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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50화 (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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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희가 눈을 떴을 때는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라희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살폈다. 그의 흔적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먼저 일찍 깼을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아도 그는 없었다. 평평한 베개는 그가 잠든 흔적이 아예 없었다. 순간 정신이 확 깬 라희가 몸을 일으켰다.

설마 어젯밤, 방을 나간 뒤로.....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에 침대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그를 찾아 헤매던 라희의 눈길은 굳게 닫혀있는 테라스 밖으로 향했다. 거울처럼 잠잠한 플런지 풀, 그 옆으로 어지럽게 널려있어야 할 옷가지 대신 가지런히 접혀 포개 있는 젖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의 선베드에 키가 큰 그의 머리카락이 비죽 나와 있었다.

라희는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의 사막의 기온은 서늘했다. 그 한기에 등골에 소름이 쭉 타고 위로 흘렀다. 라희는 얇은 가운을 걸쳐 입은 어깨를 살짝 떨며 선베드로 다가갔다. 그는 선베드에 누워 반듯한 모습 그대로 잠들어있었다.

이렇게 쌀쌀한 곳에서 설마 밤새 잠이 든 걸까. 라희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닿았다. 손바닥 아래 온기가 느껴졌다. 그를 재차 흔들어 깨우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에 취해 몽롱하게 풀어진 검은 눈동자가 라희를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주무세요.”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에 그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테라스 문을 열고 침대로 다가가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잠에 취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단정하고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던 바흐였다. 심지어 격한 밤을 보내고 같이 잠이 들었을 때에도 아침엔 늘 먼저 깨어있어 잠든 모습조차 보여준 적 없는 그였다. 침대에 누워 흐트러진 그에게서 낮게 억눌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라희는 잠든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다가 문든 방금 전 닿았던 손바닥의 온기를 기억해냈다. 바깥은 서늘하고 그 속에서 잠이 들었다면 몸이 차가워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라희의 다급한 손길이 그의 이마 위에 얹어졌다. 그는 뜨거웠다. 불덩이같이. 어제 젖은 머리로 밖에서 잠이 들어 감기가 든 걸까. 아니면 여행 피로 누적으로 몸살을 앓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제 한국인 커플 중 남자가 앓고 있던 병에 전염이라도 된 걸까. 그렇다면 역시 병원으로 가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겁이 덜컥 난 라희가 그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흔들었는데도 그는 고열 속에서 눈을 뜨지 않았다. 라희가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겨우 눈을 뜬 그가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릿한 시선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몸이 불덩이 같아요.”

그는 잔뜩 찡그린 눈을 몇 번 힘들게 깜빡였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열린 입에서 잔뜩 잠겨 쉰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아아..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지금 열이 너무 심해 뜨거워요. 로비에 도움을 청할까요? 약이 있을지도 몰라요.”

라희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무리해서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라희가 두 팔로 그를 저지했다. 라희가 보기에 그는 걷기는커녕,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짧은 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자신의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저기 앞쪽 지퍼에 타이레놀이 들어있어. 해열제니까, 두 알 먹고 약기운이 돌면 괜찮아질 거야.”

그는 힘은 없으나 분명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했다. 그가 이 말을 끝으로 베개에 털썩, 엎드리다 시피 얼굴을 묻었기에 라희는 침대에서 벗어나 그의 여행 가방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여행 가방의 앞쪽 지퍼를 열었다. 그때 갑자기 순간,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남성용 반지갑이었다. 리조트 내에서는 지갑을 쓸 일이 없으니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지퍼를 사이에 두고 위쪽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희는 지갑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무심코 벌려진 지갑을 들어 올린 라희는 지갑 가운데 비죽 튀어나온 사진 위에 시선을 멈췄다.

투명 케이스 너머로 살짝 삐져나온 귀퉁이가 낡은 스냅 사진 안에는 정말 앳된 모습의 유진과, 역시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온통 낯설지만 영어로 되어있고 어딘지 익숙해 보였다.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본 듯한 풍경.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흔한 미국의 델리 가게인 듯했다. 그의 어깨에 안겨 눈부시게 활짝 웃는 그녀와 그런 모습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

라희의 연갈색 눈동자는 박제된 추억 같은 사진 속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따사로운 봄 햇살 같은 환한 표정의 그가 애정이 듬뿍 담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덜컥, 뛰던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심경과 다르게 가슴속 심장은 두근두근, 낮은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시렸다. 뭘까. 꽉 막힌 듯 답답한 가슴이 숨 막혔다. 라희는 한동안 멍하게 사진을 응시했다.

