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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고 나온 영화는 그가 처음 말한 대로 음악영화였다.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이라는 제목답게, 인생의 기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인생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음악으로 소통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 까지 알뜰하게 스토리로 가득 채운 영화는, 성공 스토리였고 해피엔딩이라, 보고 나니 마음까지 가뿐해졌다. 영화관 밖으로 걸어 나오며 뿔테가 입을 열었다.
“음악은 영화 아니었으면 별로였을걸. 스토리도 생각보다 별로고. 로맨스라기엔 뭔가 빠진 느낌인데.”
라희는 스토리를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달달하고 애틋한 로맨스물은 아니었다.
“그러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하자, 그가 그치,라고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 스플리터(splitter:스테레오 분리잭) 말이야. 그거 그런 식으로 굳이 우편을 통해 보낼 이유는 없을 텐데.”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아 간직하고 있던 스플리터는 나중에 여자 주인공과 밤거리를 헤매며 같이 음악을 듣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여자가 우편으로 남자에게 보내준다. 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게 보통, 사귀던 사이였다가 깨지거나 하면 얼굴 보기 껄끄러워서 우편을 통해 보내는 거잖아. 사귀지 않은 사이라면 언제든 만나서 전해 줄 수도 있고, 마주해도 껄끄럽지 않으니 직접 전해주겠지. 아무래도 영화 중간에 뭔가 생략된 장면이 있나 봐. 하긴, 여주와 남주가 그 분위기에 키스라도 하면 바로 막장물이 되어버리니 스토리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젊은 새 여자를 두고 자기를 배신한 늙은 부인에게 돌아가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그럼, 이건 로맨스도 썸도 아닌 수챗구멍 같은 현실로 치닫지. 로맨스는 원래 현실이 아닌 환상이 필요하거든.”
“그래도, 정말 사랑했던 사이였다면 한 번쯤 한눈팔았다 해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요?”
라희가 반론하자, 뿔테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아니. 여자는 그럴지 몰라도 남자는 그렇지 않아. 혼인 중 남자의 바람은 비교적 흔하지만, 여자의 바람은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지. 그건 어떤 남자라도 마찬가지일걸.”
그는 덧붙였다.
“그래도, 그 장면 좋더라. 그 남주와 여주가 밤거리에 앉아 같이 음악을 들으며 일상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말하던 장면 말이야. 매일매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은 음악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진주 같다는 말.”
조금 전 본 그 장면을 떠올리며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와 장면이었다. 라희가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며 감상의 여운에 젖어 있는 것을 보던 그는 손을 깍지 껴잡고 건물 밖으로 이끌었다. 강남의 밤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가 보도 끝에 다가가 손을 흔들자 택시 한 대가 앞에서 멈춰섰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고 라희에게 타라는 눈짓을 했다.
“어디로 가는데요?”
라희가 묻자, 그가 문 열린 뒷좌석 앞에 서 있는 라희를 몸으로 밀어 택시 안으로 몰아넣으며 자신도 올라탄 후 문을 닫고 답했다.
“기억하지? 아까 방에서 한 약속. 같이 가주기로 했잖아.”
라희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뚫어지게 뿔테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건성으로 싱긋 웃고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앞으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들은 택시가 쭉 뻗은 강남대로를 향해 출발했다. 라희의 계속되는 시선 속에서 뿔테는 같이 깍지 낀 손을 꽉 맞물려 다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전화 왔었잖아. 자기가 새벽에 봤던 그 친구들인데, 어제 좀 많이 달렸거든. 원래 술은, 술로 해장해야 하는 법이라. 가볍게 해장도 할 겸, 자기도 꼭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라희가 급히 손을 빼려 하자, 손아귀에 힘주어 꽉 조여 붙들어 맨 뿔테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이렇게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거야. 약속했잖아? 절대 도망가면 안 돼. 만약 자기가 도망가면 여기서 그냥 큰소리로 울어 버릴 거야. 기사님이 쳐다본다면 방금 슬픈 영화를 봤다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대야지.”
