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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압구정 현대 백화점 옆길을 따라 동호대교 쪽으로 걸었다. 어두운 고가교 밑을 걸어가다 보니 한강 공원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잔디가 펼쳐진 한강 공원이었다.
드문드문 자전거 길을 질주하는 조명등을 켠 자전거들이 보이고, 늦은 시간임에도 가족들과 연인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돌아다녔다. 뿔테는 라희의 손을 잡고 검은 강물 쪽으로 걸었다. 동호 대교에 조명이 차분하게 빛나 검게 너울지는 강물 위로 부서져 내렸다.
"발은 괜찮아? 구두 신고 있잖아.“
뿔테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라희의 구두에 눈길을 던졌다. 라희도 고개를 숙여 자신의 구두를 바라보았다. 두바이로 떠나기 전 L백화점 A관에서 바흐가 사준 구두다. 두바이에 머물렀던 내내 신고 다녔다.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니 맞춰 신을 만한 구두는 몇 개 되지 않아서 신발장을 훑어보던 중 바로 눈에 보인 익숙한 것을 골라 신게 되었다. 고가품이라 그런지 디자인은 화려하지도 촌스럽지도 않게 무난했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굽은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라인은 잘 빠져 마치 자로 잰 듯 딱 떨어졌다.
물끄러미 구두를 보고 있던 라희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편한 구두라 괜찮아요. 굽도 높지 않고요.”
뿔테는 라희의 구두에 다시 눈길을 슬쩍 주더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라희와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그럼, 잠시 걸을까. 밤이라 운치도 있고."
라희는 괜찮다는 표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던 뿔테 턱 끝으로 계단 앞에 우뚝 서 있는 안내판을 가리켰다.
"어느 쪽으로 가? 신사 쪽으로? 아니면 압구정 나들목 쪽으로?"
뿔테는 말과 동시에 양쪽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라희는 조그만 목소리로 신사 쪽이요, 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집으로 가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강남역 근처인 집에 가까운 쪽을 택하는 편이 낫겠지. 점점 멀어지는 압구정 쪽 방향보다는.
“가자.”
뿔테는 손을 뻗어 손바닥 아래 라희의 손가락을 쥐며 깍지 꼈다. 라희는 뿔테와 그렇게 한강 보행자용 산책길을 걸었다. 바닥은 조깅이나, 트래킹을 하는 시민들의 발목이나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푹신한 재질로 포장되어있었다.
어두운 강이 느릿하게 흐르는 한강변에서는 서늘한 미풍에 민물 비린내가 희미하게 섞여 얼굴 위를 스쳤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뿔테를 힐끗 바라보았다. 고작 한 달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람인데, 지금 당연하다는 듯 손을 힘주어 쥐고 옆에서 느릿하게 같이 걷고 있다.
“가을은 바람 한 점에 설레는 계절이래. 그런데, 이렇게 자기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설레면서 정말 좋다.”
시선을 느낀 그가 라희를 보며 말했다. 라희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검게 흐르는 강물에 눈을 고정했다. 그러다 아,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라희가 가만 기다리고 있자, 주머니에서 아까 편의점에서 계산한 이어폰을 꺼냈다.
“자.”
뿔테는 이어폰을 한쪽 건넸다. 라희가 받아들자, 이어폰 플러그를 휴대폰에 꼽아 넣고 음악 앱을 실행시켰다. 라희는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는, 무슨 음악 좋아해?”
그가 물었다. 좋아하는 음악?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을 말하면 그 역시 그 음악을 안다고 할 테고, 매니악 해서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말하면 아마 왜 좋아하는지, 감상은 어땠는지 쉴 새 없이 물어볼 것만 같다.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플레이 리스트의 항목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잔잔한 음악요? 밤이니까.”
라희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자, 뿔테는 액정 화면 위 손가락을 세워 이리저리 스크롤 했다. 화면이 휙, 휙 넘어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뿔테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딱히 들을만한 것은 없네.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러다, 뭔가 발견한 듯 낮게 외쳤다.
“아, 이거.”
그의 손끝이 반가운 것이라도 발견한 듯 매끄러운 액정화면 위를 여러 번 두드렸다. 이어서 클릭한 것은, 오늘 저녁에 보았던 영화 <비긴어겐 OST>였다.
“영화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별로라고 하지 않았어요?”
라희가 묻자, 그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그렇긴 한데, 나 여자 보컬 좋아하거든. 특히 미녀라면 더. 영화 속 다른 노래는 기억도 안 나는데 유독 키이라 나이틀리가 불렀던 노래들은 귀에 쏙쏙 들어와 착착 감기던데.”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영화를 보며 들었던 낯익은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 제목은 고운 키이라 나이틀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음악과 함께 그가 낮게 흥얼거리며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중간 부분에 이르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라희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Oh maybe. You don`t have to kill so kind 자비롭게 죽일 필요는 없어.
Pretend to ease my mind
내 마음을 편안하게 누그러뜨리려 하면서.
When baby you won`t
그러지마.
Oh sugar. You don`t have to be so sweet 그렇게 달콤하게 굴 필요 없어.
