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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따뜻한 물로 씻고 난 뒤,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대충 말린 후 밖으로 나왔다. 방안에는 마치 자기 집처럼 침대에 편안히 엎드려 누워 TV를 보고 있는 뿔테가 보였다. 욕실에서 나온 라희와 눈이 마주친 뿔테는 눈매를 휘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뻐.”
그가 중얼거렸다. 라희는 대꾸 없이 침대 옆 화장대로 향했다. 작은 화장대에 앞 앉아 거울을 보며 화장대 선반 위의 스킨과 로션을 차례로 발랐다. 그때 거울 속 침대에 누워있던 뿔테가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다가 마지막으로 파우더 팩트로 유분기를 잡아 뽀송하게 마무리하려 퍼프를 얼굴 위에 톡톡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이이이이잉 진동소리가 들렸다. 라희의 핸드폰은 진동이 아닌 벨 소리로 해 두었기에, 결코 자신의 것 일리는 없었다.
라희는 소리가 들리는 진원지를 찾아가 진동이 크게 울리는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였다. 침대 위, 방금 전 뿔테가 누워있던 그 자리에 놓인 낯선 휴대 전화가 액정 화면에 불을 켜며 드드드드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전화왔......”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가 주방 겸 거실 앞에 서있는 뿔테를 본 라희는 순간, 하려던 말을 잃었다. 샤워하고 나서 그나마 데이트라니까, 일부러 바지 대신 원피스로 갈아입느라 욕실 앞바닥에 벗어둔 반바지에서 라희 폰을 꺼내들고 서 있는 뿔테와 눈이 마주쳤다.
“나야. 전화번호가 궁금했거든.”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침대 위 전화 진동벨 소리가 멈췄다.
“.........이리 주세요.”
라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뿔테가 천천히 다가와 전화기를 손에 건넸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라희의 시선이 뿔테에게 향하자, 뿔테는 슬쩍 눈을 피했다. 잘못한 것은 아는지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받아들고 막 미간을 좁히며 한마디 하려 입을 열려던 그때, ―꼬르르르륵, 꼬륵 꼬르르르르르요란한 소리가 뱃속에서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깨었을 때부터 울고 있던 배고프다는 몸 안 신호는 마지막 포기를 앞둔 나머지 발악에 가까웠다. 순간, 라희는 당황해서 황급히 배를 손으로 눌렀고, 동시에 앞에서 조금 얼어있던 뿔테가 갑자기 쿡, 하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정말 크게 하하, 웃기 시작했다.
“자기는, 나랑 있으면 배고픈가 봐.”
한바탕 웃고 난 그가 화장대에 앉아 배를 눌러 잡고 어쩔 줄 몰라하는 라희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바닥을 얹으며 말을 건넸다. 마음대로 전화기를 만진 뿔테에게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막상, 지금 화내는 것도 이상해서 라희는 말없이 뿔테를 향해 눈을 흘겼다.
”뭐 먹을래? 원래는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나가서 먼저 밥부터 먹어야겠는데.”
그가 딴청을 부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라희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조금 구부려 라희의 등을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기분 풀어. 미안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알아내지 않았으면 영영 가르쳐 주지 않았을 거 아니야. 지난주 갑자기 자기도 집에 없고, 연락도 할 수 없어서 정말, 말 그대로 미치는 줄 알았거든. 자기 집 앞에서 매일매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 앞에다 CCTV라도 달아놓을걸. 불쌍하게 쪼그려 앉아 자기만 기다리던 내 모습 녹화된 거 보여주게.”
그가 하는 말을 듣던 라희는 눈에 힘을 풀었다. 지난주 그는 분명 둘째 형네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었는데, 거긴 서울이 아닌, 경상북도였다. 매일매일이라면, 설마 그 먼 거리를 꼬박 왕복했다는 말일까. 어림잡아도 고속도로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병원은요?”
불안해진 라희가 걱정이 담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뿔테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둘째 형네가 아니라, 이제 큰 형네에서 다시 일해. 지난번 형수 생일 때 형이랑 싸운 게 잘 풀려서.”