뿔테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압구정로에 위치한 2층 술집이었다. 밤거리의 빛이 너울지는 대로로 탁 트인 오픈 테라스에서 한참 그의 친구들이 둘러앉아 맥주 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뿔테에게 손을 꽉 잡힌 라희가 주춤거리며 다가가자 그들이 먼저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명일 거란 예상과 달리, 테이블에 서 있는 남자는 셋이었다. 둘은 어제 본 얼굴이 맞았는데, 다른 한 명은, 처음 본 얼굴이었는데 어디선가 본적 있는 듯 낯설지는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모르는 사람인데, 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까.
“어서 와, 우리 먼저 시작했어. 너 기다리며 가볍게 마시고 있었지. 앉자.”
그들 중 대표로 짧은 머리가 환한 얼굴로 인사하며 말했다. 낯선 남자들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는 라희를 향해, 뿔테가 소개를 시작했다.
“인사해, 이쪽은 내 20년 지기 친구들. 김도윤, 이민기.”
새벽에 마주친 짧은 머리가 도윤이었고, 하얀 옷을 입었던 사람은 민기였다. 간밤의 조금 흐트러졌던 모습과 달리, 오늘은 둘 다 말끔한 얼굴에 강남 바닥에 흔히 볼 수 있는 세련되고 단정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반갑습니다. 라희 씨. 다시 뵙네요.”
민기가 먼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실은, 제가 보자고 했어요. 오늘 달달한 데이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멀쩡한 정신일 때 만나서 해명해야 할 거 같아서요. 어제는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짧은 머리 도윤이 길게 말하며 인사했다. 라희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마치자 뿔테가 만족한 얼굴로 낯선 남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여기는, 한우현.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알고 지낸 중, 고등학교 후배인데, 도윤이랑 친해. 우현아, 인사해. 형수님이시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조금 전 형님들께서 말씀해 주시기에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했는데, 진짜네요.”
그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기에 라희도 허리를 구부려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인원이 추가된 만큼, 종업원이 맥주 잔과 안주를 부지런히 테이블 위로 날랐다. 라희는 테이블마다 주객들로 북적이는 오픈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환히 불을 밝힌 밤거리 길 건너 영업 종료 중인 압구정 현대 백화점이 보였다.
“자, 건배하죠. 오늘 드디어 멀쩡한 정신으로 복귀하게 됨을 위하여!”
다섯 개의 잔이 공중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첫 잔이 비워졌다. 이곳의 자랑인 수제 흑맥주는 풍부한 크림색 거품과 톡 쏘는 듯 강한 탄산이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넘김을 남겼다. 첫 잔은 원 샷이라는 말에, 단숨에 들이 키고 나자 순간 머릿속이 아찔했다. 라희가 얼굴을 찡그리자, 그걸 본 뿔테가 빙긋 웃으며 피처 잔을 들어 라희 앞에 놓인 빈 잔에 맥주를 반만 따랐다. 그나마 절반은 거품이었다.
“이번에 도윤이네 회사에 대학생 인턴으로 들어갔었다며?”
뿔테의 피쳐 잔은 곧바로 우현을 향했다. 우현은 황송한 듯 두 손으로 맥주를 받아들었다.
“네. 형님.”
“졸업 후 증권회사 취직하려고?”
“예. 아무래도 전공이 상경이다 보니, 지원하는 쪽이 금융권이니까요.”
우현이 예의바르게 답했다. 오랜만에 본 사이인 듯 뿔테와 우현의 말이 오갔다. 그들이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라희는 멍하니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우현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에 기억을 헤집는 중이었다. 그때, 옆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라희를 의식을 깨웠다.
“라희 씨는, 전공이?”
도윤이었다. 라희가 고개를 돌려 말하려 할 때, 옆에 뿔테가, 가로채듯 대답했다.
