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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의 주메이라 리조트안에 버즈 알 아랍을 주변으로 고급 호텔가와 관광지가 구성되어있다. 특히 수크 마디나 주메이라(Souk Madinat Jumeirah)는 아랍 전통시장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쇼핑몰처럼 재현해 놓은 곳이었는데, 그 앞에 흐르는 3.7Km에 이르는 인공 수로가 각 유명 호텔과 수변 레스토랑을 끼고 있다. 주메이라 그룹 호텔 숙박객들에게는 수로 위의 곤돌라 투어가 무료로 제공된다. 특히 밤에 수로 주변을 보는 야경과 두바이몰 분수 쇼는 보는 것을 추천한다. 두바이는....」
라희는 보고 있던 휴대전화 액정 화면을 껐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이국적이고 중동의 보석이라 불리는 두바이에서 고작 머물었던 곳은 호텔 안뿐이었다. 평생에 다시 한 번 이곳에 올 기회가 있을까?
라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바이의 한낮은 걸어 다니는 사람 없이 한적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낮에는 견디기 힘든 강렬한 태양 빛이 내리쬔다. 두바이에 있는 동안 에어컨이 항시 가동되는 상황에 있었기에, 바깥 기온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라희는 더워 보이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희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달리는 차 안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는 여전히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라희가 타고 있는 자동차는 롤스로이스로 버즈 알 아랍 투숙객들에게 공항 트랜스퍼용으로 제공된다고 하니 아마도 공항으로 가나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두바이 공항까지 거리는 인터넷으로 찾아본 결과 차로 약 40분, 차는 버즈 알 아랍이 보이는 위치에서 한참 벗어나 넓게 뚫린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움직이는 차의 진동이 미약하게 느껴지면서, 배가 부르니 몸이 나른했다. 오늘은 아침 부터 정신이 없었다. 라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그렇게 잠이 든 후 따스한 손길에 뒤척이며 일어나서 새벽 무렵 다시 그와 몸을 섞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눈을 뜨니 환한 아침이었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보니 빈자리. 역시 그는 없었다.
라희가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침대 바로 앞에 펼쳐진 청록빛 바다를 마냥 바라보고 있을 때,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바흐가 들어왔다. 막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에 타월을 대충 얹은 그는 얇은 가운 차림이었다. 그가 방에 들어옴과 동시에 은은하고 청량한 향기가 났다.
라희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돌려 라희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 위로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슬쩍 흘러내렸다.
“깼어? 씻지.”
그의 검은 눈과 마주치자 라희는 부끄러워 푹신하고 빳빳한 침구를 움켜쥐었다. 깨끗이 씻어 향기까지 나는 그와 달리 라희의 몸은 어젯밤 상태 그대로였다. 누워있는 새하얀 시트는 얼룩져 있었고 배 아래 허벅지 안쪽과 음모는 정사의 흔적으로 말라붙은 뭔가 때문에 버석거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고요한 시선 속에서 라희는 망설이다 재빨리 일어나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새하얀 거품으로 샤워를 마치고 젖은 몸을 닦은 후 커다란 바디 타월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침실 문을 여니 다행히도 그가 없었다.
라희는 여행 가방을 뒤적여 옷가지를 꺼내 걸쳐 입이었다. 거울에 비친 옷차림을 점검하던 중에 침대근처 바닥에 널브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몸을 돌려 침대 근처 바닥에 널려있던 야릇한 흔적이 남은 속옷들을 비닐에 담아 여행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나서야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깔끔한 외양으로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쓰고 있었다. 라희의 계단 내려오는 발소리를 듣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일단 아침 먹어야 하니, 조식당으로 갈까.”
“...네.”
그의 제안은 반가웠다. 라희는 샤워를 하고 있을 때부터 배가 고팠다. 하지만 좀 늦지 않았을까?
라희는 핸드폰 화면 안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조식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전에 그와 호텔에 머물 때는 아침에 식당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룸서비스를 시켰는데, 해외라 다른 건가.
라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하얀 중동식 옷차림을 보니 새삼 여기가 외국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직원이 잡아줘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라운드 플로어로가서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 있는 모든 시설들이 그렇듯, 번쩍번쩍 화려한 입구에는 JUNSUI라고 쓰여있었다. 다만 다른 곳은 금칠 위주였다면, 이 식당은 블랙 앤 실버를 테마로 잡은듯했다. 온통 은빛과 검은색의 현란한 배치가 눈을 어지럽혔다. 환히 밝힌 조명 속 유리문을 통과한 식당 안은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손님들이 보였다. 이 뷔페식 조식당의 운영시간은 아침 10시 30분까지. 늦잠 잔 투숙객들을 위한 것이리라.
