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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51화 (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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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말끔하고 깨끗이 씻고 나온 그의 창백한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힘없이 걸어와 소파에 털썩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힘겹게 눈이 감겼다. 그는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한번 쓸어 올렸다가 눈 위로 손을 덮고 한참이나 미동 없이 가만있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라희는 조용히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하얀색 버기와 리조트 직원들이 서 있었다. 버기 뒤에는 수납함 같은 것 달려있었는데 앞의 문을 열자 층층이 되어있는 선반 위에 식기와 요리가 담긴 접시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곧 직원들이 방으로 들어와 방 가운데 놓인 소파 테이블 위에 새하얀 천을 펼쳐 깔았다. 이어서 그 위에다 버기 뒤편에서 꺼내 가져온 식기와 잼과 소스가 담겨있는 접시를 가지런히 세팅했다.

테이블이 세팅되자 직원들은 버기에 실린 음식 카트에서 꺼낸 따끈한 음식들을 바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작은 편수냄비같이 생긴 식전 빵 바구니를 시작으로 신선한 주스와 차가운 음료와 식사가 준비되었다. 점심은 3코스로 황갈색 빛에 큼직한 크루통이 토핑 된 프렌치 어니언 스프와, 무스같이 부드러운 버섯 스프, 푸릇푸릇 신선한 채소 위에 깍둑 썰린 훈제연어 샐러드와 메인 요리인 노릇한 감자튀김이 투명한 컵에 담겨 데코 되어 잘 구워진 립아이 스테이크, 디저트로 겉을 바삭하게 그을려 카라멜라이즈화 시킨 바닐라 크림뷜레와 촉촉한 짙은 갈색의 초콜릿과 브라우니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순식간에 완성된 근사한 런치 테이블은, 레스토랑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 완벽해 보였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갓 만들어진 음식의 근사한 냄새가 방안에 낮게 깔리고, 직원들은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그는 고개를 내려 어지러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라희가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드세요.”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스푼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식욕이 없는지 어니언 스프만 몇 번 떠먹고는 말았다. 라희는 물리적으로는 배가 고팠지만 정신적으로는 음식 생각이 간절하지는 않아서 빵과 스프, 스테이크 몇 조각을 잘게 썰어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분명 맛은 있었으나, 더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라희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소파에 머리를 뒤로 기대어 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희는 겉이 바삭하게 부서지면서 안은 보드랍고 달콤한 크림이 들어있는 바닐라 크렘뷜레 한 스푼으로 식사를 마쳤다.

라희가 식사를 마치자, 그가 눈을 나른하게 뜨고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열이 높게 오르는지 움직이는 모양새가 휘청였다. 라희가 따라 일어서 부축하려 하자 그는 거절의 눈빛을 보내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방을 휘적휘적 걸어간 그는 자신의 여행 가방이 놓인 곳으로 걸어가 앞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툭 지갑이 먼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라희의 눈길은 무의식적으로 지갑 가운데 사진 부근에 머물렀다.

라희는 잠시 동안 지갑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라희의 시선을 눈치채고 잠깐 표정을 살피더니 몸을 수그려 지갑을 주워들었다.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손에 들린 지갑을 응시했다. 가운데 사진이 비죽, 튀어나온 모서리를 손끝을 움직여 반듯하게 제자리에 집어넣은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그대로 지갑을 탁, 덮어 지퍼 아래에 넣으면서 타이레놀 케이스를 꺼냈다. 두 알이 이미 비어있는 약 케이스에서 다시 두 알을 꺼내들고 소파로 걸어와 서서 테이블 위의 주스와 함께 꿀꺽 삼켰다.

“......다행이네요. 약이 있어서.”

라희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외로 나갈 때는 해열제와 소화제 같은 상비약을 늘 챙겨두니까. 해외에서는 병원을 가지 않은 이상 약 구입이 번거롭더군.”

