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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52화 (5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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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는 TV 리모컨을 눌렀다. 뚝, 뚝, 힘주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채널이 휙휙 바뀌어갔다. 지루한 드라마 재방송 사이사이에 위치한 홈쇼핑 채널들마다 비슷한 것을 비슷한 말투로 팔고 있었다. 홈쇼핑 채널의 정신없는 광고 멘트가 멍한 귓가를 때렸다. 라희는 풀린 눈동자로 홈쇼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일요일 4 am. 어제 토요일 저녁 무렵 도착한 집에서 비행기에서 잠을 잔 탓인지, 밤새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시계를 보니 이제 새벽이었다.

바흐와 함께 한 일주일 남짓.

라희는 어둠 속에 누워 지난 일주일을 정리해봤다.

지난 토요일, 뿔테와 한강에서 치킨을 먹었고 그다음 일요일은 형수 생일 파티에 갔다. 거기서 바흐와 만나 도망치듯 청담동을 빠져나와 오피스텔에서 유진을 만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월요일 백화점에 들러 레스토랑에 갔다가 그의 본가에 처음 발을 디뎠다. 화요일, 여권을 가지고 공항으로 향했다. 수요일 버즈 알 아랍, 목요일 알마하 리조트 체크인, 금요일 오후 늦게 정신이 든 그가 뉴욕에 간다고 했고 토요일 새벽, 두바이를 떠나 한국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일 년 같았던 일주일. 그는 뉴욕에 잘 도착했을까. 열이 심하게 올랐던 몸은 괜찮을까.

그가 통화한 여자가 외쳤던 프레즈비테리언 병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병원에 갔을까. 병원이라니 거기서 몸을 치료받으면 괜찮겠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쓸데없고 부질없는 온갖 잡념들이 더러운 어항 속 부유물처럼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얇은 커튼조차 걸려있지 않은 불투명한 창가에 비추는 바깥 가로등의 오렌지빛 조명이 스며들어와 원룸 방바닥에 내려앉았다. 새벽을 향해 숨을 고르는 밤의 어두운 감상 속에서 라희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TV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른하게 내려뜬 라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아까부터 점점 쌓여가는 잠의 기운은 무거운 모래처럼 몸을 덮어가고 있었다. 쇼 호스트의 빠른 말소리가 웅웅대며 울렸다. 잠결과 뒤섞인 TV 화면은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졌다가 다시 흐릿해졌다.

이대로 화면 가득 상품의 장점을 클로즈업하는 홈쇼핑을 보면서 의미 없는 상업적인 판매 멘트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잠이 들것 같지만, 잠들기 마지막에 현란한 멘트를 날리는 쇼 호스트를 눈 안 가득 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깨고 나면 기억에도 없는 꿈이나마 뒤숭숭하지 않고 편안한 꿈을 꾸고 싶었다. 꿈속에서조차 홈쇼핑을 봐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지루해서 끔찍했다.

라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리모컨을 기계적으로 눌렀다. TV의 화면이 번쩍이며 바뀌어갔다. 영화 채널과 요리 채널, 여행 채널, 음악 채널. 카테고리 별로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는 비슷비슷한 화면이 이어졌다. 그때, 우당탕탕 하는 소음과 함께 갑자기,―쾅! 쾅! 쾅!

현관 문을 두드리는 엄청난 소음이 귓가를 때리며 들려왔다. 낮게 깔린 TV 소리를 무참히 뭉개버리는 폭력 같은 커다란 쇳소리였다.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희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과 부엌 겸 거실을 가르는 미닫이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 너머에 있는 현관문 밖에서 실랑이 중인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야,라고 부르며 크게 오가는 낯선 소리가 이어졌다. 깊은 새벽에 현관 문 밖에서 들리면서 계단을 울리는 커다란 말소리에 라희는 덜컥 겁이 났다. 여기는 강남의 원룸 골목이니 혹시 술에 취해 집을 잘 못 찾아온 사람들일까? 아니면...

삽시간에 불안함이 엄습하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이 쿵탕 거리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무겁고 둔탁한 무언가가 맞부딪치는 소리 너머 정체를 알 수 없는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경찰, 부를까. 라희가 망설이며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핸드폰을 쥐려고 한 그 순간, 술에 취해 반쯤 혀가 풀린 남자 목소리가 밖에서 크게 외쳤다.

“송라희! 야아, 나 말리지 마. 송라희!”

그와 함께, 조급하게 마구마구 누르는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신경질적인 초인종 소리는 건물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계속 이러다가는 건물 내 모든 사람의 잠을 깨우게 생겼다.

이름.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라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시끄럽게 띵동거리는 초인종이 울리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현관 밖의 광경이 화면에 담겼다.

