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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기에서 내려 빌라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물었다.
"커피?"
그의 눈길 끝에는 복도에 있는 네스프레소 기계가 있었다. 머신 위에는 새하얀 에스프레소 잔이 3개씩 양옆으로 6개가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활짝 열린 검정색 나무 케이스에 가지런히 놓인 네스프레소 캡슐이 6줄씩 6개가 놓여있었다. 저녁 식사에 샴페인만 마셨지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라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네.“
“골라봐.”
그가 캡슐 케이스를 가리켰다. 라희는 기계 앞에 서서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네스프레소 기계는 백화점 돌아다닐 때나 눈으로 보았었다. 이렇게 앞에 두고 있으니 각기 다른 색깔의 캡슐은 낯설었다. 검은색 Ristretto 보라색 Arepeggio 갈색 Volluto 황금색 Livanto 파란색 Vivalto Lungo 주황색 Linigio Lungo라고 쓰여 있었다. 케이스 위쪽에 캡슐의 이름과 색이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었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라희가 망설이고 있자 그가 뒤에서 검은색 캡슐 하나와 주황색 캡슐을 꺼내 들었다.
“아메리카노로 마실 거면, 룽고 Lungo가 나아.”
라희는 옆에서 그가 커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기계를 켜고 하얀 커피잔을 준비해 주황색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렸다. 버튼을 두 번 누르니 근사한 향과 거품이 있는 커피가 만들어졌다. 라희에게 커피잔을 건네고서, 머신 위에 놓여있는 에스프레소 잔을 꺼내 검정색 캡슐을 넣고 에스프레소를 만들었다. 추출을 마친 커피를 잔받침에 받쳐 들고서 둘은 테라스로 향했다.
한밤의 플런지풀은 나무 데크 위에 나란히 놓인 선베드에 누워 그 사이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에 커피잔을 올려놓았다. 사막의 밤은 모든 것을 이글거리며 삼킬 것 같은 낮과 대조적으로 선선했다.
탁 트인 사막 위의 풀 사이드는 고요한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 고즈넉한 운치가 있었다. 건물 외벽에 환히 불을 밝힌 야외 등과 수영장 내부에 있는 조명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수면은 건물의 조명을 그대로 반사했다. 수영장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과 함께 수면은 푸른빛이 아닌 영롱한 초록빛 에메랄드색으로 빛났다. 빌라의 조명이 환히 밝힌 모래 언덕 너머로 검푸른 하늘 위 무수한 별빛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저 먼 지평선 끝에 맞닿은 검은 하늘 위 별들을 응시했다. 라희는 밤하늘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가 골라 만들어준 커피는 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구수한 맛이 났다. 선선한 기온이 느껴지는 가운데 따스한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뱃속에 온기가 돌면서 속이 사르르 풀어졌다.
커피를 마시며 별을 감상하고 있을 때 건조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옆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 누워있는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반듯한 이마 위로 살랑거렸다. 눈썹에 닿을 듯이 움직이는 머리카락이 거슬리는 듯, 그가 손을 들어 머리를 뒤로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이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는 그대로 목 뒤에 손을 고정하고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한 황금빛 조명 아래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절로 눈길이 갔다. 라희는 온기가 느껴지는 커피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들고 곁눈질로 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둡고 깊은 눈매와 가지런한 속눈썹, 높게 솟아올라 깊은 음영을 만든 눈썹 위와 그 사이로 곧고 높게 뻗은 콧날. 그 아래 굳게 다문 단정한 입술. 침묵을 좋아하며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술의 끝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단단하고 견고한 성채같이 과묵하게 잠겨있다.
라희의 눈길이 그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냉담하고 차가워 보이는 저 입술이 뜨겁게 열리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 그녀는 알고 있다.
그의 입술을 지켜보던 라희는 손안에 든 커피 잔의 가장자리에 입술 끝을 갖다 댔다. 진한 커피 향을 피워올리는 새하얀 도자기는 라희의 입술 위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의 입술은 이런 단단하고 미지근한 온기가 아닌, 더 따스하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우면서 촉촉한데..........
라희가 눈을 돌려 단정한 그의 입술을 다시 한 번 훔쳐보고 있을 때, 에스프레소 잔을 드느라 먼 하늘을 보다가 사이드 테이블로 고개를 돌린 고요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밤하늘을 닮기도 한 것 같고, 새카만 흑요석을 닮은 듯한 그의 눈이 라희의 눈동자 위에 머물렀다. 순간, 갑자기 얼굴에 열기가 화아하고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형용할 수 없이 깊은 흑암 색 눈동자가 라희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눈동자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내려간 그의 눈빛은 가운데가 살짝 벌려진 입술 안쪽을 억누르듯 지그시 깨물고 있는 분홍빛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저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라희는 순간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들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죄이는 느낌. 하지만 스카이 바에서 그와 최초로 눈길이 마주쳤을 때의 불안하고 무섭고 두려운 기분은 아니었다.
그의 뒤로 펼쳐진 검은 하늘을 닮아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심연 같은 어둠 속에서 감미롭게 피어올라 전신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달콤한 암흑의 비밀을 알아버린 몸이 은근한 온기로 들뜨기 시작했다. 아래가 뻐근한 느낌이 들면서 뜨겁게 젖어들고 브래지어 아래 눌린 유두 끝이 민감해져 단단하게 조여오고 찌르르한 느낌이 심장 쪽으로 아릿하게 퍼져나갔다.
