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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트래킹은 한 시간 30분 코스다. 오후가 되자 버기를 타고 로비 건물의 뒤편에 위치한 리조트 메인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 앞에는 이미 낙타와 아랍 전통복장을 입은 아랍인 인솔자와 액티비티 담당자인 리조트 직원 그리고 낙타 트래킹에 참가할 사람들이 모여 대기 중이었다. 대부분 백인이었다.
실제로 본 낙타는 눈이 크고 속눈썹이 길었다. 낙타의 주둥이는 붉은 천으로 막혀있었기에 라희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더니 인솔자가 웃으며 뭐라고 말했다. 몇몇 단어들은 영어였지만, 억양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입을 막아 놓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풀을 뜯어 먹느라 움직이지 않는다는군.“
나직한 그의 말에 라희는 낙타를 살폈다. 생각해보니 낙타는 소와 마찬가지로 초식이었다. 음식이 앞에 있으면 먹느라 움직이질 않으니 입을 막아놓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액티비티 담당자의 짧은 설명이 시작되었다. 무엇을 할 건지, 얼마나 걸릴 건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다.
담당자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낙타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낙타는 한 마리당 두 명까지 탑승 가능했다. 인솔자의 도움을 받아 라희가 앞에 타고 그가 뒤에 탔다.
낙타는 뒤에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낙타가 일어설 때 허리를 뒤로 젖히지 않으면 앞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았다. 라희는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낙타가 일어섰다.
위는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라희가 손잡이를 다시 꽉 쥐며 긴장하자, 뒤에서 라희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흐였다.
낙타는 느리게 걸었다. 조금 적응되자 라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리조트 주변이라 그런지 모래만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아니었다. 성긴 흙과 자갈, 모래와 초록색 낮은 덤불이 보였다.
조금 더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하얀색의 뿔 달린 사슴 같은 것이 보였다. 빌라에서 테라스 너머를 내다 볼 때도 멀리서 보였던 동물이었다. 풀을 뜯고 있지만, 사막이니 사슴은 아닐 것 같아서 라희는 몇몇 동물을 생각해 보다가 뒤에 앉은 그에게 물었다.
"가젤인가요?"
어릴 때 보았던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와 하이에나의 먹이였던 가젤이 그나마 가장 비슷해 보였다. 모양도 비슷하고 뿔도 달려있으니까. 라희의 질문에 그가 뒤에서 대답했다.
"오릭스(oryx, 사막 영양)야. 가젤보다는 덩치가 큰 편이지.“
라희는 풀을 뜯고 있는 오릭스를 살펴보았다. 사막의 황톳빛 모래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오릭스는 머리 위 두 뿔이 위로 곧게 뻗어 하얀 털과 함께 이국적이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알 마하라는 말은 아랍어로 오릭스야. 갈색이 아닌, 하얀색의 오릭스는 아라비아 오릭스로, 무분별한 남획으로 멸종위기 종이라서 보호구역 내에서만 살고 있어."
그의 설명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런 하얀 색은 사막에서도 쉽게 눈에 뜨이고 색깔도 그만큼 드물기에, 사냥감이 되기 쉬울 것 같았다.
앞의 일행과 낙타는 줄을 지어 어디론가 계속 걸었다. 낙타 위에 앉아있는 라희의 몸을 살랑이는 뜨거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는 미세한 모래가 섞여 있었다. 다행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눈에 들어가지 않았다. 낙타의 속눈썹이 긴 이유가 모래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안장 앞의 손잡이를 꽉 쥐어 잡고 주변을 흥미롭게 살폈다. 사막은 모래만 있을 것 같았는데 제법 생태가 다양했다. 낮게 덤불같이 자란 식물들도 몇 종류는 되어 보였다. 크고 작은 가시 덤불과 줄기가 억센 잡초. 거칠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막은 드문드문 초록으로 살아있었다.
한낮의 기세와 위력이 꺾인 오후의 햇살은 머리 위에서 계속 내리쪼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선크림을 바르고 있었어도 얼굴 피부 위로 따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 끝없이 보이는 모래언덕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계속 가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일행은 꽤 오랜 시간을 낙타를 타고 앞으로 직진했다. 낙타 위는 걸을 때마다 진동이 있어서 균형을 잡으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가 뒤에 타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낙타 안장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라희가 허리에 힘주어 균형을 잡는 것에 조금 지쳐갈 무렵, 일행은 어딘가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는 하얀 천이 깔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황금색 기포가 솟아나는 샴페인잔과 초록색 과즙이 채워진 주스잔, 붉은 수박과 연두색 멜론, 노란색 파인애플이 큼지막하게 꽂혀있는 과일 스큐어(skewer 꼬치), 말린 대추, 사과, 살구, 그리고 아몬드와 각종 견과류가 놓여있었다. 리조트 직원이 샴페인과 주스를 들어 건넸다.
모두들 낙타 트래킹의 중간에 갖는 휴식시간을 반기며 음료를 하나씩 들고 건배를 시작으로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액티비티 담당자와 인솔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 나이 든 백인 할아버지가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기에 일행은 그 할아버지의 말에 호응하며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는 주된 내용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며 겪은 모험담 같았다. 호주 억양이 섞인 영어였고, 굉장히 빠른 말투였기에 라희가 모두 알아듣기는 무리였다. 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비우고 과일 주스를 들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라희는 갑자기 들려온 한국어에 고개를 돌렸다. 라희가 서 있는 뒤에서 늘씬한 미인이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 위로 올리며 밝게 웃었다. 여자가 말을 건넸다.
