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라희가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자, 복도에 서 있던 네 명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희에게 쏠렸다.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라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취기 어린 뿔테와 눈이 마주친 라희는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남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특히 뿔테의 친구들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라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살폈다.
모두가 어색하게 침묵하는 가운데, 앞집 남자가 입을 열었다.
"거, 여자친구도 나왔으니까. 이제 소란 그만 피우고 조용히들 하시오."
앞집 남자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좌중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더니 문을 쿵, 하고 툴툴거리듯 닫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어, 우리 산드라 블록. 집에 와 있었네."
뿔테가 앞에 서 있는 라희를 와락 껴안으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팔이 라희의 등과 어깨를 꽉 감싸 뿔테의 품으로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순간적으로 으스러질 듯 꽉 안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짙은 술 냄새와 온기가 온몸에 훅, 끼쳐 왔다. 뒤에 서 있는 그의 친구들의 눈초리가 무색했다. 초면인데 이렇게 다짜고짜 안겨있다니.
어색한 표정의 라희가 딱딱하게 굳은 몸짓으로 뿔테를 밀어 내려 손을 버둥거리자, 뒤에 서 있던 하얀 셔츠가 뿔테의 어깨를 움켜쥐어 라희에게서 떼어냈다.
"야, 놔. 왜 그래. 그만, 그만 놓으라고."
뿔테는 격하게 어깨와 몸을 흔들어 하얀 셔츠의 손길을 뿌리쳤다.
“너, 취했다니까. 소원대로 라희 씨 얼굴 봤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
“아, 집은 무슨 집이야. 우리 라희랑 있어야지. 라희야.”
해죽 웃으며 라희에게 다가서려는 뿔테와 그를 막으려는 하얀 셔츠가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그 광경을 라희가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라희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가 계면쩍은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선우가 지금 많이 취해서요. 지금 늦게까지 술 마시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거든요.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겨서 오긴 했는데. 오늘 우리가 술을 한 종류만 마신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면서 이술 저술 섞어 마시다 보니.“
라희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짧은 머리는 곁눈질로 라희의 안색을 살피며 굵고 낮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이렇 게 됐네요."
라희는 기분 나빠서 몸을 움츠린 것이 아니었는데, 여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건물 내부라 해도 따뜻한 침대 안에 있다가 나와서인지 초가을 바깥은 쌀쌀했다. 서울에 도착해 줄곧 빈속이라 더욱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라희는 양팔을 교차해 팔을 감싸고 잠자코 있었다.
뿔테는 하얀 셔츠에게 붙들려 라희를 향해 꼬부라진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뭐라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라희는 그런 그를 보고 가만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두바이에서 인천 공항으로 날아오는 동안 내내 생각해둔 할 말이 있었는데, 그가 만취한 상태인데다가, 친한 친구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초면에 이렇게 실례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선우는 저희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겠습니다.”
“......안 가, 안 간다고. 오늘 여기 있을 거야. 라희랑. 라희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뿔테가 비틀거리며 라희를 향해 움직이려 하자, 하얀 셔츠가 앞에서 단단히 버티며 그를 저지했다.
뿔테는 돌연 앞이 막혀 기분 나쁜지 진로를 방해하는 친구를 막무가내로 밀치기 시작했고, 이내 둘은 몸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 둘다 제어가 되지 않는지 점차 몸이 맞부딪치는 강도가 더해갔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햐얀 셔츠가 조금씩 뿔테에게 밀리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만 볼 수 없었는지, 짧은 머리도 가세해 뿔테의 어깨와 등을 붙잡았다.
“야, 너 취했다니까. 일단 집에 가서 쉬고 술 깨면 다시 오던가 해.”
“아니라니까, 멀쩡한데 괜히 그러네. 라희야, 그치? 나 안 취했지이이?”
친구들에게 몸이 붙잡힌 뿔테가 라희를 향해 히죽 웃었다. 라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룸 사람들의 새벽잠을 다 깨우기 전에 그를 건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네. 안 취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나가서 이야기해요.”
라희가 그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계단으로 향하자 뿔테는 친구들의 손길을 뿌리치려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선선히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휘적휘적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을 뻔한 그를 친구들이 재빨리 붙잡았다. 라희는 조금 앞서서 걸어 내려가면서 중간에 멈춰 뒤돌아보며 친구들의 부축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오는 뿔테를 살폈다. 이윽고 1층에 도착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원룸 건물 앞 도로에는 좀 전에 하얀 셔츠가 말했던 대리운전기사인 듯, 은색 자동차가 시동이 켜진 채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 라희는 낮은 소음을 내고 있는 자동차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뿔테를 기다렸다.
뿔테는 계단을 벗어나자마자 친구들의 손을 귀찮은 듯 뿌리치고 그들 보다 먼저 앞서 성큼성큼 조금 위태하게 휘청이며 걸어 라희에게 걸어왔다.
"어디 갔던 거야, 집도 비우고."
그가 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라희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취기에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이 다가온 뿔테의 발걸음은 라희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는 흐린 눈매를 가늘게 좁혀 아이가 투정하듯 눈을 흘기며 말을 건넸다.
라희는 순간, 현관 문 앞을 덕지덕지 덮고 있던 노란 포스트잇을 떠올렸다. 영어와 한글이 뒤섞여 꼬불꼬불 삐뚤삐뚤한 손 글씨로 적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검은색 펜을 들고 하나하나 포스트잇을 적어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만 서서 라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잠자코 있던 라희가 마침내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한발 앞으로 내디뎌 다가온 뿔테가 두 팔로 라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라희의 얼굴이 눌리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커다란 몸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라희는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단단한 팔에 감싸였다. 그의 품에 갇혀있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껴안은 그가 라희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이어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진짜, 미치도록.”