거침없이 응시해 오는 눈빛은 라희의 술렁이는 속마음 밑바닥까지 투과할 것만 같았다.
그의 고요한 눈길은 입술 위에서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턱을 지나 목선을 타고 내려와 쇄골을 지나 원피스로 덮인 가슴 위에 머물렀다. 라희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라희쪽으로 손을 뻗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의 단정한 입매를 멍하니 바라보던 라희는 자기도 모르게 스륵 눈을 감았다.
은은한 체취가 커피 향과 섞여 피부 위로 스미듯 다가왔다. 입술 위의 피부가 예민하게 일어섰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목 위 살갗이 맥박으로 따끔거렸다.
피부 위를 스치는 서늘한 공기가 온기를 담아 느리게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체향이 섞인 온기는 잠시 멈췄다가 입술 위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 멀어졌다.
딸깍, 테이블 잔 받침 위에 에스프레소 잔이 맞물려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을 깨는 딱딱하고 이질적인 소리에 라희는 눈을 떴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풀 사이드의 경계에 서 있었다.
반짝이는 별이 박힌 밤의 장막아래 미풍이 불자 수면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맑은 수 면위 거울처럼 반사되던 조명들은 물결에 따라 모양이 이지러지면서 흐려졌다. 그는 가만히 서서 무심히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가 커피잔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손가락으로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렸다.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민망했다. 아직도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의 여운은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라희는 슬쩍 눈을 들어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뚝 서 있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이 보였다.
일순, 뭔지 모를 심통이 났다.
라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그의 뒤로 가까이 갔다. 라희의 은밀한 손길이 그의 등 뒤에 닿아 앞으로 밀어버리려 힘을 실으려는 찰나, 그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라희의 손을 붙잡았다.
한껏 밀려던 힘이 가장자리에 서 있던 그의 몸에 부딪치면서 어, 어 엇! 하는 순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라희는 그와 함께 잔잔한 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라희는 숨을 급히 몰아쉬며 눈을 꼭 감았다.
첨벙!
조명에 반사된 새하얀 물방울이 높이 튀어 올라 사방에 흩어졌다.
“어푸, 어푸..”
물에 빠진 라희는 균형을 잡으려 손을 뻗으며 몸을 허우적거렸다. 머리 위에서부터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온통 줄줄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시야가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물을 헤치는 라희의 손끝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러다 바닥에 발이 닿았다. 그가 손을 잡아주자 겨우 안정을 찾은 라희는 바닥에 발을 디뎌 몸을 일으켰다.
풀의 깊이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겨우 가슴 아래였다. 온몸을 흠뻑 적신 물은 계속해서 떨어져내렸다. 라희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을 재차 깜빡이니 역시 흠뻑 젖은 그가 라희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눈꺼풀 위로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눈을 재차 깜빡이며 묻는 라희의 질문에 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알 듯 모를 듯한 옅은 미소를 입가에 피워 올렸다.
“봐.”
그가 손으로 가리킨 출렁이다 잠잠해진 초록빛 수면 위는 투명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반사하고 있었다. 불이 환히 켜진 빌라 전경까지 모두다.
“아...”
라희는 순간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모습까지.
라희가 민망한 마음에 손을 들어 얼굴 위를 덮은 물기를 재차 닦아냈다. 그도 한 손으로 물에 흠뻑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턱 끝으로 물방울이 주루륵 흘러 떨어져 내렸다. 흠뻑 젖은 그를 보며 라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만?”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단정한 입매 사이에서 울려 나왔다. 깊은 눈매에서 곧고 어두운 시선이 라희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자, 장난쳐서.”
그의 미동 없는 시선은 라희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이라서 온도 조절을 한 모양인지 플런지풀 수온은 따스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그의 시선에 열기가 확 피어오른 볼 위는 무척 따갑게 느껴졌다. 라희는 왠지 모를 낯 뜨거운 느낌에 눈을 황급히 내렸다. 수면 아래 바닥에 깔린 푸른빛 모자이크 같은 작은 타일들이 눈에 보였다. 수면 아래 바닥에서 부터 쏘아진 조명은 물 안을 환히 비췄다. 노르스름한 조명에 색이 변해서 수색은 녹색이었다.
“괜찮아.”
그가 라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선 나직하게 말했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에 담긴 깊은 울림은 마치 중저음의 감미로운 악기 소리처럼 들렸다.
“어차피, 나갔다 왔으니 씻을 거였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머쓱해진 라희는 수면 아래에서 손을 조금 흔들어보았다. 잔잔한 수면이 물결쳐 흐려졌다. 고요하고 탁 트인 사막 가운데 투명한 청록빛 수색 위 반사된 조명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결치는 황금빛 조명은 찬란한 보석처럼 잘게 부서져 빛났고 남모를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조금 전까지 커피를 마셨음에도 신비롭고 따스한 물 안에 있으니 기분이 몽롱해지고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그럼...전 이만..."
어쩐지 이렇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라희가 눈을 들어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앞에 놓인 수면 아래 계단 쪽으로 걸어 나가려 하자, 뒤에서 그가 손을 뻗어 라희의 팔을 붙잡았다.
“.......그 전에,”
그는 라희를 자신의 품 안으로 단단히 끌어당겼다. 젖은 옷가지 너머로 그의 탄탄한 가슴이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라희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라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실제로 본 감상은 어떠한지 말이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어 검은 눈동자 안에 라희가 담겨있는 그의 깊은 눈매와 마주하자, 라희는 그가 무얼 묻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난번, P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했던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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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레스토랑 간 게 29편일거에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