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56화 (5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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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오니 하늘은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저녁이 되면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질 거 같아 카디건을 걸치고 왔는데, 잘 한 것 같았다. 이른 저녁을 맞아 네온 등이 켜진 거리에는 가을바람이 불었다. 얼굴 위로 바람이 스치자,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옆에서 걷던 뿔테가 라희의 뺨 위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얼굴 위에 닿은 손끝과 같은 온기를 간직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 잡은 뿔테의 손을 따뜻했다.

길을 걸어 아웃백에 도착했다. 다른 점과 다르게 강남점은 번화가인 강남역과 한 블록 떨어져 있어서인지 저녁 무렵에도 심각하게 붐비지 않았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대부분 4인석을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2인이라고 알리고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십분 정도 기다린 끝에 이름이 불리고, 이내 직원의 안내로 2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매장은 저녁식사를 먹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아웃백은 오랜만이네.”

뿔테가 북적이는 주위를 둘러보다 앞에 놓인 메뉴판을 펼쳤다. 유심히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아까 TV 화면에 걸려있던 두툼한 스테이크를 골랐다.

“남자의 위장을 만족시켜 주려면, 역시 반근에 가까운 묵직한 고기가 최고지. 자기는?”

라희는 메뉴판을 넘기다가 파스타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투움바 파스타요.”

라희가 고르자 뿔테는 서버를 향해 손짓했고, 담당 서버가 오자 스테이크와, 수프 대신 샐러드, 투움바 파스타 그리고 레몬에이드 2개를 시켰다. 동성과 함께 왔더라면, 레몬에이드 두 개가 아닌 각각 다른 맛으로 시켜서 나눠 먹었을 텐데, 남자다웠다. 주문을 마치자 곧 따끈한 부시맨 브레드가 나왔다. 그는 바구니에 손을 내밀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빵을 가로로 두툼하게 잘라 노란 허니 버터를 듬뿍 묻혀 들고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라희는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니까.

“아, 해봐.”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고 바라보는 그를 향해 라희는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입안 가득 들어온 달콤한 버터크림이 듬뿍 묻어있는 빵은 혀끝에서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씹을 때마다 조금 두터운 겉은 조금 바삭바삭해서 거친 식감으로 부서지고, 부드러운 가운데 속은 매끄럽게 뭉쳤다. 거기에 어우러진 따끈한 빵의 열기에 흠뻑 녹아든 달콤한 허니버터가 입안을 즐겁게 했다.

“난 자기가 이렇게 내가 주는 음식 받아먹는 게 좋더라. 어쩐지 뿌듯해. 아기 새를 먹이는 어미 새가 된 기분이랄까. 물론, 성별 때문에 아빠 새겠지만. 윽. 슬프다. 아빠라니. 그냥 연인 새하면 안 될까? 하지만, 자연에서는 독립하지 못하는 성인 개체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구나. 아닌가? 구혼할 때는 예외니까, 그래 맞아. 먹을 걸로 유혹하며 구애 중인 새가 되겠네”

뿔테의 안경 너머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맛있어?”

그가 묻기에 라희는 씹고 있던 빵을 꿀꺽, 넘기고 레몬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신 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가 미소 띤 입을 벌려 말을 이었다.

“나랑 먹어서 더 맛있는 거야. 그거 알아? 음식은,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좌우되기도 해. 더 맛있기도 하고 소화가 안돼서 체하기도 하지. 그래서 데이트 때 밥을 먹어보잖아.”

샐러드를 시작으로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두터운 채끝 스테이크를 썰어 한 조각 포크에 찍어든 그가 라희에게 한입 먹여주고 나서 본격적으로 음식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남자들, 특히 오빠와 같이 게걸스럽게 먹는 그를 보던 라희는 앞에 놓인 투움바 파스타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잘게 채친 치즈 조각 아래 새하얀 크림이 듬뿍 소용돌이쳐 넓은 파스타면에 감겨들었다. 돌돌 동그랗게 말아서 포크를 위로 들자, 뿔테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 속에서 라희는 파스타를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입안 가득 씹히는 파스타면은 짭쪼롬한 새우 향과 어우러져 고소한 크림의 풍미를 더해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났다.

조용히 음식을 먹는 동안, 건너편에서 커플의 대화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듣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통로를 가운데 둔 거리는 가까웠기에 둘의 대화는 너무도 똑똑히 들렸다.

건너편에 앉은 평범하게 생긴 남녀는, 스무살 초중반 커플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끌리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첫 데이트일 거라 생각했다. 음식을 먹으며 좀 더 대화 내용을 들어 보니 여자가 남자에게 더 관심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건네면, 여자는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한 높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여자의 반응에 신이 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무미건조한 내용이었음에도 여자는 계속해서 과장된 호응과 깊은 관심을 보였다.

“흐음.”

