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데스크에서 직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붉은 모자의 끝에 흰 스커트를 늘어뜨리고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티켓팅을 하는 카운터로 안내했다. H35와 H36은 퍼스트 클래스라고 주홍빛 액정화면 가득 써있었다. 티켓팅을 하는 동안 라희는 쇼핑백의 짐을 여행 가방에 옮겨 담았다.
“총 14개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창 측에 1열 내측에 2열로 되어있습니다. 현재 12석 비어있습니다. 창가 측 좌석은 1인용입니다. 창 측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측 동반석으로 하시겠습니까?”
“내측으로 주십시오.”
바흐가 말하자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아래의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조작을 했다. 수화물로 짐을 넘기는 후,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티켓을 받아들고 나니 에미레이트 항공사 직원이 안내를 시작했다.
“퍼스트 클래스 손님께는 에스코트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항공기 탑승 시까지 안전하고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로 바흐와 라희는 환전과 로밍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안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출국 심사를 받고 있었다. 직원은 전용출국심사대(designated Entrance)로 안내했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출국 수속을 마쳤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목적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 셔틀 트레인을 타고 탑승동으로 이동하고 나면 여객터미널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점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상냥하게 말했다. 바흐는 라희에게 의견을 묻는 듯 바라보았다. 라희는 좌우 펼쳐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객터미널에는 환히 불을 밝힌 공항 면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쇼핑할 거 있어?”
“아니요.”
그의 물음에 라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글라스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항공사 직원을 따라 선글라스가 진열된 코너에 이르렀다. 그는 라희에게 써보라는 듯 눈짓했고 라희는 손을 뻗어 선글라스를 몇 개 들어 걸쳐보았다. 그도 이것저것 써보면서 선글라스를 고르고 있었다. 라희가 사각 테 보다는 둥글고 여성스러운 오버사이즈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셀린느 제품을 하나 손에 들고 있으니 먼저 물건을 고른 그가 같이 계산했다. 선글라스를 사고 나자 그는 항공사 직원에게 말했다.
“탑승 전까지 쉬고 싶군요.”
“저희 에미레이트 항공은 두바이에는 전용 라운지가 있지만, 인천에서는 아시아나 항공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면세점 사이의 통로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이동했다. 조금 걸어가자 기둥 위에 Asiana Lounge first class 라고 쓰여 있는 하얀 간판이 보였다. 기둥 뒤쪽으로는 구름다리가 있었는데 아까 지나친 면세점을 가로지르는 모양이었다. 구름다리를 건너자 유리문 너머 라운지의 데스크가 보였다. 데스크에서 여권과 보딩패스를 보여 이용 수속을 마쳤다.
“편히 쉬십시오. 탑승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항공사 직원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라희와 바흐가 라운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 데스크 앞에서 지켜보았다.
처음 와본 공항 라운지는, 넓고 사람도 없어서 썰렁했다. 전면에 있는 유리 벽 너머로는 바깥 공항의 전경이 들어왔다. 어스름한 조명 속에 비행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바흐는 곧장 창가 쪽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라희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넓게 펼쳐진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 남자로 비즈니스 수트를 입고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라희는 고개를 들어 라운지 안을 살폈다. 고급스러운 서재 같은 분위기의 은은한 조명의 라운지의 한가운데는 검은색 광택이 흐르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그랜드 피아노를 보고 있자, 그의 집에 있는 하프시코드가 생각났다.
확실히, 그랜드 피아노와 비교해 보면 하프시코드는 폭이 좁고 길었다. 지난 아침 그가 연주했던 곡은 무엇이었을까. 귀에 익숙한 곡이었는데...
잠시 그랜드 피아노에 머물렀던 라희의 시선은 이내 라운지의 코너 끝으로 향했다. 일반 뷔페 식당처럼 벽 전체가 길게 뻗어서 펼쳐져 있는 푸드 섹션이 있었다.
"배고파?"
그의 말에 라희는 고개를 돌렸다. 바흐는 저 구석에 있는 푸드 섹션을 가리키며 말했다.
"뷔페야. 가서 골라 먹어. 비행기 타자마자 기내식이 바로 나오니까 너무 배부르게 먹지는 말고.“
그는 먹을 생각이 없는 듯, 라운지에 들어올 때 집어 들었던 잡지 선반에 비치되어있던 영문 주간지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깊숙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마치, 차에서처럼 집중해서 주간지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라희는 몸을 일으켰다.
처음 와보는 곳이니만큼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다시는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를 이용할 일이 없어 보였다.