그럼, 서울이다. 밤새 어두운 고속도로를 왕복하지는 않았겠구나. 걱정으로 한순간 무겁게 내려앉았던 라희의 마음이 안심으로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화낼 타이밍을 놓쳤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으면 그만일 것을. 그의 말만 따라 답답했을 테니, 이 일을 가지고 괜히 화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희의 생각에 잠긴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밥 먹고 바로 영화 보러 가야겠다. 마침 시간 넉넉하게 예매는 해 뒀는데. 제법 평이 괜찮더라고. 꼭 자기와 함께 보고 싶었던 거라서.”
그가 미리 예매까지 해 두었다는 말을 들은 라희가 물었다.
“무슨 영화인데요?”
“제목이 비긴 머라던데. 음악영화래. 좀 쌀쌀한 가을 되어가니까 달달한 감성 로맨스가 땡겨서. 원래 그런 영화는 연인끼리 손잡고 보는 거잖아.”
남자들은 보통 액션 영화만 보지 않나? 오빠를 생각해 보면 액션이나 공포 영화 외에는 지루하다며 극장에서 볼 생각조차 안 했는데, 뿔테의 말은 의외였다.
“로맨스 영화도 보세요?”
남자가? 라는 의문이 담긴 라희를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물론, 영화관에서 액션을 더 많이 보긴 하지만, 딱히 장르를 가리지는 않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무거나 괜찮아. 구질구질 신파와 치정만 아니라면. 그런데 뭐 먹고 싶어?”
라희를 내려다보며 상냥한 미소를 얼굴 가득 잔뜩 담은 뿔테의 물음에, 라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 했다. 눈을 천장 위로 굴리며 먹고 싶을 것을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음식은 없었다.
“.......아무거나요?”
라희가 미적거리며 대답하자, 뿔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거나라니. 보통, 그 말 자체는 주관이 없거나 결단력이 없는 애매모호한 책임 회피형 성격타입의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타인에게 떠넘겨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말이긴 한데,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오면 원래의 의미가 아닌, 정말로 무시무시한 뜻이라던데.”
그는 대관절 무슨 소린지 궁금해하는 표정의 라희를 보며, 의도대로 걸려들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말을 이었다.
“여자가 말하는 아무거나에 담긴 심오한 뜻을 이해하려면 20년 결혼생활의 내공도 모자란대. 그만큼 난해한 말이 ‘아무거나'라 던데?”
“왜요?”
무심코 던진 말에 길게 의미 설명을 하는 그를 보며 라희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음, 어디선가에서 읽었는데, 여자가 말하는 아무거나 라는 뜻은 상대 여성의 입맛과 평소 취향 그리고 그날 입고 나온 패션 스타일에 맞춘 메뉴를 남자가 알아서 척척 맞춰 대령하지 않으면 절대 응이라고 말하거나, 긍정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을 테다,라는 굳센 의지의 표현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근데,”
말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매를 가늘게 휘어 올린 뿔테가 라희의 두 손을 깍지 껴서 맞잡았다.
“나는, 자기가 절대 응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전투적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설레는데. 지금 이렇게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듯 말이야.”
그가 갑자기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겨 화장대에서 일으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 놀란 라희는 그에게서 벗어나 몸을 빼려 비틀었다. 하지만 뿔테는 자신의 손에 붙잡힌 라희를 살짝 미끄러트려 바로 뒤 침대에 눕혔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라희의 등에 닿았다. 그리고 그 위로, 곧바로 뿔테가 몸을 누르듯 겹쳐왔다.
누워있는 라희 위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짝 몰아붙인 그가, 가만히 라희의 눈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비껴 옆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어.”
뿔테는 라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귓가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입술 끝을 세워 목덜미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목 언저리에 흩뿌려졌다. 소중한 것을 조심스럽게 안 듯이 라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목덜미에 짧은 키스하던 그는 점차, 강도를 더해가며, 입술을 벌려 혀끝으로 라희의 목을 핥았다. 따뜻한 체온에 감싸여 그가 주는 부드러운 감촉이 몸에 닿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라희는 반응하지 않고 나무토막처럼 가만 누워 있다가 그가 억세게 허리를 죄어오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강하게 옭아매던 손길이 놀란 듯, 스륵, 풀렸다.