그가 목이 잠겨서 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라희의 생각에 잠긴 표정을 살핀 그는 고개를 돌려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빌라 안은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 쾌적한 온도였지만, 문만 열면 바로 사막이었다. 밖은 열사의 사막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한낮의 열기로 흐릿했다. 데크 아래 깔려있는 곱고 미세한 황톳빛 모래가 태양빛에 반사되어 희게 반짝이며 빛났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 너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테라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유리 문이 확 열리자 서늘한 실내로 한낮의 더운 기운이 훅 하고 끼쳐 들어왔다.

나갔던 그는 잠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손에 들고 온 휴대 전화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바싹 말라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본체에 배터리를 끼우고. 뚜껑을 덮었다.

지잉.

낮은 진동 소리와 함께 검은 액정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조금 있자, 기본 화면이 밝게 나타났다.

“............고장 나지는 않았군.”

“다행이네요.”

그가 고개를 낮게 끄덕이며 핸드폰을 손에 들고 통화 목록을 뒤지려 버튼을 누르는데, 전원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수신되기 시작했다. 징, 징, 징, 계속해서 수신 알림 진동이 울렸다.

평소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량은 모르지만, 하루 정도 꺼둔 것 치고는 상당히 많은 수의 메시지였다.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도착하는 메시지 때문에 알림 진동은 계속 울렸다. 그는 눈을 내려뜨고 알림 팝업으로 인해 먹통이 되다시피한 휴대 전화 액정화면을 살폈다.

그때, 아까부터 울리던 알림 진동과는 달리, 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지이잉. 전화벨 같은 진동이 낮게 울렸다. 검은 액정 화면에 떠 있는 발신 번호는 매우 길었다. 호기심 어린 라희의 눈길 속에서 그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한진욱입니다.”

사무적인 어조로 이름을 밝히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 전화 밖까지 울릴 정도로 큰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빠! 유진 언니 전화 못 받았어? 왜 전화가...... 쓰러지셔서...프레즈비테리언 병원에......”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테라스로 향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밖이 견딜 수 없이 덥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창가 옆에 멈춰 섰다. 핸드폰과 귓가가 마주 댄 틈을 타고 여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빠른 말투로 계속 뭐라 다다다 말하는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이어졌다.

“그래. 그렇게 됐어 ..........지금은?”

그가 전화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미간을 살풋 찌푸리고 낮게 물었다. 그러자 그쪽에서 뭐라 뭐라 다다다 빠른 말이 시작되었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호응하듯 짭게 대답하며 듣고 있었다.

“알았어.”

그가 대답하면서 눈을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라희를 응시했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살짝 들린 시선 끝은 먼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갈게.”

그는 통화를 종료하고서 눈매를 좁히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휴대 전화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난 후 천천히 방안을 거닐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라희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검은 눈빛은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그의 눈길 속에서 라희는 테이블 위의 주스 잔을 들어 차가운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전화상의 내용은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명이 낯선 것으로 보아 외국 같았다. 그가 간다고 답했으니 목적지는 어디일까.

라희는 그와 보내기로 약속한 2주를 떠올렸다. 앞으로 일주일이 남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 한가득이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아 답해 줄 리가 만무했다. 라희는 혀끝에 맴도는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욕실로 통하는 방 앞에서 서성이던 그는 몸을 돌려 소파로 돌아왔다.

“일이 생겼어.”

그가 가까이 서서 입을 뗐다. 이제 약기운이 도는지 파리했던 혈색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라희는 달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라희 위에 머물렀다.

“음.”

소파 옆에 서서 미간을 좁히며 한참 말을 고르던 그가 불쑥 물었다.

“........커피?”

라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그는 소파로 돌아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넸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작은 에스프레소 전용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침묵이 감도는 방안은 진한 커피향이 피어올랐다. 그는 조용히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였다.

“대충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누가 입원했어요?, 무슨 일이래요?, 어디로 갈 건가요. 머릿속 마구 떠오르는 질문들을 가둔 입술을 다문 라희는 커피 잔 위로 눈만 굴렸다.

“오늘 나는 뉴욕으로 가야 해.”