푸드 섹션쪽으로 다가가자, 콜드 푸드와 웜 푸드로 나뉘어 있었다. 작은 호텔 뷔페와 똑같은 모양새였다. 콜드 푸드는 투명한 케이스 안에 들어있었는데 치즈와 빵, 초밥 연어와 샐러드가 있었다. 웜 푸드는 굴튀김, 딤섬 모둠, 훈제오리 등의 음식으로 간단한 식사나 스낵종류 였다. 한쪽에서는 직원이 라면, 우동, 국수를 요리해서 준비해 주는 면 코너가 보였다. 마실 것으로는 다양한 술, 음료 차가 준비되어있었다. 술은 양주와 맥주, 바카디, 위스키, 진, 보드카등 모든 주류가 종류별로 놓여 있었기에 다소 신기했다.
천천히 둘러보던 라희는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고에는 하겐다즈 샌드위치 아이스크림과 컵 아이스크림이 놓여있었다. 어차피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이 나온다고 했으니 간단히 먹기에는 아이스크림이 적당해 보였다. 딸기, 바닐라, 녹차, 커피 등 종류별로 놓여있는 아이스크림 중 녹차를 하나 꺼냈다.
자리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쪽 벽에 마사지 체어와 샤워룸 표시가 눈에 보였다. 문득 호기심을 느낀 라희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두 대의 커다란 마사지 체어가 놓여있었고, 샤워룸은 록시땅 제품과 타월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투명한 유리부스와 깔끔한 시설이 마치 호텔의 객실 같은 상태로 준비되어있었다. 드문드문 앉아서 비즈니스 수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라운지 손님들을 생각해 볼 때 직장에서 일하다가 바로 공항으로 와 샤워를 하는 용도겠구나 생각되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나서, 라희는 자리로 돌아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계속 잡지를 읽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잡지를 테이블 위에 둔 채로 스마트 폰을 쓰고 있었다.
그의 눈빛 아래 액정화면 가득 적혀있는 영어와 달러표시가 눈에 보였다. 라희가 가만 보고 있자 그는 OK라고 쓰여있는 결제 버튼을 손끝으로 누르고 나서 눈을 들어 라희를 응시했다. 무슨 이유로 보고 있느냐고 묻는 눈빛에 라희가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먹으려고 아이스크림 가져왔는데. 하나 갖다 드릴까요?”
라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는 짧게 말한 뒤 다시 잡지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라희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아이스크림의 붉은색 뚜껑을 열었다. 들고 돌아다녀서인지 겉이 말랑하게 녹은 녹색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운 가장 자리 부분을 한 스푼 가득 떠서 입에 넣자, 진한 녹차의 쌉싸름한 맛과 함께 은은한 단맛이 혀끝에 감돌면서 사르르 녹았다.
라희는 다시 한 스푼 떠서 먹었다. 절반 정도 먹고 나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왕 라운지에 온 거, 냉장고에 있는 모든 맛을 먹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열렬한 동의를 표했다. 다 먹어 봐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편의점에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의 비싼 가격을 보며 뭘 먹을까 망설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조용한 도서관 같은 분위기에서 맞은편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라희가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일어서서 냉장고에 가서 각기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 3개를 집어 와서 하나씩 뚜껑을 따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말없이 잡지를 읽어 나갔다.
“커피 마실래?”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불쑥 말을 건네자, 라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스푼을 든 채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리카노?”
“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잠시 후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라희가 말하자, 그가 커피를 들어마셨다. 희고 작은 잔의 모양으로 보아 에스프레소인 듯 했다. 라희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다 뜨거운 커피가 입에 들어가니, 속이 따뜻해지면서 혀끝을 질척하게 감아오던 단맛이 씻겨나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라희는 맞은편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유리 벽 너머 어두운 활주로를 보고 있었다.
“.......두바이로 가는 거죠?”
라희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차분한 검은 눈동자로 라희를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말했다.
“일단. 봐서.”
더이상 말 걸지 말라는 듯, 고집스럽게 입매를 다문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라희는 조용히 남아있던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비행기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을 보내려면 아무래도 이걸 다 먹고 나서는 저쪽에 있는 잡지 중 읽을 만한 것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마지막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빈 통을 옆으로 치우고서,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셨다. 중간에 새 커피를 가져온 그도 창밖에 시선을 던지며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잔을 기울이고 조용한 침묵 속에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탑승시간이 다 되어가자, 그들이 앉아있던 라운지의 자리로 승무원이 다가왔다.
