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녀와 그와 나-34화 (3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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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스르륵, 자동차 창문을 연 그가 잊지 말라는 듯 짤막하게 다시 말했다. 심연처럼 깊은 새카만 눈동자가 당부하듯 라희의 얼굴로 내려앉았다. 라희는 네, 라고 작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 속에서 라희는 뒤돌아 원룸 건물 입구로 향했다.

건물 안 통로를 걸으면서 대체 며칠만 인지.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벌써 걸어 올라가는 계단부터 그리웠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 가만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있지 않아도 되는 곳. 라희는 1층의 통로와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그녀만의 포근한 공간이 있는 3층까지 단숨에 계단을 걸어 올라와 현관문 앞에 다다른 순간, 라희는 우뚝 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라희는 천천히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희의 원룸 현관은 노란색 뭔가로 뒤덮여있다시피 했다. 좀 더 가까이 걸어가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포스트잇.

현관문 전체에 샛노란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어디 간 거야.」

「안에 있지?」

「걱정돼」

「송라희. 송라희. 송라희. 송라희. 송라희.」

「증발한 거야?」

「MISS YOU. (보고 싶다)」

「mercy.(자비를.)」

「I AM ANGRY!!!! (화났어!!!)」

「REAL. 레알.」

「진짜 걱정된다. 연락해.」

「gotta go. (가봐야 해)」

라희는 우두커니 서서 현관을 가득 덮은 포스트잇을 읽어 나갔다. 영어와 한글이 뒤섞여 있었다. 개중에 접착력이 약한 포스트잇 몇 개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원룸건물의 계단 청소일은 토요일이라서 지금 발견한 것은 다행이었다. 만약,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청소 아주머니가 지저분하다며 전부 떼서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라희는 몸을 수그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포스트잇부터 하나둘 주워나갔다. 노란색의 포스트잇은 마치 늦가을 바람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 같았다.

「plz. call me. you know my number. it’s easy. just call my office. (전화 좀 해. 내 번호 알잖아. 쉬워. 직장으로 전화해)」

「Where are you? (어딨니?)」

바닥에 떨어진 포스트잇을 다 주운 라희는 현관에 붙어있는 쪽지를 떼면서 하나씩 내용을 읽었다.

「.........with him?(그와 있어?)」

「시무룩:(」

「정말 밉다.」

지난 일요일, 형수의 생일 장소였던 청담동에서 택시를 타고 나와 바흐의 오피스텔에 가 있는 동안 뿔테가 집 앞에 남긴 흔적이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여기 서서 이걸 전부 적어나간 걸까. 샛노란 포스트잇에 적힌 손글씨는 의사 아니랄까 봐 낙서처럼 필체가 엉망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입가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사방으로 뛰쳐나갈 듯 뻗어나간 자유로워 보이는 필체는 낙천적이고 즉흥적인 뿔테의 성격 그대로를 닮아 보였다.

차곡차곡 겹쳐 모이자 제법 두꺼워진 포스트잇을 묶음을 손에 들고서, 라희는 원룸 현관문을 열었다.

일요일 오후, 죽은 듯 취해 잠들어 있다가 뿔테에게 불려 나갔던 그 모습 그대로, 방바닥은 빈 맥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샤워 후 아무렇게나 걸쳐 두었던 젖은 수건도 어느새 쪼글쪼글 말라 있었고, 원피스로 급히 갈아입고 나서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가지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방을 치워놓고 나가는 건데, 그때는 서두르느라 경황이 없었다. 옆에서 계속 뿔테가 비키지 않고 재촉했었다. 라희는 잠시 흐트러진 방안 광경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창문 옆 책상으로 다가가 첫 번째 서랍을 뒤져 여권을 찾았다. 여권이 빠져나간 서랍 안의 자리에는 아까 현관에서 떼어낸 뿔테의 포스트잇 묶음을 넣어두었다. 그 후, 옷장에서 빈 쇼핑백을 하나 꺼내 생리 용품과 화장품, 여분의 속옷, 핸드폰 충전기와 배터리, 간편한 반바지와 티셔츠와 얇은 카디건을 구겨 담았다.

뭔가, 더 담을 게 없을까. 당분간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것은 분명한데. 라희는 초조한 시선으로 방안을 훑었다.

―빠앙.

그때, 건물 밖에서 중후한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물에 들어와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어서 내려오라고 재촉하는 소리 같이 들렸다. 라희는 다시 한 번 손에 든 여권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서, 쇼핑백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서려다가 돌연 멈칫했다. 아무래도 뿔테가 마음에 걸렸다.

뭐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그에게 전화를 걸면, 전화번호가 남게 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 그녀를 불러내는 사람은 바흐 한 명으로 족했다.

라희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방 옆 선반 위에 이사할 때 쓰고 남은 덕트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로 다가가 종이와 볼펜을 찾아들고서, 뿔테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그리고 들고 나와 종이 모서리마다 덕트 테이프를 넓게 찢어 현관 문 앞에 붙여 두었다.

“오래 걸렸군.”

라희가 차에 올라타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차는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이 라희의 손에 든 쇼핑백을 향했다. 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여권을 쇼핑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그를 향해 라희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챙길 것이 있어서요.”

“흐음.”

이내 그의 고개는 다시 책으로 향했기에 라희는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에 눈을 돌렸다. 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했다. 그의 차는 지금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사이로 라희는 생각에 잠겼다.

