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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58화 (5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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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욱 형네 회사에서 일하면 되지 않아? 나야, 그쪽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일단 거기도 금융 관련 아니야?”

민기가 궁금한 듯 말을 던졌다. 그러자, 옆에서 도윤이 불쑥 끼어들어 맥주 잔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거기는 쉽게 말하면 PB스타일의 자산관리회사라서. 엄연히 말하면 금융회사는 아니지. 그리고 거의 명목상 회사야. 페이퍼 컴퍼니에 가까워. 회사 자금이 전부 본인 재산 일걸? 처음 투자회사로 시작했다가 리먼 사태 때 엄청나게 벌어서 투자금 이익배분하고 바로 청산했으니까. 그때 너네 집에서도 재미 좀 봤지 않냐? 사촌이면 진욱 형 최측근이잖아.”

“그게..”

우현은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라희는 맥주를 마시는 척 잔을 기울이며 잔뜩 긴장해서 그를 주시했다.

“저희 아버지와 진욱 형,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요. 그때, 그니까 초창기에는 미국에 계신 고모 쪽에서 자금을 대주셨어요.”

고모, 그럼 알마하 리조트에서 바흐에게 전화했던 여자는 고모 쪽 일까? 라희가 속으로 조심스러운 추측을 하고 있을 때, 도윤은 맥주 잔을 내려놓으면서 기본 안주인 땅콩 스낵을 한 움큼 쥐어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아쉽네. 그때 진욱 형에게 투자했으면, 지금 남부럽지 않을 텐데. 이쪽 업계에서 완전 전설처럼 유명하거든. 2008년 리먼 사태로 선물 폭락할 때 진욱 형이 전량 매도해서 거의 바닥 찍을 때, 진짜 신들린 듯 기가 막히게 그 타이밍에 팔고 매수로 전환해서 돈을 진짜 갈퀴로 긁어 건졌지. 근데 재미있는 게, 바닥 찍었을 때 투자금을 전부 분배해 버렸거든. 그래서 바닥에서 2009년 지수 회복까지 번 돈은 전액 진욱 형 개인 재산으로 알고 있어. 거기다가 환율 방어하느라 난리였던 그때 선물과 동시에 FX환거래도 손대서 잭팟이 터졌대. 듣기로는 모든 수익이 합쳐서 천억 가까이 라던데. 정말 대단한 거지. 와, 진짜 내가 그래 봐야 하는데. 진욱이 형, 이 바닥 별명이 신의 손이다.”

도윤은 손바닥을 위로 들어 마치 상상 속의 돈을 한가득 움켜쥐는 것처럼 쥐었다 폈다 하며 말을 마쳤다. 바흐의 선물계좌는 지난번 오피스텔에서 본적 있다. 단지, 거래 액수가 상상이상이라 인상 깊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듣게 되자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라희는 맥주 잔을 내려다보며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차라리 진욱 형네 취직하지 그래? 거래 계좌 하나만 맡아도 수수료가 엄청날 텐데.”

민기가 말을 던지자, 우현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게, 좀, 경험 좀 쌓고 들어가야지요. 진욱 형 성격으로 봐서 낙하산은 어림없거든요.”

민기는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아. 맞다. 그 형이 좀 완벽주의자지. 그래서 신포니아 3성을 모두 완벽하게 치잖아. 와, 나 누나가 피아노 전공이라 그거 수백 번도 더 들었는데, 진욱 형이 축제 때 강당에서 15번 치는 거 듣고 완전 감탄했잖아. 그때 다들 난리도 아니었지. 참, 선우야. 그 형 너네 펜트 산다고 들었는데.”

“맞아.”

뿔테는 불쾌함이 담긴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고 맥주 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맥주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옆에서 민기가 뿔테의 안색을 살피며 맥주를 잔에 가득 따랐다.

“너 설마, 아직도 그 일로 진욱 형 싫어하냐? 그때 바로 해프닝인 거로 밝혀졌잖아. 당시 진욱 형은 바로 유진 누나랑 사귀었고. 선미는 혼자 헛물 켠 거고.”

민기가 책망하듯 말하자, 뿔테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입술 끝에 힘을 주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아. 별일 아니었던 거.”

뿔테가 맥주 잔을 들어 올리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도윤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쳐오며 입을 열었다.

“그때 선미가 삽질만 안 했으면 너 너네 형들과 같은 S대 동문 될 뻔했는데. 3형제 모두 S대 의대 들어갔으면 아마 신문에도 나고 정문 앞에 플래카드 붙었을 거야 아마. 하여간 청춘의 상처는 여파가 진해. 근데, 지금도 사귀나? 두 사람.”

