고 말해 두었다. 올해 오빠가 자동차 사고 친 여파가 남아있기에 라희의 대답에 말이 없어진 엄마는 어두운 기색으로 침묵을 지켰다.

“걱정 마, 정신없이 일하고 있으니까. 다음 학기까지만 휴학하면 될 거 같아. 남은 돈은 차차 갚아나가거나, 오빠가 취직해서 갚아야지 뭐.”

“그래도, 너네 원장님께서 그 큰돈을 빌려 주셔서 다행이지.”

“으응, 아무래도 대학생에다가 조카 친구라서 신원도 확실하고, 반 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해서 그런가 봐.”

라희는 대충 얼버무렸다. 계약 이후, 집안 내에서는 바흐가 돈 빌려준 학원 원장으로 둔갑해있었다. 라희로서는 적당한 핑계였지만, 스스로 만든 거짓말이기에 충분히 어색했고, 못 미더워 보일까 노심초사했다.

라희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는데 집중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엄마가 가는 길에 오백만 원을 줄게. 그걸로 조금이라도 갚아보렴. 별 도움 못돼서 미안하다. 네 오빠가 올해 임용 붙으면 직장인 신용 대출받아서 원장님께 돈을 갚으면 되니까....”

“으응..”

라희는 고개를 끄덕여 낮게 답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의자에서 일어서 밖으로 난 주방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창고에 사과박스 정리해야 하는데..”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했기에 라희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아빠도 출타 중이고 엄마도 창고로 나가버린 주방 안은 썰렁했다. 라희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을 먹어 다급한 허기를 채우고 나서인지 영 입맛이 없었다. 라희는 반쯤 남긴 밥을 내려다보며 한숨지었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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