들릴락 말락 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덜컥, 귓가를 파고드는 그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라희는 그냥 그대로 그에게 안겨 서 있었다. 그는 라희를 껴안은 채로 더욱 끌어당겼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완전히 몸을 밀착시킨 그가 고개를 숙여 라희의 뺨에 볼을 부볐다. 그리고는, 라희에게만 들리도록 소리 죽여 속삭였다.
“휴 그랜트와 뭐 했는지 묻지 않을 게. 그냥 잠시 가만히 이대로 있어.”
맞부벼오는 뺨이 미세히 까끌거리는 감촉에 라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화요일, 여권을 가지러 집에 들른 라희가 남긴 메모에 적힌 메시지는 두 명의 외국 영화배우 이름이었다.
휴 그랜트, 산드라 블록.
두 사람이 함께 주인공을 맡은 영화 이름은 투 윅스 노티스(Two weeks notice). 순전히 제목에 들어간 2주 때문에 적어 놓은 것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로맨틱 무비였다. 라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맞닿아 까끌까끌한 뿔테의 뺨의 온기는,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흠, 흠..”
뿔테의 뒤에서 그의 친구들이 기척을 내느라 낮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희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의 어깨너머에는 친구 둘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었다. 그 둘은 건물 입구 앞에 서서,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어색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겸연쩍어 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라희가 손바닥을 뿔테의 가슴에 대고 밀어내려 하자, 그는 라희를 더욱더 힘주어 꽉 껴안았다. 밀어내려 하면 껴안기고, 다시 밀어내려 하면 껴안겨서 한참을 버둥거리며 있었다. 이내 체념하듯 라희가 뿔테의 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뒤에서 보다 못한 짧은 머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라희 씨 불편하게 그만하고, 가자.”
“싫어.”
뿔테는 라희를 힘주어 껴안고 안경 너머로 라희를 내려다보았다. 라희의 등을 힘껏 당겨 끌어안은 그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듯 외쳤다.
“내일 데이트 약속해주지 않으면 안가. 여기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거야.”
“...........와, 이 자식. 단단히 미쳤네.”
하얀 셔츠가 가까이 다가와 라희를 끌어안은 뿔테의 등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자니까. 야! 좀, 그만하고.”
“제발 가자. 선우야.”
친구 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뿔테는 꿈쩍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눈이 조심스럽게 라희를 향했다. 어쩔 수 없지만, 부탁한다는 무언의 재촉이 느껴지는 시선에 라희는 알았다는 의미로 느리게 눈을 한번 깜빡였다. 술에 취한 뿔테를 상대하려면 아이처럼 살살 달래는 수밖에 없다.
“..........좋아요. 내일.”
“내일.......?”
일순, 밝아진 그의 목소리가 되물었다.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데이트해요."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뿔테는 여전히 라희를 껴안고 풀어주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뿔테를 노려보다가 소용없으니 고개를 뒤로 돌려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야, 가자니까. 진짜 뭔.......”
하얀 셔츠가 짜증 난 얼굴로 검은 밤하늘을 쳐다보다 시선을 내리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진짜, 오늘 가지가지 한다. 야, 정신 차려.”
친구들의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뿔테는 라희를 끌어안은 채로 미동도 없이 가만 서 있었다. 알콜향이 진득하게 배인 숨결이 라희의 귓가에 흘렀다.
“..........또 어디론가 가버리는 거 아니지?”
귀에 가까이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묻는 그에게 라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입술은 귓가에서 미끌어져 내려와 라희의 목덜미 안쪽에 멈췄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켰다.
―쪽.
고개를 들어 라희의 뺨에 짧게 키스한 그가 드디어 라희를 놔주었다. 취기에 흐려진 눈동자를 담은 얼굴에는 헤죽거리는 미소가 가득 머금어졌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늘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엔 상태 멀쩡할 때 뵙죠.”
그의 친구 둘은 겸연쩍게 인사했다. 눈이 풀린 뿔테는 자동차 안에 짐짝처럼 우겨 넣어졌다. 한밤중에 소란을 피운 손님들을 태운 은색 자동차는 원룸 건물 앞을 출발해 점차 멀어져 갔다. 라희는 자동차가 사라진 골목길을 보고 있다가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긴장이 풀리자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왔다. 라희는 피로한 눈가를 쓰다듬으며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 나서, 자신의 방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뿔테의 테마송은 hellogoodbye의 HERE(in your arms) 네이년 검색하시면 나올거에용.
**
I like where we are, 난 우리가 있는 여기가 좋아.
When we drive, in your car 차에서 운전할때.
I like where we are.... Here 네 옆이니까.
Cause our lips, can touch 왜냐하면, 입술과 입술이 닿을 수 있고.
And our cheeks, can brush 뺨과 볼이 부벼질 수 있으니까.
Our lips can touch here 입술은 닿잖아. 이렇게 여기.
Well, you are the one, the one that lies close to me 단 한사람 뿐이야. 내곁에 누워, "안녕. 미치도록 네가 그리웠어."라고 속삭이는 사람은.
Whisper's "Hello, I miss you quite terribly"
I fell in love, in love with you suddenly Now there's no place else I could be but here in your arms.
난 너와 갑작스레 사랑에 빠졌어. 그리고 지금, 네 품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곳도 상상할 수 없어.
I like where you sleep, 난 네가 잠드는게 좋아.
When you sleep, next to me. 잠이 들때면 너는, 내 옆에서 자니까. 난 네가 여기, 바로 내 옆에서 잠드는 게 좋아.
I like where you sleep... here이상. 친절한 발 번역.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