뿔테는 높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옆 테이블에 슬쩍 눈길을 주고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그는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남자는 알고 있을걸.”

“......무엇을요?”

라희가 입모양으로 작게 물었다. 뿔테는 라희의 입술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동안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말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호감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거.”

라희는 건너편 테이블의 남녀의 표정을 흘낏 바라보았다. 말을 하고 있는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테이블 위를 팔꿈치로 눌러 두 어깨를 세우고 남자를 향해 몸을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둘은 관찰한 후 눈을 돌리자, 바로 라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뿔테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옆에 놓인 레몬에이드 잔을 들어 기울여 마셨다. 레스토랑 천장의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에 그의 눈에 깊은 음영이 생겼다. 뿔테는 속눈썹이 짙게 그림자 진 깊은 눈매로 라희를 응시했다.

“자기도 알고 있지?”

그가 평소와 같은 크기의 음량으로 물었다. 라희는 두꺼운 파스타를 먹기 좋은 크기로 포크 끝에 감아내며 물었다.

“어떤 거요.”

그러자 그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턱을 살짝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입매는 미소에 가깝게 끌어올렸지만, 짙은 눈썹은 살짝 모아진 채였다. 라희가 답을 기다리고 있자,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듯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라희는 포크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그를 향해 위로 들었다. 그러자 그가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가 필사적이라는 거.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라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내려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 다시 포크 끝을 돌렸다. 돌돌 포크 끝으로 파스타를 감으려 했지만, 윤기나는 크림색 소스에 적셔진 파스타 면은 자꾸 포크 끝에 감기지 않고 헛돌며 주위를 맴돌았다. 포크는 접시 위에서 한참을 헛바퀴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여러 번 시도 끝에 돌돌 감겨진 파스타를 느릿하게 들어 올려 먹으려 할 때, 불쑥 뿔테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외쳤다.

“그거 나 먹여줘. 아-.”

라희는 포크를 들고 있다가 주춤, 하며 그의 입에 천천히 파스타를 넣었다. 그는 라희를 곧게 바라보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의 입가에 하얀 소스가 가득 묻어났다.

“어때? 나 정도면 먹이 주고 가둬 기를만한 짐승이지 않아?”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번들이는 소스가 입매를 망쳤다. 라희는 파스타 접시 옆에 놓인 냅킨을 한 장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

“손이 많이 가서요.”

라희가 그의 입매를 가볍게 톡톡, 닦아 내는 동안 뿔테의 눈매는 살며시 눈꼬리가 접히며 휘어졌다.

“그게, 진짜로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어서 그래.”

어쩐지 장난스러운, 이어지는 질문을 도발하려는 듯한 말투였지만, 라희는 그냥 그의 장단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뭘 먹고 싶은데요.”

라희가 파스타 접시를 보며 무심한 듯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했다.

“딱 한가 지지.”

그리고 뭔가 그다음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거기서 멈췄다.

“...........?”

일부러 침묵해 궁금증을 유도하려는 듯한 그의 도발에, 라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라희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블랙톤의 뿔테 안경의 그림자가 음영을 만들며 내려앉은 그윽한 눈매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한쪽 눈매를 찡긋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똑똑히 들리도록 말했다.

“자기.”

그가 마주 보고 빤히 내뱉는 낯간지러운 말들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서 라희는 손을 들어 길게 뺀 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가렸다. 그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 숙여 묵묵히 먹는데 집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어스름이 짙게 깔린 서늘한 저녁이었다. 서울의 한복판,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한 군데인 강남은 도처에 환한 불을 켜고 낮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라희가 서늘함에 카디건을 여미자, 그가 팔을 뻗어 라희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얇은 카디건 옷감 위로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이제 영화 보러 가자.”

그가 앞을 향해 턱짓했다. 둘은 그대로 강남역 쪽을 향해 걸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조금씩 날려, 주변을 밝힌 화려한 네온싸인 빛에 반짝이며 휘날리다 금비처럼 내려와 바닥에 깔렸다. 이젠 정말 완연한 가을이구나 싶은, 그런 밤거리를 한참 걷는데 문뜩 뿔테가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어느새 주머니에서 꺼내든 전화기가 커다란 손안에서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잠깐만.”

뿔테는 그렇게 말하고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아니, 지금 만났는데. 이제 밥 먹었어.”

휴대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지난 새벽의 두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응. 뭐? 누가 와? 아아.. 뭐 상관없지. 모르는 애도 아니고. 중학교 고등학교 후배잖아.”

뿔테는 잠자코 서 있는 라희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그래, 먼저 시작해. 난 괜찮으니까. 지금 강남역에서 영화 보고, 음 두 시간? 그 정도 있다가 합류할게. 어제 마셨던 거기지? 알았어.”

전화를 끊은 그가 라희를 보며 싱긋 웃으며 눈짓으로 앞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CGV라고 쓰인 붉은 등이 보였다.

“들어가자.”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편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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