“탑승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냥한 미소를 띤 직원을 따라 라운지를 나왔다. 늦은 시각인지 여객터미널 대부분의 면세점은 문을 닫고 있었다. 직원을 따라 루이비통 매장이 환히 불을 밝힌 앞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서 셔틀트레인을 타고 탑승동으로 이동했다. 탑승동으로 올라가자, 여객터미널과는 다르게 불을 밝히고 영업하고 있는 면세점과 매장들이 보였다. 다양한 면세점이 있던 여객터미널과는 달리, 탑승동에는 S면세점만 있었다.
그곳을 지나쳐 게이트에 다다르자, 직원은 2층으로 안내했다. 두바이까지 운행하는 에어버스 A380은 복층 구조로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탑승이 2층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위로 올라 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라희가 유리창 너머의 비행기를 보고 있자 직원은 에어버스에서는 총 3개의 브릿지가 연결되는데 1층은 이코노미 전용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퍼스트 클래스 전용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 표를 보여주고 브릿지를 걸어 바로 탑승했다. 활짝 열린 비행기 문 앞에서 승무원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며 맞았다.
처음 타보는 퍼스트 클래스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널찍한 공간에 캡슐같이 독립된 좌석이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창가 쪽은 고속버스 우등 자석처럼 홀로 떨어진 외석이었고, 가운데 좌석은 2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승무원은 그녀를 바흐와 나란히 놓인 가운데 좌석으로 안내했다.
좌석마다 문이 달려 있었는데 문 옆에는 작은 옷장이 있었다. 목욕탕 옷장보다 폭이 좁은 옷장은, 두툼한 겉옷 한 벌이나 두벌 정도 걸어놓을 용도로 보였다. 라희는 좌석의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마치 좁은 방에 있는듯한 아늑한 공간은, 커다란 액정 화면이 앞에 설치되어있고 그 앞으로는 작은 데스크같은 선반이 놓여있었는데 작은 독서 용 스탠드와, 과자 바구니, 그리고 특이하게도 반달 모양의 미니 화장대와 포장도 뜯지 않은 화장품 세트 그리고 꽃이 놓여있었다.
꽃은 싱싱하고 향기가 나는 생화였다. 앞에 놓인 꽃을 집어 들어 향기를 맡고 있을 때, 스르륵, 가운데 벽인 줄 알았던 칸막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칸막이 건너편에 보이는 이는 바흐였다. 그는 꽃을 들고 있는 라희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칸막이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마음에 드나 보군. 미니바도 있어.”
그가 황금빛 동그란 단추를 누르자, 덮개가 위로 올라가며 둥그런 구멍이 뚫려있는 공간이 나왔다. 안은 냉장고인 듯 총 5개의 슬롯에는 시원한 음료수가 각각 담겨 있었다. 페리에, 망고 주스, 보스라는 상표를 달고 있는 물, 탄산음료 두 개. 라희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2층 맨 뒤쪽에는 라운지 바가 있는데 이따가 같이 가보지.”
“라운지 바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바처럼 바텐더가 있고 주문하면 음료를 만들어주지. 그 주변에 스낵도 있을걸.”
그의 말을 듣고 있자,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섹스앤더시티2 영화 예고편이 생각났다. 거기서도 비행기 안에 바가 있었는데 그럼, 이 비행기가 영화에 나왔던 그것일까? 라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본가에 갔을 때는 드라마 속 장면이었는데 어느덧 영화 속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니.
“웰컴 드링크입니다.”
좌석의 문 앞에서 승무원이 동그란 흰 종이를 미니데스크에 깔고 나서, 그 위에 황금빛 샴페인을 올려주었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근사한 향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웰컴 드링크와 함께 Emirates라고 쓰인 흰색 파우치가 주어졌는데, 옆에 있는 그에게도 주어진 걸로 보아 승객들에게 주는 어메니티로 보였다. 흰 파우치 안에는 불가리 제품의 화장품과 치약, 빗, 거울까지 들어있었다. 하나씩 꺼내보면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으려니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와 함께 안전 점검이 이루어지고 이내 이륙을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호텔 코스요리 같은 기내식이 나왔다. 기내식을 먹고 나니 비행기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이내 취침 모드로 변했다. 어두운 천정에는 밤하늘 별자리를 닮은 무수히 작은 빛이 빛을 밝혔다.
“두바이에는 새벽 5시쯤 도착할 거야. 한숨 자고 나면 두바이지.”
그가 몸을 뒤로 뉘이며 말했다.
“도착해서는 어디로 가나요?”
라희의 물음에 그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대답했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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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