밖은 세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남자는 현관 문에 붙어서 연신 초인종 버튼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두 남자는 난감한 표정이었는데, 짧은 머리의 남자는 명은 이마에 손을 얹고 복도 천장을 보며 멈춰 서 있고 다른 한 명은 허리 위에 양손을 올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 쉬고 있었다.

“야,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송라희! 문 열어!”

인터폰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외치는 남자는, 뿔테였다. 뿔테 뒤에 서서 이마를 짚고 있던 짧은 머리 남자가 뿔테의 어깨를 잡으며 그만하고 가자며 저지했다. 싫다는 뿔테와 짧은 머리 남자의 실랑이가 오가던 와중 다른 한 남자가 뿔테의 팔을 잡아끌었다. 뿔테는 거칠게 몸을 휘둘렀다. 버티려는 뿔테와 팔을 잡아당기는 힘의 균형이 갑자기 깨지자, 뿔테가 뒤로 밀렸고 그의 등과 맞부딪친 현관문이 퉁, 투둥,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들려왔던 둔탁한 소리의 정체였다.

“그만, 좀 하고 집에 가자. 밑에 대리운전기사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바닥을 보며 한숨을 쉬던 친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곱상하게 생긴 남자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 싫어. 아까 창문에서 번쩍거리는 거 봤다고. 분명 TV 화면이야. 안에 사람 있어.”

뿔테는 손바닥으로 현관문을 쿵쿵 내리치면서 외쳤다.

“라희, 거기 안에 있지. 나와. 나야!”

“아, 정말 하지 말라고. 야, 조용한 걸 보면 아직 비어 있어. 비어 있다고. 2주 뒤에 온다고했다며.”

짧은 머리 친구가 뿔테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뿔테는 그를 뿌리치고 현관 문 앞에 매달려 쾅쾅쾅, 주먹으로 철문은 두드려댔다. 그러자 하얀 옷을 입은 친구가 뿔테의 어깨를 뒤에서 찍어 눌렀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뿔테가 큰소리로 외쳤다.

“송라희! 라희야, 라희!”

라희는 망설였다. 문을 열어야 하나. 아니면 그가 갈 때까지 잠자코 있어야 하나. 뿔테 혼자였다면, 문을 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그의 친구들까지 있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얼굴 팔리고 싶지 않았다.

라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라희의 고민도 잠시, 점차 짙어진 소란 때문인지 건물 곳곳이 깨어나는 소음이 일었다.

당연하게도, 이 원룸 건물은 라희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고요한 어둠을 깨고 뿔테가 일으킨 소란은, 옆집과 앞집의 인내심의 한계를 넘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성급하게 앞집 문이 열리고 나타난 잠옷 차림의 덩치 큰 앞집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군데 이 밤중에 소란이야?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예의는 쌈 싸먹었었.....”

남자는 거친 등장과는 다르게, 점차 목소리를 흐렸다. 잠자다 열받아 문을 열고 뛰쳐나왔는데 정작 복도에 서 있는 키카 큰 세 남자에게 놀란 눈치였다. 덩치는 각각 달랐지만 자신과 비슷한 장신의 남자들의 눈초리가 그에게 쏠리자, 그는 멈칫하며 입을 닫고는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화를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술에 취해서..”

뿔테를 잡고 있던 하얀 옷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지금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짧은 머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그들 사이의 잠시 어색한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앞집 남자는 한밤중 숙면이 방해받은 것에 대해 엄청나게 화를 내고 싶었으나 쪽수에 기가 눌린 듯 보였다. 뭐라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한 당황한 앞집 남자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때, 그가 눈매를 좁히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

남자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손을 들어 라희네 현관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앞집 아가씨 보고 있었네. 인터폰 빨간 불 들어왔잖아.”

라희는 순간 숨을 턱 막혔다. 앞집 남자의 갑작스러운 지적에, 돌연 당황으로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안에서 현관 인터폰을 켜면, 바깥 카메라 밑 붉은 등이 켜진 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두근거리며 뛰는 가슴 안쪽이 옥죄어오듯 꽉 막혀 답답했다. 순간적으로 라희는 그냥 가만 침대 속에 웅크리고 있을걸,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후회는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아가씨, 보고만 있지 말고 나와. 남자친구가 지금 이렇게 난리 피우고 있고만.”

자신의 집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앞집 남자와 현관 앞 복도에 서 있던 세 남자의 시선이 모두 현관 카메라를 향했다. 주의 깊게 카메라 안을 살피는 시선 속에서 라희는 눈을 재차 깜빡이며 놀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라희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잡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달깍,

현관문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술 취한 뿔테의 진상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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