“......왜?”
뿔테는 라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라희가 짧게 대답하자, 그의 시선이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여행 가방을 향했다.
“휴 그랜트 때문에 그래?”
“..........”
라희가 말없이 입을 다물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그는 약간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침대 앞에 서서 그런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라희도 어쩐지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라희는 이제 그에게 그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생각했던, 더 이상 이렇게 다가오지 말라는 말. 복잡한 심경이 된 라희가 막 말을 하려던 찰나, 눈을 들어 라희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냐. 됐어. 차라리 말하지 마. 들어봤자 오늘 데이트만 망치겠지. 차라리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속에 거닐며 나 자신을 보호하겠어. 난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을 마냥 좋아하는 행복한 올라프가 되고 싶거든.”
착잡한 심경의 라희가 눈을 내려 앉아있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그가 서 있는 라희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으며 물었다.
“키스는, 아까 했잖아. 그건 괜찮은 거지?”
라희는 여전히 그를 보며 침묵했다. 가만 서 있는 라희를 두 팔로 끌어당겨 뺨에 납작한 배를 기댄 뿔테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를 따스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가 그럴 기분이 되면 할 수 있는다는 거네?”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당장 머릿속 떠오르는 답은 하난데, 어쩐지 말을 하게 되면 따스한 눈을 가진 그에게 상처가 될 거 같아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가볍게 시작된 관계이니, 제풀에 지치면 흥미를 잃어 시들해지지 않을까, 그런 변명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거, 되게 쉬운걸. 자기를 그런 기분으로 만들면 되니까.”
뿔테가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두 손으로 감싼 라희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라희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게 문제다. 이렇게 그의 밝고 다정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이 부드러운 손길을 매몰차게 쳐내질 못하겠다는 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라희의 얼굴 표정이 약간 유하게 풀어지자, 그가 눈이 살며시 내려뜨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나, 행복한 짐승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면 안 돼? 인간은 다 동물이라잖아.”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뺨을 라희의 배에 부비적 거렸다.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애교를 부리는 것은 너무나 생소하고 어색한데, 이상하게도 싫진 않다. 그라서 일까. 그가 막내라서 자연스러운 걸까.
“들려? 자기 안에 들어가 따스하게 녹고 싶다고 올라프가 외치는걸.”
“올라프는 짐승이 아니에요.”
라희는 손을 들어 배위에 기대고 있는 뿔테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마물(魔物)이지만, 자기 만나면 틀림없이 한 마리의 행복한 짐승이 되고 싶을 거야. 안고 있으면 마치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온기를 내리쬐어 주어 좋고 안에 들어가 있으면 글쎄,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 따스한 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하고, 미끌거려서 좋은 걸. 가끔씩, 견딜 수 없이 뜨거워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하고.”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라희는 가만 서서 흐트러진 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으음, 그는 기분 좋은 짧은 소리를 내고선 라희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당겨 볼을 부볐다.
커다란 강아지 같은 그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머릿결 때문인지 심란했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재차 매만지는 손끝에 감기는 그의 머리카락은 산뜻한 향기를 피워냈다.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이 멈추자 그가 눈을 들어 라희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까. 나가서 뭐 먹을래? 아무거나 말고.”
그래, 지금은 그냥, 행복해하는 올라프를 괴롭히지 말자. 라희는 복잡한 생각을 비워내듯 가볍게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음....... 떡볶이요?”
“그건, 분식이잖아. 분식은 식사가 아니야. 식사 종류로 골라봐.”
꼬르르륵, 음식 이름이 불리자 뱃속이 배고픔에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식사? 파스타? 볶음밥? 라희가 머릿속에 대충 떠오르는 대로 뭘 할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가 고개를 돌려 TV 화면을 보며 말했다. 한가득 쌓여있는 음식 재료들 속에 두툼한 스테이크가 클로즈업 되어 있는 광고였다.
“그냥 아웃백 갈래? 저기, 새 메뉴 나왔다는데.”
아웃백? 아웃백이라면 집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있는 강남대로 건너편에 있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정말 아무거나 괜찮았다.
“갈까?”
그가 침대에서 일어서 라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희는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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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