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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와 그와 나-39화 (3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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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쯤 지났을까. 라희는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침구 재질의 감촉을 느끼며 뒤척였다. 손끝과 피부에 닿는 이불의 감촉에 몸이 포옥 파묻혀있다. 라희는 보들보들한 감촉에 감탄하며 몇 번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응당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눈을 떴을 때 보여야 할 것은 천장이었지만, 라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흰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도 또렷하게. 화들짝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이 이국적인 호텔 방의 침대 바로 위는 커다란 거울이었다.금칠을 좋아하는지 방안의 텔레비전 처럼 황금색 두꺼운 테두리를 두른 거울이 떡하니 설치되어 침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라고 생각하던 라희의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특별한 날 묵는 침실의 천장이 거울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새빨개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난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주위에 그는 없다. 라희가 잠이 많은 것인지 그가 잠이 없는 편인지 눈을 떴을 때 그가 옆에서 자는 모습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이자 허벅지 안쪽과 발의 근육들이 땅겨왔다. 아래에 묵직한 통증도 느껴졌다. 우릿한 통증을 억누르느라 짧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라희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은 호텔의 내부만큼이나 호화스러운 욕실이었다. 황금빛을 바탕색으로 선명한 페르시안 블루와 크림슨 레드가 강한 대비를 이룬 욕실은 번쩍이며 빛나 보였다. 넓은 세면대 위에는 둥근 두 개의 세면대가 있었고 그 주위로 커다랗고 둥근 욕조가, 그 옆은 커다랗고 투명한 반원형의 샤워부스였다.

라희는 세면대로 다가가 몸을 살폈다. 그간 그가 몸에 남긴 흔적들은 옅은 멍으로 변해있었다. 푹 자고 나서인지 나른한 잠기운과 근육통을 빼면 몸 상태는 평소와 같았다. 눈을 내려 아래를 보니 세면대 위에는 낯선 오렌지색 박스가 놓여있었다.

라희는 비닐로 포장되어 새것 같은 화장품 박스를 손에 들고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에르메스였다. 에르메스라는 브랜드는 옷과 가방 같은 제품만 만드는 줄 알았기에, 이렇게 바스와 바디 용품을 보니 신기했다. 100ml 대용량 향수도 있었고, 샤워젤, 샴푸도 있었다. 주위에 놓인 제품들도 전부 에르메스였다. 종류는 두 가지였다. 켈리 깔레쉬와 떼르 데르메스. 켈리라고 쓰인 것을 보고 언뜻 생각이 들기에는 에르메스 켈리 가방의 그 켈리인가 싶었다.

여러개 놓인 떼르 데르메스의 갈색 박스 중 샤워젤 포장은 뜯겨 있었다. 집어 들어 안을 보니 텅 비어있었다. 그가 쓴 모양이어서, 라희도 켈리 제품 한 개를 집어 들어 포장을 풀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샤워 볼로 거품을 내니 풍성하고 하얀 거품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미모사의 순수한 향과 미세하게 풍기는 아이리스 향기, 그리고 피부위를 부드럽게 감싸는 장미의 신선한 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근사한 향으로 샤워하니 덩달아 기분까지 좋아졌다.

라희는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여행 가방을 풀었다. 안에서 속옷을 꺼내 먼저 걸치고, 무슨 옷을 입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푹신한 카펫을 밟은 발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당연하게도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방안으로 들어와 라희 바로 앞에 섰다.

“씻었나 보군.”

라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던 그가 시선을 돌려 바닥에 놓인 반쯤 열린 여행 가방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원피스를 입는 것이 좋을 거야. 신발은 구두를 신고.”

“......네?”

이젠 입을 옷까지 지정해주나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손으로 자신이 입고 있는 재킷을 가리켰다. 평소 입고 다니던 가벼운 셔츠 위에 깔끔한 세미 정장 스타일의 연회색 얇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일어났으니 밥 먹으러 가야지.”

그는 허리를 수그려 라희의 옷 가방 안에서 크림색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 구석에 비닐에 싸여 둘둘 말려 있던 베이지색 미들 힐을 건네주었다.

“지하 레스토랑을 예약했는데. 복장 규정이 있더군. 이렇게 입어.”

그는 옷을 갈아입는 모습까지 지켜보려는 듯 가만 서 있었다. 라희는 그가 건네준 옷과 구두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망설였다. 정말 이대로 그 앞에서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옷을 벗기도 했고 숱하게 알몸을 보인 사이라지만, 이상하게도 옷을 갈아 입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런 라희의 멋쩍어하는 모습을 지켜 보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침대 앞 넓게 펼쳐진 파노라마 윈도우 너머 잔잔한 에메랄드빛 바다를 응시했다.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와.”

그는 그대로 방을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라희는 쭈뼛쭈뼛 크림색 원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정해준 원피스를 입고 구두까지 신고 1층으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그의 팔에 이끌려 그대로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 앞으로 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흰색 파도 모양으로 둥글게 물결치는 넘실거리는 바다 풍광 같은 조형물 형상의 난간들이 쭈욱 늘어서 있고 그 앞은 텅 비어있었는데, 빈 공간은 저 높은 위층에서 부터 아래 1층까지 뻥 뚫려있었다.