"한국인이시죠? 아까 식당에서 봤어요. 건너편 테이블 이었는데."
라희는 밝게 미소 짓는 젊은 여자를 보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까 바흐와 점심 먹으러 간 리조트 레스토랑은 만실이라던 리조트 매니저의 말대로, 제법 붐볐다. 아까 버틀러가 한 말을 언뜻 듣기로는 알 마하 (AL MaHa)는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로 객실요금 안에 리조트 룸 서비스, 객실 내 미니바, 리조트 안 모든 레스토랑 및 부대시설과 다양한 서비스가 무료였다. 식사는 룸서비스를 주문해 수영장 근처의 데크에서 식사를 하거나, 리조트내 하나 뿐인 레스토랑을 이용해야했는데 아무래도 한낮이다 보니 레스토랑을 선호하는 듯 했다.
라희가 앉은 테이블 주위도 손님들이 제법 있었는데 맞은편에 동양인 커플이 있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 보이는 커플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남자는 중년을 지나 머리카 희끗한 나이였지만, 여자는 라희 또래의 스무살 초반으로 보였었다. 그쪽에 앉아 있던 여자가 라희네 테이블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바흐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여자의 빤한 시선에 여자들이 당차기로 유명한 중국인인가? 혹은 한류 열풍으로 한국 남자에게 관심 많은 일본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었다. 바흐는 확실히 연예인이라 해도 무방한 외모니까. 그때 그 여자다.
“안녕하세요.”
라희도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상대는 선글라스를 벗었는데, 쓰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라희 역시 선글라스를 벗어 이마 위로 넘겼다.
"신혼여행 오셨어요?"
여자가 눈빛을 마주치며 친근하게 물었다. 라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여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역시."
"......네?"
라희의 물음에 여자는 저 앞에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는 바흐에 눈길을 주며 약간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분위기가 신혼여행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저 분위기 파악 하나는 굉장히 잘하거든요.“
여자의 말에 라희는 그녀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여자 쪽도 나이 차 많이 나는 커플로, 신혼여행은 아닌 듯 보였다. 신혼 특유의 알콩달콩 간지럽고 설레는 분위기가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오셨어요?"
조심스러운 라희의 말투에 여자는 픽 웃었다.
"그래 보여요?"
전혀. 대답하기 조심스러워 입을 닫고 있자, 여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여행 온 거에요. 남자친구랑."
라희는 여자의 뒤에 액티비티 담당자과 대화 중인 중년의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사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남의 인생이니 관심도 없고 상관할 바도 아니었지만, 여자의 캐묻는 듯한 말투와 시선이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목이 탔다. 라희는 주스잔을 기울여 안을 비워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여자의 시선은 은근히 바흐를 향했다.
“어떻게 만났어요?”
라희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 듯한 시선과 함께 던져진 여자의 물음에 라희는 머뭇거렸다. 저런 남자를 어떻게 만났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여자의 자신만만하게 쏘아보는 눈빛에 담긴 메시지는 노골적이었다.
‘내가 너보다 훨 나은데...?’
라희는 손에 들린 빈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라희가 바흐를 처음 만난 스카이 바에서 그는 이런 눈빛을 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늘씬한 몸매를 은밀히 유혹하듯 드러내 놓고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던지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지금 라희 앞에 서 있는 여자와 같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가장 아름답고 예뻐. 그러니 날 가져, 라는.
라희가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여자의 시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자.”
그는 라희의 빈 주스잔 앞에 가득 찬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라희는 샴페인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고 청량한 맛에 속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서 한국인 만나니까 정말 신기하고 반갑네요.”
라희 앞에 서 있던 여자는 반가워하며 높은 소프라노 톤으로 인사를 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약간 까닥여 답했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에 여쟈의 표정은 의외라는 듯 조금 굳었지만, 이내 밝은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고 했을 때, 바흐는 라희의 허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지.”
라희는 그의 손길에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따가운 시선이 뒤에서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갔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라희도 그가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붉은 노을빛 석양이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앞에 펼쳐진 모래와 황무지가 모두 주홍빛으로 물들었고 멀리 보이는 높은 모래언덕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끝없이 이어진 모래 언덕들 너머의 윤곽이 흐린 지평선 위로는 라희가 본 어떤 태양보다 큰 해가 진한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라희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One day,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갑자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희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저 멀리 석양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방금 그가 뭐라고 말했지? 44번? sunset이면 지금처럼 일몰인데.. 마흔 네번을 봤다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가 혹여 다시 말을 할까 싶어 잠자코 귀 기울이며 기다렸으나 그는 그 뒤로 해가 지는 붉은 광경을 보고 있는 채로 침묵을 지켰다. 라희도 그의 옆에서 말없이 저 멀리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막 위에서의 하루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자 문학적 소양(?)있는 분들은 바흐가 한 말이 뭔지 아실듯.. ㅋㅋㅋ힌트는 프랑스 소설(?)혹은 동화책에 나오는 말이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