바다와 해안이 탁 트이게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나자 버터와 토스트같이 생긴 바삭한 식전빵 바구니가 놓였다. 그는 빵을 힐끔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희는 푸드 코너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빵 바구니에서 토스트 한 조각을 들어 먹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토스트의 겉은 바삭했고 속은 촉촉하니 맛있었다.
빵을 먹고 나자 목이 살짝 메었는데 테이블 위에 물이 없었다.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 코너로 가서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자 갈증이 가셨다. 컵을 들어 그의 것을 한 잔을 더 따라 테이블 위에 같이 가져다 놓았다.
라희는 푸드 코너를 둘러보았다. 아시안 뷔페식 식당 답게 12개의 스테이션마다 각종 음식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으나, 순수를 뜻하는 일본어인 JUNSUI가 식당 이름인 만큼 전체적으로 왜색이 풍겼다. 각 음식 코너에는 출신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 한국, 일본, 중국, 태국 국기가 음식 이름과 함께 프린트 되어 있었다. 쭈욱 둘러보니 중국 음식이 가장 많아 보였다. 라희가 구이와 튀김 코너에 다가가자 일하던 직원이 상냥한 웃음을 띄웠다. 아시안 레스토랑인 이곳에서 다른 쉐프들과 마찬가지로 흔한 동양인이었다. 친절한 웃음을 띤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였다. 중국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을 보아 아마도 여자도 중국계열일 거라 생각하며 다가갔다.
“한국 분이시죠?”
중국어나 영어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들려온 말은 한국말이었다. 라희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무살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라희의 동그란 눈동자를 향해 직원은 환히 웃었다.
“데스크에서 알려주더라고요. 여기 점심시간이면 한국 분들이 식사하러 종종 오시거든요. 조식은 좀 드물지만요. 아침엔 보통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많아요. 아 참, 저 말고 준수이에는 일하고 있는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어요.”
여자가 가리키는 곳에 눈길을 돌리니 비슷한 연령의 안경 쓴 한국 여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라희는 저쪽의 여자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저기 저 키 큰 남자분이랑 같이 오셨죠? 미남이시던데요.”
직원이 가리킨 쪽을 보니 바흐가 누들 스테이션에 서 있었다. 라희는 긍정의 표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되게 과묵하시더라구요. 인사를 건넸더니 그래요,라고 말씀하시길래 더 이상 말을 건네기가 어색했어요.”
그 대답 역시 바흐다웠다. 라희가 말없이 옅은 미소를 띠자 여자는 상냥하게 웃으며 구이 코너에서 이것저것을 권했다. 라희는 그녀가 추천해 주는 음식들 위주로 접시에 담았다. 낯선 이국땅에서 한국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니 신기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직원은 여기서 한국 음식은 김치찌개와, 비빔밥이 준비되어 있는데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으면 특별히 한국 분이니 신경써 드리겠다며 넉살 좋게 말했다. 라희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테이블 맞은 편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음식은 마음에 들어?”
그가 말을 건네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시는 분들 중에 한국 분도 계시던데요.”
“음. 아무래도 아시안 레스토랑이니까. 조식당이 두 군데 있는데 다른 곳은 아랍풍이야.”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는 젓가락을 들어 쌀국수를 먹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의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있으면 어쩐지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라희는 포크를 들어 접시 위의 와규 스테이크와 새우구이를 맛보았다. 철판 위에서 구워져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두툼한 새우살은 촉촉하고 탱글탱글했다. 꼭 시장이 반찬이 아니더라도 음식은 훌륭했다.
잠시 후, 남자 직원이 다가와 오믈렛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른 호텔 식당 처럼 둥글게 모양 잡힌 오믈렛 모양이 아니라 조금 거칠고 투박한 모양새였다. 라희가 눈 앞에 놓인 노란 부침개 같은 덩어리를 가만 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오믈렛 시키면서 네 것도 같이 주문했어. 플레인을 시키려다 치즈를 추가했지.”