복도를 지나며 난간 아래에 눈길을 주니 저 아래 1층의 로비의 장식 분수도 내려다보였다. 아찔한 높이였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맞은편 버틀러가 데스크에 앉아있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가 잡아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도착했다.

2층은 식당과 부티끄샵이 있었다. 지하라더니? 라희의 궁금증도 잠시, 그는 커다랗고 광활한 황금빛 기둥 앞에 섰다. 기둥의 가운데는 역시 금칠해서 번쩍이는 엘리베이터 문이 있었다. 기둥과 이어진 옆으로는 대기실인듯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나 바에서 볼 수 있는 푹신하고 긴 소파가 반원형으로 두 칸에 걸쳐 있었다. 황금색 휘황찬란한 기둥 맞은편 있던 데스크에서 직원이 걸어 나와 정중히 물었다.

“Excuse me, sir. This elevator is only for the guest of Al Mahara. Could I have your name, please?”

(실례합니다. 이 엘리베이터는 알 마하라 레스토랑 전용입니다. 이름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진욱 한.”

그가 짧게 대답하자 직원은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밝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니 직원이 무전기로 뭔가를 지시했다. 잠시 후 직원의 안내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은 특이했다. 10개 정도의 좌석이 있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직원들이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어보니 이 전용 엘리베이터를 Submarine(잠수함)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안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가 있었다. 계기판 같은 것이 떠 있는 중앙 모니터와 그저 붉은색 화면이 걸려있는 모니터들이 엘리베이터 내부에 빙 둘러 설치되어 어두운 조명 가운데 반짝였다.

라희가 주위를 흥미롭게 둘러보고 있는데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의 붉은색 불빛이 요란하게 반짝였다. 직원의 안내멘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는 잠시 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었다. 마치 열대 바닷속을 여행하는 것처럼 생생한 광경이 펼쳐지더니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헤엄쳐서 모니터 옆을 지나갔다. 놀이동산에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에 라희는 옆에 앉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붉은 조명이 반짝이고 직원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라희는 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어두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바로 펼쳐진 곳은 거대하고 둥근 아치 모양의 통로였다. 온통 황금빛으로 치장된 터널 같은 공간 너머에는 엘리베이터의 모니터에서 보았던 가짜 이미지가 아닌 실제의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엄청난 수족관이 보였다. 레스토랑 한 벽을 다 채울 정도로 거대해서 수족관인지, 아니면 바닷속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Good afternoon Mr, Han. welcome to Al Mahara.“

(알 마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스터 한.)직원은 밝게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라희가 착석한 곳은 수족관 바로 옆의 테이블로 색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쳐 지나다니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라희가 넋을 놓고 수족관의 물고기들을 감탄하며 보고 있는 동안 바흐는 커다랗고 두꺼운 푸른색 메뉴판을 들고 보고 있었다. 마치 앨범같아 보이는 두툼한 메뉴판 표지의 한 쪽에는 커다란 굴껍데기 같은 것이 박혀있었다.

“해물로, 아니면 스테이크?”

그가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물었다. 라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호텔 방에서 나올 때부터 배는 몹시 고팠지만, 막상 그가 선택지를 주니 뭘 먹어야 하나 망설여졌다. 그녀가 말이 없자 그는 눈을 들어 그런 라희를 가만 응시했다. 해물? 바닷속 같은 분위기니까, 그렇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스테이크로 해. 해물 요리를 시켰는데 가니쉬에 소라가 섞여 있으면 안 되니까.”

그의 말에 라희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라희는 소라 알러지가 있었다. 간혹 소라를 먹으면 온몸이 가렵고 두드러기가 났다. 그리고 쉴새 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심해지면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릴 땐 없었는데 사춘기가 지나고 생긴 알러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심각하게 몇 번 데이고 난 후, 해물을 먹을 때는 극도로 조심했다. 해물탕, 해물찜 등 여러 가지 해물이 섞여 들어간 음식에 혹시라도 소라가 들어있을까 봐 손도 못 대게 되었다. 그러니 정체모를 해물 보다는 스테이크가 현명한 선택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희는 표정은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어떻게 소라 알러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거지? 그와는 이제껏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나눌 기회도 없었다.

라희는 의아한 얼굴로 맞은 편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웨이터에게 주문을 마치고 나서, 라희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굽기는 미디움 웰던으로 시켰어.”

라희는 망설였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의 눈빛은 묻지 말라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난 의구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제가 알러지가 있다는 것을....”

라희가 어렵게 꺼낸 말을 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라희는 의혹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멈추고 라희를 바라보는 그의 새카만 눈매가 깊어졌다. 그가 밤보다 어두운 칠흑빛 눈동자로 라희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가 짙은 눈빛으로 라희를 가만 보고 있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아서 라희는 먼저 시선을 낮춰 피할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회피하며 고개 돌린 시야에는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보였다. 열대어들은 느릿하게 헤엄쳐 돌아다녔다.

“글쎄.”

그는 짧게 말했다. 더는 묻지 말라는 듯이.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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