본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그의 말에 따라 짐이 있는 옆방에 가보니 쇼핑백 옆에 베이지색 더스트백이 놓여있었다. 루이비통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각인된 사각의 더스트백을 열었다. 안에는 다미에 패턴의 여행용 캐리어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와 바퀴가 달려 있고 새것 특유의 자르르한 광택이 흐르는 여행 가방의 앞부분은 수납 지퍼가 달려서 편리해 보였다.

라희는 그가 말한 대충 담으라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는 백화점에서 쇼핑한 옷가지들은 여행 가방에 넣어서 짐을 꾸리기를 바란 것이었다. 여권을 물어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는 여행 가방 까지. 정말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떠날 모양이었다.

백화점 쇼핑백에 있던 옷가지들을 풀어 헤쳐 옮겨 담으니 넓은 가방 안이 제법 찼다. 조금 여유가 남아 있길래 구두도 비닐에 돌돌 말아 두 켤레 챙겨 넣었다. 한참 동안 짐을 꾸린 라희는 빠진 것이 없나 점검했다. 속옷과 옷가지는 충분했는데, 나머지 필요한 자질구레한 짐은 전혀 없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낭패다.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라희는 가방의 손잡이를 끌며 방 밖으로 나왔다. 방문 앞 복도에서 보이는 계단 앞 휴게 공간에는 라희와 똑같은 여행 가방을 소파 앞에 세워둔 그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김 기사가 서 있었다.

꽤 오래 기다렸던 듯, 그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가득했다. 라희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된 것 같으니 나가지.”

“......어디로 가나요?”

당연한 물음이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라희는 멈춰 서서 답을 기다렸다.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더니 짧게 말했다.

“먼저 여권부터.”

그가 계단을 내려가자 김 기사가 여행 가방을 챙겨 따라나섰다. 1층 주차장에 도착해 바흐의 뒤를 따라 라희도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지금, 라희는 공항으로 향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에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정숙하게 주행하는 자동차는 어스름 속에 조명을 환히 켠 63빌딩 보이는 여의도를 지나 인천국제공항과 청라로 향하는 88분기점을 지났다. 마침내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라희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라희가 재차 묻는데도 그는 대답 없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독서 등을 켠 채 손에 든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선 눈동자만 움직여 책을 읽었다. 단정하고 곧은 옆모습의 새카만 눈은 활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라희는 침묵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중앙분리대의 노란 반사판들이 스쳐 지나가자 갑자기 뿔테의 노란 포스트잇 종이가 아른거렸다. 현관문 앞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적어 붙였을 뿔테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관심은 어색했고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은 의사인 그가, 대체 왜 진창에 뒹구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라희는 한참을 멍하니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흘려보냈다.

“........공항.”

바스락,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차 안의 침묵을 깨고, 그가 책장을 넘기며 늦은 답을 말했다. 정확한 목적지를 말해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여권을 가져오라 했으니, 제주도는 아니겠지. 그리고 사전 비자가 필요한 곳도 아니니 확실히 중국이나 미국은 아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걸까? 그나저나 이렇게 가도 되는 걸까. 설마 해외에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라희는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라희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서 다시 무심히 책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와 함께 앉은 차 안은 언제나처럼 침묵이 자리했다. 라희는 궁금해했던 마음을 비우기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던 차는 마침내 인천대교 톨게이트를 지났다. 도로에 드문드문 국내 항공사의 로고가 박힌 건물이 보이고 저 멀리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공항의 모습이 보였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 와보는 공항은 하늘에 떠다니는 모형비행기처럼 작은 크기가 아닌 커다란 실물로 압도해오는 비행기 크기만큼 이질적이었다. 이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난다. 마치 놀이공원에 와서 크고 거대한 어트랙션에 반한 아이처럼, 라희는 희뿌연 조명에 윤곽이 드러난 거대한 비행기를 보면서 설레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인천공항 내부 도로에 진입한 차가 3층 입구에 정지했다. 김 기사가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고, 트렁크에서 가방을 두 개 꺼내 놓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사장님.”

김 기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걸까? 라희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차에서 내린 바흐는 가방 두 개를 손에 들고 곧장 뒤 돌아 인천공항 건물 내부로 향했다. 라희는 허리를 숙여 배웅하는 김기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앞서 가는 바흐를 쫓았다.

성큼성큼 앞질러 가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라희는 그가 멈춰 서자,똑같이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인천 공항 섹션 H였다. 주변은 온통 붉은색의 스크린이 켜져 있는 H카운터였다.

그는 H 카운터 앞쪽에 있는 항공사 데스크로 걸어갔다. 라희는 항공사 로고를 읽었다.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Emirates 에미레이트.

데스크에 서 있던 붉은 모자와 흰 스카프를 두른 에미레이트 항공사 직원들은 그를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앞에 멈춰 서서 바지의 뒷주머니에서 여권과 지갑을 꺼냈다.

“여권.”

그가 뒤에 서 있던 라희에게 손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순간 놀란 라희가 머뭇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서 있자, 직원들의 주목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라희는 홀린 듯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뒤져 그에게 여권을 건넸다. 그는 나란히 미소 짓고 있는 여직원들을 향해 여권과 검은색 로마군의 옆모습이 새겨진 카드를 건네며 낮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바이. 오늘. 퍼스트 클래스. 두 사람.”

============================ 작품 후기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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