뉴욕, 낯익은 도시. 드라마에서 접해서가 아니라, 불과 일주일 전 이유진이 친절하게도 밝히고 간 행선지다. 나는, 이라고 주어를 밝힌 그의 태도 속에서 답은 이미 알고 있는데, 유진이 마음에 걸려 괜스레 묻고 싶었다.

“...........같이 가나요?”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질문을 입 밖에 내자마자 라희는 속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정말로 묻고 싶었다.

“..........일주일이 남았는데.”

라희는 조그맣게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사족처럼 덧붙였다.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라희를 향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봐. 여기 계속 있고 싶으면, 있어도 되니까. 아니면....”

“돌아갈래요.”

라희는 바로 대답했다. 낯선 사막의 도시, 물론 홀로 여행 온 셈 치고 여기서 지낼 수도 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떠난 여행과 달리, 갑작스레 도착한 이곳에 계속 묵고 싶은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둘이 머물렀던 이 방에서 혼자..........

라희는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국은 새벽 3시 반 비행기야. 여기서 쉬다가 비행시간에 맞춰 챙겨서 나가지.”

“네.”

라희는 짧게 대답하고, 소파 옆에 놓인 휴대 전화로 두바이발 뉴욕 편 비행기를 검색했다. 에미레이트 항공 기준으로는 새벽 2시 출발이었다. 같이 공항에 가면 그가 먼저 떠나고 그다음이 라희 차례다.

말 없이 침묵하던 둘은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사막의 한낮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

10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라희는 인천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퍼스트 클래스에 편히 누워 내내 죽은 듯 잠을 잤기에 정신은 말짱했다.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강남에 내려 집까지 캐리어를 끌고 왔다. 거의 옷만 들어 있다시피한 여행 가방은 가볍게 라희의 발걸음을 뒤따라 왔다. 라희는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불과 한나절 전만 해도 허허벌판 모래바람 불어오는 사막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스팔트 깔리고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네온사인을 막 밝히기 시작한 강남의 초저녁 골목길이었다.

익숙한 길을 타박타박 걷다 보니 라희가 살고 있는 원룸 건물이 보였다. 서늘하고 어두운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정말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불과 일주일 남짓인데, 한 일 년은 여행하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통로를 지난 라희는 계단을 올랐다. 부드럽게 끌려 따라오던 여행 가방을 품에 안아들고 3층의 계단까지 올라갔다.

계단은 늘 그렇듯 비어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막 오르자 저쪽, 라희가 살고 있는 원룸의 현관문이 보였다. 라희는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두바이로 떠나기 전, 부랴부랴 성급하게 찢은 덕트 테이프로 붙여 놓은 하얀 종이가 아닌, 샛노란빛 작은 종이가 붙어있었다.

현관 문 중앙의 눈높이에 딱 맞춰 붙어있었는 노란색 포스트잇. 지난번처럼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투명한 테이프로 덧대여 단단히 붙어 있었다. 라희는 반질거리는 테이프 밑에 검은색으로 쓰인 낙서 같은 글을 읽었다.

「너무 길어.」

엉망인 뿔테의 필체가 비죽거리며 포스트잇 위를 기어 다녔다. 그걸 보고 있자, 갑자기 쿡,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혹여 빈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도둑이라도 들까 싶어, 라희가 남긴 것은 외국 영화배우 두 명의 이름뿐. 그것을 읽은 뿔테가 용케도 메시지를 이해했다.

언제 봐도 엉망인 뿔테의 글씨. 그나마 영어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저번에 본 영어 글씨는 지렁이가 지나간 흔적 같았으니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던 라희는 손톱을 세워 현관 문 앞 포스트잇과 그걸 붙이고 있는 테이프를 손톱 끝으로 긁어냈다.

뿔테가 알아차린 메시지는 2주. 바흐도 뉴욕으로 떠났고. 뿔테는 일주일이 지난 뒤에나 연락할 것이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아무런 방해 없이 집에서 편히 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열쇠를 들어 닫힌 현관문을 열었다. 어둡고 텅 빈 익숙한 공간이 라희를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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