모두의 시선이 우현에게 향했다. 우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사귀고 있는 걸로 압니다.”

“그때부터? 쭉?”

도윤이 묻자, 옆에 맥주 잔을 기울이던 민기가 말했다.

“야, 모르냐 너? 진욱 형 국제반 테크 타다가 예일대 진학하니까, 유진 누나 K대 때려치우고 따라간 거? 첨부터 유진 누나가 엄청 대시해서 따라다녔잖아. H고 전교 회장 커플. 그때 그 스토리 유명했는데, K대 동창 사이에서 말이야.”

이번에는 유진 이야기였다. 여기 앉은 남자들 모두 같은 지역에 살고 H고 출신이라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학교 이야기가 오갔다. 라희는 맥주 잔을 기울이며 테이블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전부 몰랐던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들의 술자리에 이렇게 우연히 참석하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을 비하인드 스토리. 뿔테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 거였다. 오가는 대회속에 라희의 낮은 시선이 뿔테를 향했다. 그는 가만 라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결혼 이야기는 없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할 때 됐지. 둘 다 30이지? 아니다. 유진 누나가 한 살 위지. 유진 누나 요즘 잘 나가던데. 여대생들 워너비로 매스컴에도 나오고. 뭐, 미인이니까.”

민기가 우현을 향해 말하자, 옆에서 도윤이 지리멸렬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야, 관심 없어. 지겹다야. 넌 같은 대학이라 관심 있는 거지. 어차피 남의 여자잖냐. 여기 라희 씨도 도통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니 지루할 거고, 이제 술이나 마시자. 자, 라희 씨 같이 마셔요. 짠.”

도윤이 맥주 잔을 들어 올리자, 라희도 손을 내밀어 잔을 부딪쳤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학교가 아니라 술자리 공통된 주제라 할 수 있는 직장이야기, TV 이야기들이었다. 도윤이 경제 관련된 국제 정세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민기가 아는체하며 대화에 참여했다. 우현도 관심 깊은 얼굴로 몇 마디 질문을 건네면서 테이블 위는 활발한 대화가 이어졌다. 뿔테도 간간이 대화에 호응하기 위해 짧은 몇 마디를 나누긴 했으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말이 없는 편이었다. 친구들과 맥주 잔을 기울이는 틈틈이 그는 라희의 얼굴을 곧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계속되는 건배 속에 취기가 조금 오른 민기가 가만히 앉아있는 라희를 보며 물었다.

“근데, 선우랑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어요? 이야기 들어보니 만난 지는 별로 안 된 거 같은데, 간밤에 하는 모습 보니 완전히 빠졌던데요.”

도윤이 고개를 끄덕하며 맞아, 라고 맞장구쳤다. 민기는 콧등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라희 씨 말없이 사라진 일주일 동안, 우리가 얼마나 밤이면 밤마다 시달렸는지 알아요? 어휴, 거의 지난주 내내 매일 밤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져서 오늘까지 이렇게 해장하는 중이라고요. 와, 선우 이 자식. 우리 엄청 괴롭혔거든요. 낮에 회사에서 시체처럼 있다가 주의를 몇 번 들었죠. 그래서 꼭 들어야겠습니다. 진짜, 어떻게 만난 겁니까?”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라희의 얼굴 위에 쏟아졌다. 순간, 당황으로 머릿속이 새하앴다. 뭔가 말을 하려 속으로 말을 고르는 도중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얽히고 꼬이기 시작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답해야 한단 말인가. 라희가 눈을 재차 깜빡이며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뿔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가 입을 열어 짧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병원.”

그와 함께 민기에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도윤과 민기와 우현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뿔테에게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설마, 지방에서는 아닐 테고 그럼, 너네 첫째 형네?”

뿔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뿔테의 첫째 형이 여성 병원을 하고 있는 것을 모두가 아는 눈치였다. 짧은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잠시 뒤 도윤이 낮게 외쳤다.

“쩐다. 계획적인 도둑놈. 어쩐지, 새벽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근데, 의사가 내방한 환자에게 작업해도 되는 거냐?”