I know who you`re going to meet 난 네가 누구를 만나러 나갈지 아니까.
Don`t say that I don`t
내가 모른다고 하지 마.
라희가 눈을 들자, 곧게 내려다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했다.
“............난 자기 두고 집에 가기 싫은데.”
노래가 끝나자, 뿔테가 중얼거렸다. 라희는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다른 시간에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뿔테와 어떤 관계였을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머릿속이 어지럽게 탁해졌다.
바흐와 만나기 전에 그를 먼저 만났었다면, 유쾌하게 웃는 상냥한 미소를 마주했었다면, 투정 어린 귀여운 시선을 받았더라면.
안으로 깊이들이 마신 심호흡을 끝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마음속 깊은 상자에 구겨 넣고 단단히 눌러 닫아버린 라희의 시선은 강 건너 아파트들로 향했다. 강을 둘러싸고 무수히 불빛을 밝히며 우뚝 서 있는 아파트들, 어림잡아도 한 채당 5억은 넘을 거였다.
고작 오천만 원이 없어서 몸을 팔았는데 오 억은 무슨 수로 마련한단 말인가. 설령 뿔테를 먼저 만났더라도 변함없는 사실. 오천만 원, 그리고 계약.
아마도, 라희가 속한 계층인 서민층은 평생 겨우 모아야 서울 한복판에 내 집 한 채 갖는 것이 고작이겠지.
저 멀리 어두운 밤하늘 아래 아늑한 불빛을 반짝이는 아파트들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속이 따끔따끔 아프면서 불편했다. 새삼 돈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구나 생각되었다. 라희는 고개를 돌려 앞의 어둠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보행자용 산책로를 무표정한 눈빛으로 보며 걸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늦은 밤에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비우고 지나다보니 밤분위기에 젖어 굳었던 몸이 가볍게 풀리고, 답답한 기운도 조금이나마 가셨다. 라희의 손을 힘주어 맞잡은 뿔테의 커다란 손도 서늘한 밤공기 가운데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라희가 고개를 숙여 깍지 낀 손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걷자, 그 모습을 뿔테가 가만 지켜보았다. 그는 슬며시 입매를 말아 올렸다.
"좋다. 밤에 이렇게 음악 들으며 알딸딸한 기분으로 걷는 거. 시간과 체력만 허락해 준다면, 밤새 걷고 싶은걸. 자기와 함께."
그의 중얼거림에 라희는 시선을 돌려 옆에 깔린 어두운 잔디 위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조용히 손을 잡고 걸었다. 이제 귓가에는 영화 음악이 끝나고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벼운 피아노가 건반 위를 오가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지 리스닝 곡이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는, 저만치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환히 밝힌 간판이 보이자 발걸음을 멈췄다.
“커피 마실래?”
그가 묻자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알콜의 여운이 온몸을 감싸고돌아, 조금 알딸딸한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느껴지는 감각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굳이 커피로 정신을 일깨워 각성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뭐. 나도 딱히 생각은 없으니까. 여기 앉아서 쉬자.”
라희는 뿔테가 가리키는 한강 둔치 계단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편한 구두라고 해도 구두는 구두였는지 계단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쌓였던 피로가 나른하게 풀려왔다. 발아래 저릿한 느낌에 라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뿔테가 라희의 옆이 아닌, 뒤에 앉으며 라희의 어깨를 가슴으로 끌어당겨 양팔로 끌어안듯 감쌌다.
등에 그의 가슴이 닿자,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었다. 맞댄 얇은 옷감 사이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라희는 잠자코 그의 품에 안겨 가만있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라희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좋다. 이렇게 달콤한 살 냄새가 유혹하는데 정작, 하지는 못 한단 말이지."
뿔테는 그대로 가만있었다. 코로 내쉬는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천천히, 억눌러진 그의 호흡 사이로 순간,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아주 가볍게 스치는 느낌이 났다. 갑작스러운 부드러운 터치에, 라희의 등을 타고 저릿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다시 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따스한 숨결로 느릿하게 목을 간질였다.
그의 약동하는 심장 박동이 등에 생생히 느껴지면서, 억제하듯 내뿜는 숨결은 굉장히 야릇한 느낌이어서, 목덜미를 가로지르는 혈관 속에서 뛰고 있는 맥이 빠르고 또렷이 느껴졌다. 그는 가만 멈춰 있는 라희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플라토닉 러브는 꽤나 강제적이고 타의적인데. 특히, 남녀가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진한 관계를 맺은 후라면 말이지.“
라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호기심을 보이자, 그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보이지는 않지만 미소 짓고 있을 터였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성직자인 피에르 아벨라르, 혹시 알아? 라디오 같은 거 자주 들었으면 한 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 빈번하게 회자되었거든. 나는 밤새 병원에서 당직 설 때 우연히 들었는데."
"........누군데요?“
라희가 묻자, 그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꽉 감싸며 말했다.
"다행이다. 자기, 모르는구나. 고마워. 아는 척할 기회를 줘서.“
그는 기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의 로망이거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똑똑하고 유식하고 잘나 보이고 싶은 거."
좋아하는, 이라는 말에 라희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뿔테는 더욱 가까이 라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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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