“으음...”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그가 몸을 뒤척이며 뱉어내는 낮은 소리에 라희는 서둘러 지갑을 닫아 원래 들어있던 위쪽에 넣었다. 지퍼의 아래쪽에서 타이레놀 ER이라 쓰여 있는 노란색 종이 케이스를 발견했다. 거기서 두 알을 꺼내고 서둘러 지퍼를 닫았다.

라희는 침실을 나가 냉장고 속 생수를 컵에 가득 따라 약과 함께 그를 깨워 건넸다. 그는 열에 들떠 비몽사몽 한 지 눈을 뜨기조차 힘겨워했다.

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건네지는 물과 약을 받아들고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어 꿀꺽 삼키더니 다시 침대 위로 떨썩, 쓰러져 죽은 듯 눈을 감았다. 평소처럼 흠 잡을데 없는 유려한 행동도 아니고 굳게 닫힌 단정한 입매가 아닌, 무방비하게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 열에 들뜬 거친 호흡이 넘나들었다. 라희는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옆에서 가만 살피듯 바라보았다.

지갑 속 스냅 사진에서 보았던 그의 표정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지금의 그 보다 더 어리고 젊은 신선하고 풋풋한 그는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져있었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몽실몽실한 부드러움을 담고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당연한 듯 누리던 그녀, 이유진.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같은 얼굴의 그녀는, 지금 날이 서 있어 고혹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앳되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앉아있던 미드에서 나오는 어느 햇살 좋은 델리 가게의 창가는 마치 영원히 빛바래지 않을 추억 같은 선명한 영화 스틸 사진 같은 느낌이었다. 다정한 그들의 모습에 숨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사진 속 익숙한 물건과 문구가 눈에 들어왔었다. YALE. 그래, 그의 오피스텔에 있던 티셔츠. 사진 속 두 사람은 똑같은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그와 그녀.

누가 보아도 행복한 연인임이 분명한 두 사람. 그리고 태초부터 맺어지기로 한 연인들처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 청담동 뿔테 형수 생일 파티에서 마주친 두 사람을 떠올렸을 때도, 막상, 유진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눴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자리에 가만 앉아 조금 전 보았던 사진을 떠올리고 있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섬을 느꼈다. 라희 스스로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들이 한데 뒤엉켰다.

라희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어두운 깊은 눈빛이 아닌 밝고 선명한 눈매. 어두운 바흐가 아닌 해맑은 진욱. 그 따사로운 눈매에 담긴 그녀의 모습은 예리한 가시로 다가와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칼날같이 예리한 통증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순간, 아득한 현기증이 라희를 짓눌렀다. 소파의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으....으음..”

그가 침대 위에서 낮게 신음하며 뒤척이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라희는 그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땀이 흠뻑 젖은 이마는 뜨거웠다. 해열제를 방금 먹었으니 약효가 돌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전에 열을 조금이나마 식히려면........

라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로 다가가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작은 핸드 타월을 네 장을 찾았다. 네 장 모두 찬물을 적셔 대충 물기를 짜냈다. 그중 한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라희는 방으로 돌아와 물에 흠뻑 젖은 핸드 타월을 그의 이마 위에 얹었다. 얼마의 시간이 경과하자, 라희는 뜨뜻미지근해진 물수건을 걷어냈다. 시원한 찬물에 물수건 헹궈 살짝 힘주어 물기가 촉촉할 만큼만 비틀어 쥐어짜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아까 넣어 둔 차가워진 물수건을 하나 꺼내 그의 반듯한 이마 위에 다시 얹었다.

거의 오 분마다 그의 옆을 지키고 앉아 그의 이마 위에서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갈아내면서 라희는 이리저리 동요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억눌렀다. 혼탁한 머릿속을 오빠, 계약, 천, 오천, 백만 원, 돈, 지폐. 시간, 10개월, 차갑게 식은 감정 없는 명료한 단어들로 가득 채웠다.

*

그는 반나절을 꼬박 앓았다. 오후 늦게 돼서야 정신을 차린 그가 멍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힘들게 치켜뜬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떴다. 라희도 침대 맡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던 늦은 오후였다. 그의 기척에 라희도 잠이 깼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마른 세수를 몇 번했다. 잠에 취했던 흐릿한 눈동자가 조금 또렷해지자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머리맡의 시계를 확인한 그는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밥은?”

침대 맡에 엎드려있다가 일어난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커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니, 생각에 빠져 먹을 수가 없었다. 그의 미간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살짝 좁혀졌다. 그는 손을 뻗어 라희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다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인터폰을 눌러 룸서비스를 시켰다. 욕실로 향하는 그의 손에는 라희가 이마 위에 얹어둔 물수건이 쥐여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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