라희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지러운 술집 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처해 있는 현실은 진짜 저 더럽고 시커먼 바닥 보다 엉망이었다. 도윤이 의도한 내용이야 어쨌든, 뿔테와 깊은 관계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뿔테의 친구 두 명이야 알던지 모르던지 깊이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저쪽 말쑥한 얼굴로 앉아있는 우현이 알게 된 것은 마음 한구석에 뾰족한 가시처럼 툭, 튀어나와 거슬려서 불편했다. 그는 바흐의 사촌 동생이니까. 앞으로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운이 나쁘면 마주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야, 말조심해. 라희 씨 앞이잖아.”

“미안합니다. 라희 씨, 무안케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일단, 분위기 쇄신을 위해 마시죠. 건배.”

테이블 위 높게 들어 올린 맥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채챙, 하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라희도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리고서 잔을 들어 올렸다. 뿔테의 잔이 위에서 내려오며 라희에게 가볍게 부딪쳤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서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고개 돌려 맥주 잔을 기울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덧 밤이 깊은 것 같아서, 라희는 핸드폰 액정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라희가 액정을 끄고 테이블 위를 바라보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시간을 확인했다. 도윤이 늦었네,라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초면에 술자리 오래 갖는 것도 별로니까. 담에 또 보고 오늘은 이만하자. 나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공포의 월요일이다. 하아, 이번 주는 제대로 다녀야지.”

그는 뿔테를 향해 슬쩍 눈길을 줬다.

“라희씨가 돌아 왔으니 이제 방해꾼도 잠잠해질 테고.”

“음, 이제 가야겠다.”

뿔테가 말하자 옆에서 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라희 씨도 바래다 드려야 할 테고. 담에 또 보지 뭐. 선우 너, 이제 계속 서울이지?”

“어. 그렇게 됐어.”

뿔테가 대답했다. 민기는 뿔테의 어깨에 손을 얹고 툭툭 치며 말했다.

“좀 큰형이랑 사이좋게 지내. 작은 형 한테 하는 것만큼만 해라.”

“알았어. 먼저 일어난다.”

뿔테는 어깨에 얹혀진 민기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짓을 받은 라희도 일어섰다.

“라희 씨, 또 봬요.”

“선우랑 담에 또 보죠. 그땐 술이 아니라, 이 근처에서 맛있는 밥 선우더러 사달래서 얻어먹어야겠네요. 그간 시달린 대가로.”

도윤과 민기가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살펴 가십시오, 형수님.”

우현도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연상인 우현이 깍듯이 대하자, 라희도 어색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럼, 간다.”

술집 정문으로 향해 걷는 뿔테를 라희가 뒤따랐다.

거리는 여전히 북적였다. 거리에는 불켜진 가게 계단 위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술집 앞에서 다음 가게를 어디로 할지 정하느라 서성이는 사람들로 붐볐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이었지만, 강남이 그렇듯 대낮 같은 분위기였다. 조금 걸으니 도로 가에 택시들이 술에 취한 손님을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라희가 발걸음을 멈추고 택시를 보며 말하자, 뿔테는 라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첫 잔을 제외하고 거의 입만 대다시피 한 라희와 달리 그는 약간의 취기가 도는 듯 보였다.

“싫어. 자기, 내가 바래다준다 할 까봐 떠는 거 보인다. 안심해. 대신 지금 보내지는 않을 거야.”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으세요?”

라희는 조심스럽게,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휴학한 라희와 달리, 그는 직장인이니까.

“괜찮아. 어차피 형네 병원인데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아, 있구나. 형수.”

대답하던 그는 귀찮은 기억을 털어내듯 짜증스럽게 찡그린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져 이마 위에 흩날렸다. 헝클어진 머리는 그의 인상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라희는 생일 파티에 만난 그의 형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김나영. 짧은 커트머리에 차가운 인상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자. 냉랭한 둘 사이의 분위기도 기억났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나영과, 이렇게 눈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의 뿔테는 자연스레 대비되는 분위기였다.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어, 저기 편의점.”

코너에 위치한 큰 편의점을 발견한 뿔테가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희가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동안 재빨리 매대를 뒤진 그가 손에 뭔가를 들고 계산대 앞으로 다가왔다. 띡, 바코드 찍히는 소리가 났다. 카운터 선반에 놓인 물건은 이어폰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뿔테가 라희의 팔을 깍지 껴잡았다. 그의 손은 늘 그렇듯 따스했다. 그가 턱을 숙여 라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강 가자, 자기. 우리끼리 2차. 영화 속 같은 스플리터는 없지만, 대신 이걸로 한쪽 씩 나눠 같이 음악 들으면서 일상 속 진주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하나하나 꿰어볼까.”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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