라희는 그의 말에 포크를 들어 두툼한 빈대떡같이 생긴 오믈렛을 나이프로 갈랐다. 샛노란 부들부들한 오믈렛 안에는 하얀 치즈가 찐득하게 녹아 나이프로 가르자 접시 위로 주르륵 흘렀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진한 치즈향이 입안에 느껴지면서 부드럽게 넘어갔다.
“What would you like a drink, Sir, coffee or tea?”
그때 은색 커피 주전자를 들고온 직원이 커피인지 티(tea)인지를 물었다.
“Espresso Double. please. and...?”
그는 에스프레소를 더블을 주문했다. 그의 눈길을 받은 라희는 티라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곧 후회했다. 남자 직원은 라희를 보며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What Kind of Tea would you like? We have Earl Grey, Green Tea, Simple Black Tea, English Breakfast, or Jasmine, Chamomile, Orange pekoe, Mint, Herbal and Furit."
순식간에 많은 단어들이 쏟아지자 라희는 혼란스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No. Just Coffee. please.”
직원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즉시 들고 있던 주전자를 기울여 라희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연한 갈색의 커피가 담긴 하얀 커피 잔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치즈가 잔뜩 들어간 오믈렛을 한 입 먹고 나서 뜨거운 커피로 목을 축이니 기름진 속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자, 한국인 직원이 특별 음식이라며 김치와 백김치 같은 피클과 함께 먹음직스러운 떡갈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테이블 위에 가져다주었다. 라희는 직원에게 고맙다 인사했고,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에스프레소 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바흐를 슬쩍 보더니 좋은 시간 되시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라희가 특별식인 떡갈비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그는 식사를 마쳤는지 창밖을 보며 천천히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였다.
도저히 배가 불러 더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러서야, 라희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그런 라희를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지.”
라희는 그렇게 뒤따라 올라온 호텔 방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창밖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며 쉬고 있으려니, 그가 인터폰으로 버틀러를 호출하며 말했다.
“이제 여길 떠날 거야. 짐.”
불쑥 라희를 향해 던진 말에 라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그는 계단 위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네.”
짐을 챙기라는 말이었다. 라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침실에는 여행 가방만 덩그러니 있었고 딱히 방에서 생활하거나 활동한 것이 아니었기에 챙길 짐이 없었다.
라희는 침실을 나와 2층의 욕실에서 에르메스 제품을 챙겼다. 호텔 어메니티로 제공되는 것이니 가져가도 될 것 같아서, 안에 있는 모두를 비닐백에 쓸어담았다. 그가 쓰다 남은 남성용 에르메스 제품도 같이 담았다. 아침에 맡았던 샤워를 마친 그의 향이 근사했기에 꼭 가져가고 싶었다.
그렇게 모두 다 담은 여행 가방의 지퍼를 꼭꼭 닫고, 이걸 들고 내려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처음 들어왔을 때 직원들이 운반해 준 것이 생각나 그냥 두고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방에는 버틀러와 직원들이 와있었다. 체크아웃 중인 듯 버틀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빌을 내밀었고, 그는 아래에 사인을 한 후 카드를 건넸다. 뒤에 서 있던 직원이 그의 카드를 들고 계산을 하러 방을 나갔고, 버틀러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라희에게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Did you enjoy your stay with us?”
평소 토익 시험을 위해 듣던 것과는 달리 이국적인 억양이 섞인 영어다. 잘 지냈느냐는 말에, 라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yes라고 대답했다.
“I am very happy to hear that you enjoyed your stay at Burj Al Arab and I hope to have you stay with us again.”
버틀러의 말에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나중에 또 봤으면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버틀러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하고는 뒤에 있는 직원들을 시켜 짐을 가져오게 했다.
버틀러의 안내에 따라 호텔 현관으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던 커다란 흰색 차의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버틀러와 직원들의 배웅 속에서 차는 스르륵 움직여 버즈 알 아랍을 떠났다.
창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라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마트 폰을 쓰고 있었다. 액정 화면에는 온통 빽빽한 영어뿐이라, 무얼 보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공항으로 가나요?”
라희가 묻자 그는 고개를 들어 라희를 응시했다. 어두운 새카만 눈동자 끝이 살짝 가늘어졌다. 라희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고 있자, 그는 다시 스마트 폰에 눈길을 던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입을 다문 그를 보며 라희는 답답함에 입술을 안쪽을 깨물었다. 자동차 창밖은 도시 안의 고속도로를 지나 외곽으로 진입한 듯 황량했다. 적어도 목적지가 공항은 아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스쳐 지나가는 황무지를 바라보며 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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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