“경영이야. Q대.”
그러자 옆에서 우현이 소리쳤다.
“아, 저 거기 맛집 많이 아는데.”
“그 말이 여기서 대체 왜 나오냐.”
도윤은 핀잔을 줬다.
“아니, 그냥 전 여친이 거기 다녀서요. 지금은...”
머쓱해진 우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어물거리자, 잠자코 있던 민기가 맥주 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야, 여자는 또 만나면 되지. 자, 마셔.”
다시 가득 찬 맥주 잔이 부딪쳐졌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맥주 잔이 오가는 테이블 위에는 잡담과 함께 세상 사는 이야기가 흘러갔다. 라희는 잠자코 대화에 귀 기울였다. 혹시 어딘지 낯익은 우현에 대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들은 모두 다 같은 H고 출신인데, 뿔테는 J대 의대를 갔고, 도윤은 S대 상경 출신으로 증권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민기는 K대 어문계열 졸업 후 번역 관련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대화 도중 우현이 Y대 상경이라는 말이 흘러 나오자, 라희는 왜 그가 낯설지만 낯익었는지 알 수 있었다.
Y대. 미라네 학교였다.
한우현?,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희가 용기 내 물었다.
“혹시, Y대 고전음악동호회와..”
“어, 형수님. 어찌 아시고, 네 맞습니다. 제가 이번 년도 회장이죠. 그것 때문에 제대 후 아주 바쁘게 살고 있지요.”
라희가 건넨 말에 우현은 깍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순간 라희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다. 고전음악 동호회 회장. 우현은 바흐의 사촌동생이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미라와 기현에게 붙들려 끌려가다시피 한 스카이라운지에서 언뜻 스치며 그를 본 기억이 났다. 설마, 우현도 나를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날카롭게 찔러오는 긴장으로 맥주에 얼얼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죠? 혹시 잘생긴 제게 관심 있어서 뒷조사를? 그럼 안 되는데. 형수님. 관심을 거두어 주세요. 저 선우 형님에게 죽습니다. 어디론가 으슥한데 끌려가서 메스로 해체 당할지도 몰라요.”
다행이었다. 우현은 라희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날, 스카이라운지는 동호회 회원들과 타과 학생들로 북적였고 라희로서는 미라 손에 붙들려 딱 한번 참석한 자리이니, 기억하는 것도 무리였다. 술자리가 지속되면 우현에 대해 자연히 알게 될 것을 괜히 먼저 아는 척하며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 진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괜한 의심만 산 질문을 들은 뿔테가 집요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라희는 의미 없는 웃음을 살짝 입가에 머금고 대답했다.
“제 친구 미라가, 거기 회원이거든요.”
“아, 미라. 3학년, 기억나요. 그렇군요. 술자리 외에는 동아리 일에 참석하지 않는 유령회원이죠. 하하.”
우현의 웃음과 함께 다시 테이블 위에는 술잔과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종합해 보면, 지난 여름방학기간 동안 도윤이 속해있는 증권회사에서 개최한 대학생 인턴 모집에 우현이 뽑히게 되었는데, 그동안 대학이 달라 소원했던 두 사람이 회사에서 만나 다시 절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현아.”
민기가 술잔을 기울이며 불렀다.
“예. 형님.”
우현이 깍듯이 대답했다.
“너, 굳이 도윤이네 회사 안 들어가도 되지 않냐? 너네 형 있잖아. 비슷한 일하고 있는 거 아니야?”
민기의 질문에 도윤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누구?”
도윤이 물었다. 그러자 민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우리 1년 선배 있잖아. 우현이 사촌 형. 전교 학생회장.”
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가, 기억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욱이 형?”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욱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라희는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바흐의 이야기다.
두근, 두근,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엇박자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신경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은 긴장감에 라희는 앞에 놓인 차가운 맥주 잔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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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